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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훈] 2년 군대 갔다오는 심정으로 찍는다
강병진 사진 최성열 2010-07-29

<고지전>의 장훈 감독

사실 장훈 감독은 <의형제>의 다음 작품을 생각하지 않았다. 그가 꿈꾼 당분간의 일상은 “책 보고, 커피 마시고, 산책하는” 것이었다. 데뷔작인 <영화는 영화다>에 이어 곧바로 더 큰 규모의 프로젝트를 이제 막 끝낸 때였으니 그 심정도 알 만하다. <의형제> 후반작업 도중 받아본 <고지전>의 시나리오도 원래는 읽고서 거절해야겠다는 생각으로 펴들었다. 쉬고자 했던 마음은 2시간 만에 바뀌었다. “언젠가는 전쟁영화를 찍어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었다. 내가 어떤 작품을 만들든 그건 한국전쟁에 관한 영화였을 텐데, 지금이 아니면 나중에라도 이런 시나리오를 만날 수 있을까 싶더라.” 드라마 <히트>와 <선덕여왕>의 박상연 작가가 쓴 <고지전>이 장훈 감독이 생각하던 전쟁영화의 모습과 닮아 있었던 게 가장 큰 이유였다. 영화의 액션을 강조하면서 오락적인 재미로만 소비하게 만드는 전쟁영화는 싫었다. 영화적인 즐거움뿐만 아니라 전쟁을 바라보는 심도 깊은 태도가 담겨 있었으면 했다. 무엇보다 전쟁으로 죽어간 사람들이 단순히 감정적으로 소비되는 전쟁영화가 아니었으면 했다. <고지전>의 시작은 6·25전쟁이 발발한 지 약 1년이 지난 1951년 7월이다. 남한과 북한은 휴전회담을 시작했고, 전쟁은 그렇게 끝나는가 싶었다. 하지만 실제 휴전회담은 2년이 지난 뒤에야 결론을 찾았다. 그렇다면 그 2년 동안 전쟁에 참전한 남북한 병사들은 무얼 하고 있었을까. <고지전>은 휴전협상이 진행되는 2년 동안 하나의 고지를 탈환하고자 했던 남북한 병사들의 전투를 그린다. 시간적 배경상, <고지전> 속의 한국전쟁은 같은 전쟁을 그린 기존의 영화와 드라마 속 전쟁과 다르다는 점이 중요해 보인다. 그건 6·25 60주년을 맞은 올해에 등장한 작품들과도 다른 점일 것이다. 이들의 전쟁이 아직 끝나지 않은 전쟁이라면, <고지전>은 모두가 끝났다고 하는 전쟁의 이야기다. 당연히 질문이 생긴다. 다 끝난 전쟁인데, 이들은 왜 싸워야 했을까.

지도상의 1cm를 위해 죽고 죽이고

영화의 주인공은 2명의 남자다. 언뜻 두 남자의 대립구조를 설정한 <영화는 영화다>와 <의형제>의 설정처럼 보이지만, 전작의 남자들이 서로 다른 세계에 속해 있었다면 둘 다 남한쪽 군인인 <고지전>의 남자들은 조금은 다른 관계에 놓여 있다. 전쟁 이전, 여리고 소심했던 남자 김수혁은 지난한 고지전투를 겪으며 점점 전쟁에 기능적으로 적응해간다. 또 다른 남자는 그의 오랜 친구인 강은표다. 수혁과 함께 고지전투에 휘말린 그는 친구의 변해가는 모습을 목격하는 인물이다. 여기에 북한군으로 설정된 한명의 여성과 또 다른 2명의 남성을 포함한 5명의 인물이 <고지전>을 끌어가는 캐릭터들이다. 이들이 벌이게 될 고지전투의 양상은 계통이 없다. 남한과 북한의 병사들 모두 휴전선이 더 멀리 있기를 바랐을 것이다. 정확히 말해 전쟁을 일으킨 사람들의 욕망이 그러했을 것이다. 7번의 시도 끝에 탈환한 고지는 바로 다음날 주인이 바뀌기도 하고, 한번 점령된 고지는 열흘 동안 주인이 바뀌지 않기도 한다. 하지만 그래봤자 이 고지를 탈환했을 때, 지킬 수 있는 영토는 지도상의 1cm에 불과하다. “인생은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지만 멀리서 보면 희극”이라고 했던 찰리 채플린을 떠올릴 수 있는 대목이다. 병사들에게는 목숨을 건 치열한 전투였지만, 지도상에서는 사소한 땅따먹기로 보일 전쟁이다.

<고지전> 속에 장훈 감독의 전작과 비슷한 정서가 있다면, 그건 이질적인 인물들의 정서적인 만남이다. <고지전>의 남북한 병사들은 단순히 대립하는 게 아니라, 인간적인 교감을 나누기도 한다. 아직은 많은 내용을 감출 필요가 있다고 한 장훈 감독은 제1차 세계대전을 배경으로 한 크리스티앙 카리옹 감독의 <메리크리스마스>(2005)를 예로 들었다. “교전 중인 양쪽 병사들이 크리스마스 때 함께 캐럴을 부르며 잠시 휴전을 한다. 술까지 같이 마시면서 약간의 우정을 나누는데, 이후 그들은 자기 상부에서 폭격을 때리려고 하면 서로에게 피하라고 알려준다. 그 정도까지는 아니지만 <고지전>에서도 나름 교감의 정서와 드라마가 드러날 것이다.”

