정치스릴러물의 대표 감독을 꼽자면 필립 노이스는 단연 몇 손가락 안에 드는 감독이다. <패트리어트 게임><긴급명령>처럼 이 분야에서 두고두고 회자될 만한 작품으로 자신의 입지를 다져왔다. 냉전 종식과 함께, 최근 들어 필립 노이스의 프로젝트는 규모에서 다소 축소된 면모를 보였다. 그러나 소규모 영화를 제작하면서도 그는 여전히 베트남전이 일어나기 전 미국이 개입한 사건을 폭로하는 <콰이어트 어메리칸>이나, 남아프리카공화국 인권운동가 패트릭 차무소의 실화를 옮긴 <캣치 어 파이어> 같은 정치스릴러를 만들며 자신의 목표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솔트>는 그러니까 이 분야에 정통한 필립 노이스 감독이 자신의 전공을 블록버스터급으로 확장한 야심찬 결과물이다. 영화는 CIA 요원 솔트(안젤리나 졸리)가 막 자수한 러시아 간첩을 심문하는 도중, 도리어 이중첩자로 지목당하면서 시작된다. 그의 증언에 따르면 구소련 시절 고도의 훈련을 받은 KGB 정예요원이 CIA에 침투해 있고 그 당사자가 솔트라는 것. 졸지에 그녀는 러시아 대통령과 미국 대통령을 암살할 위험인물로 낙인찍혀버린다. 동료들의 의혹 속에 남편의 신변보호를 위해 탈출한 솔트는 결국 CIA 정예요원으로서의 기술을 총동원해 도주를 거듭한다. 그 과정에서 솔트를 중심으로 한 거대한 음모 역시 서서히 드러난다.
처음부터 끝까지, 그러니까 영화는 졸리의 모습을 좇는 데 할애된다. 특히 영화의 첫머리 <본 시리즈>를 십분 차용한 시퀀스에선 이 영화를 보는 만족감이 가장 극대화한다. CIA 내부의 의심 속에 솔트는 폭탄 제조가로서 자신의 특기를 활용해 봉쇄된 문을 폭파하고 건물 안에서 탈출해 나온다. 신분을 숨기기 위해 착용했던 평범한 슈트 차림에 도주 중 신발을 잃어버리고 맨발로 대로변을 질주하는 솔트의 모습을 담은 화면은 한 컷도 버릴 수 없는 빽빽한 긴장으로 채워진다. 애시당초 필립 노이스 프로젝트를 완성해줄 가장 중요한 열쇠는 이미 <본 콜렉터>로 그와 함께 호흡을 맞춘 안젤리나 졸리였다. ‘할리우드의 여전사’로 입지를 굳힌 배우 안젤리나 졸리는 공공연히 ‘본드 역할을 해보고 싶다’는 바람을 피력해왔고, 애초 솔트를 맡기로 한 톰 크루즈가 역할을 고사하자 그 자리를 대신하겠다고 나선 것이다.
당찬 선택만큼이나 이 영화에서 이중 스파이로 분한 졸리의 활약은 화려하다. <툼레이더> 이후 <미스터 & 미세스 스미스> <원티드>에 이르기까지 그녀가 스크린에 보여주었던 액션 배우로서의 활약을 총정리해서 설명해야 한다면 <솔트> 한편을 보는 것으로 족할 정도다. 주연이 여배우로 바뀌면서 시나리오를 수정하지 않았을까 하는 의구심은 접어도 좋을만큼, <솔트>의 모든 액션신 수위는 높다. 맨발로 건물의 외벽을 거뜬히 타는 것 정도는 기본이다. 달리는 트럭 지붕 위에서 유조차로 몸을 던지는 고난이도 액션과 엘리베이터 장면에서 펼쳐지는 아찔한 모험 장면, 총싸움과 격투기 장면 등 매 순간 끊이지 않고 졸리의 액션 명장면이 이어진다. <에이리언>의 시고니 위버나 <롱 키스 앤 굿나잇>의 지나 데이비스의 궤를 잇는 졸리의 활약은 단순한 쾌감이라기보다 차라리 감동이다.
그러니 영화에 딴죽을 걸자면 졸리를 제쳐둔, 드라마적인 완성도일 것이다. 이중 스파이라는, 지금은 다소 식상한 소재를 끄집어낸 것 자체가 걸림돌을 제공하기에 충분했으니 말이다. 아니나 다를까, 스파이의 마음을 움직인 남편을 구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솔트의 모습을 볼 땐, 자칫 과도한 감상에 빠지는 건 아닐까 하는 우려도 없지 않다. 그러나 그의 전작이 역사적인 사실에 기초하여 긴장감을 불러일으키는 데 일조했다면, <솔트>는 조금 다른 방식의 노선을 택한 듯하다. 99분의 상영시간 동안, 필립 노이스 감독은 상황을 끊임없이 전환하며, 식상함의 순간에서 어떻게든 탈출하려고 전력을 다한다. 그 결과, 끊임없는 대화로 관객을 지루함에 빠트리는 우를 범하거나, 과도한 감상으로 감정을 자극하려는 장면들은 배제됐다. 별다른 수식없는 연속적인 액션신, 졸리라는 이 시대에 다시 없을 배우를 통해 완벽하게 구현된 장면들을 통해 필립 노이스는 장르적인 쾌감에 온전히 봉사한다. 다행히 의도대로 초반은 아주 훌륭하게 성공했고, 후반부도 그런대로 나쁘지 않은 결과물을 만들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