고지를 재현하려니 산이 필요하네

장훈 감독이 생각하는 <고지전>의 관건은 한국적인 전쟁의 무대를 담아내는 것이다. <고지전>의 시나리오를 읽고 떠올렸다는 <플래툰>을 비롯해 전쟁영화의 현대적 모범을 보여준 <라이언 일병 구하기>나 <씬 레드라인>과의 차별성을 염두에 둔 부분이다. 또한 그가 전작에서 보여준 장기이기도 할 것이다. <의형제>에서 그림자를 쫓던 한규의 질주 속에 언뜻 비치는 서울은 ‘뉴타운 개발 이주 촉구기간’이란 플래카드가 나부끼는 곳이었고, 한규와 지원이 만난 곳은 이주노동자들이 모여 축제를 벌이던 섬이었다. 공간의 스펙트럼을 놓치지 않았던 그에게 “찾으면 찾을수록 끝도 없이 나오는 한국전쟁의 자료사진”들은 욕심이 생기게 만들었다. “내가 한국전쟁에 대해 막연히 갖고 있던 이미지가 정말 작은 부분에 불과했다는 걸 알았다. 예를 들어 흔히 한국전쟁 속 인물은 남북한 병사 아니면 미군인데, 실제 유엔군이 참전한 만큼 자료 속에는 정말 많은 나라의 다양한 사람들이 있었다. 머리에 두건을 쓰거나, 그 시대에 방탄조끼를 입고 있거나, 심지어 치마를 입고 있는 외국인 병사도 있다. 그런 자료를 확인할 때마다 내가 쉬운 결정을 내릴까 싶어 두렵다. 욕심만큼 모든 걸 담을 수는 없겠지만, 이야기와 적절한 균형을 이루는 선에서 공간적인 디테일을 담아볼 계획이다.”

특히 영화의 가장 큰 무대가 될 ‘고지’는 또 하나의 주인공이기에 공들여 재현할 수밖에 없는 공간이다. 장훈 감독이 자료를 통해 확인한 당시의 고지들은 “외국의 사막” 같았다. 대부분 나무가 없는 산이었고, 듬성듬성 자란 식물들은 지금의 한국에서 볼 수 없는 형태였다. 뿐만 아니라 전쟁이 진행되면서 폭격과 사계절의 변화를 맞이할 영화 속 고지는 그때마다 다른 모습과 감정을 전해야 한다. 이를 위해 제작진은 전주쪽에 아예 하나의 산을 조형하기로 했다. 일정한 언덕이 있는 곳을 6·25 시대의 고지로 리모델링하는 것이다. “처음에 연출하기로 결정했을 때만 해도 산이 필요할 줄 몰랐다. 산을 만든다고 하니까 류성희 미술감독님은 ‘전쟁영화가 아니라 SF영화’라고 하더라. (웃음)” 머릿속에서 상상한 것보다 놀라운 이미지를 보여주기 위해 장훈 감독이 선택한 전략은 “실제적인 모습을 찾는 것”인 셈이다. 현재 영화의 비주얼을 총괄할 황기석 촬영감독과도 가장 힘들게 고민하고 있는 지점이다. “영화적으로나 기술적으로 새로운 촬영방식을 적용하더라도 단지 비주얼적인 만족감에 그치지 않는 느낌이기를 바라고 있다. <허트 로커>를 보면 고속촬영으로 먼지의 입자를 드러내는 장면이 있는데 단지 기술적인 성취로 보이지 않고 영화의 전체적인 톤과도 결부되어 있다는 점에서 놀라웠다. 효과를 잘 쓰는 것만이 중요한 게 아니라, 영화의 정서를 고려한 새로운 효과를 고민하는 중이다.” <고지전>은 오는 8월부터 내년 겨울까지 촬영될 예정이다. 2년여에 걸친 전쟁을 담게 될 장훈 감독의 입장은 군 입대를 앞둔 심정이다(머리까지 짧게 잘랐다). 스탭들을 비롯해 현재 캐스팅된 주·조연급 배우들 사이에서는 촬영이 끝난 뒤 ‘전역증’을 만들어 달라는 주문이 있을 정도. 6·25전쟁 당시 가장 치열했던 전투는 장훈 감독에게도 가장 녹록지 않은 현장이 될 듯 보인다.

내게 영감을 주는 이미지

자료를 찾으며 발견한, 백마고지를 비롯한 고지들의 사진자료들은 너무나 강한 인상을 남겼다. 엄청난 양의 포탄을 맞고, 군인들이 파놓은 참호와 교통호에 피부가 벗겨지고 살점이 떨어져나간 모습처럼 보였다. 전쟁을 겪은 사람뿐만 아니라 땅도 슬픈 느낌이었다. 그곳에서 남북의 병사들은 우리가 상상하기 힘든 처절한 전투를 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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