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천 마니아들이라면 이미 예매는 오래전에 끝냈다. 인터넷에서는 올해의 강력 추천작들이 떠돌아다닌 지 오래다. 가장 엽기적이고 흉측하고 구역질나고 비린내나는, 다시 말해 ‘부천다운’ 영화가 무언지 이미 여러분은 잘 알고 있다. 올해 부천의 고어와 스플래터는 어느 해보다도 강력하다. 하지만 가장 빛나는 청춘과 오래된 우주의 염원을 담은 작품들도 오롯하다. 영화제 개막 직전 <씨네21>이 추천하는 최후의 추천작 열편!
1. 제대로 된 호러 복원을 보고 싶다면
<하우스 오브 데블>(The House of the Devil) 타이 웨스트/ 2009년/ 95분/ 미국/ 부천 초이스
호러영화의 크리에이티브는 고통받고 있다. <호스텔>과 <쏘우> 시리즈가 막을 연 고문 슬래셔는 장르적으로 부패한 상태고, 마이클 베이가 진두지휘한 고전 슬래셔 리메이크는 이미 썩어서 문드러졌다. 일본과 한국이 이끌던 아시아 호러영화 붐은 스스로를 카피하다가 내파했다. 유럽에서 온 신예들은 그저 강력한 고어에만 점점 취미를 붙이고 있는 모양새다. 호러영화에 미래는 있는가. <하우스 오브 데블>은 아주 멋진 대안을 제시한다. 새로운 아이디어도 없고 옛것을 새롭게 업그레이드해도 별 소용이 없다면 그냥 옛날처럼 만들라는 거다. 신예 타이 웨스트의 데뷔작 <하우스 오브 데블>은 1980년대 오컬트 엑소시즘 장르와 슬래셔 장르를 거의 ‘복원’에 가깝게 재현한 영화다. 이야기부터 복고적이다. 주인공 사만사는 친구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오로지 높은 일당 때문에 교외의 음침한 저택에서 베이비시터 아르바이트를 하기로 한다.
그러나 그 집에 돌봐야 할 아기 따위는 애초에 없었고 그날은 마침 개기월식이다. 이쯤 되면 이 모든 게 사만사를 희생자로 만들기 위한 악마주의자들의 소행이라는 건 (적어도 장르팬들이라면) 쉽게 눈치챌 수 있을 거다. 그런데 <하우스 오브 데블>을 오로지 ‘복원’이라는 말로만 설명하는 건 안된다. 영화는 크레딧까지 80년대 호러영화를 흉내내고 있지만 퀄리티마저 80년대적이지는 않다. 타이 웨스트 감독은 골동품을 복원하는 게 아니라 80년대 호러영화의 스타일로부터 21세기 호러영화들이 잊고 있었던 장르적 미덕을 멋지게 뽑아낸다. 그 미덕이 뭐냐고? 시작부터 미친 듯이 관객에게 피와 살점을 던져대는 대신 마지막 클라이맥스가 오기 전까지 조용하게 서스펜스를 쌓아나가며 관객의 심장을 거머쥐라는 거다. <하우스 오브 데블>은 과거의 아카이브를 뒤져서 미래를 발견한 역작이다.
2. 악! 그 미국소녀 어떡하니
<인간지네>(The Human Centipede) 탐 식스/ 2009년/ 88분/ 네덜란드/ 월드 판타스틱 시네마
이 영화를 대체 뭐라고 설명해야 할 것인가. 악취미를 위한 악취미? 막장까지 치달은 호러 장르의 상상력? 물론 그게 나쁘다는 건 아니다. 장르팬들이 새로운 상상력으로 가득한 악취미를 얼마나 즐기는지 우리 모두 잘 알고 있지 않은가. 하여간 기가 막힌 이 영화의 주인공은 샴쌍둥이 분리 전문의인 미친 박사다. 그는 자동차가 고장나서 우연히 박사 집으로 온 두 미국 소녀와 한 일본 남자를 인간지네로 만든다. 어떻게? 세 인간의 입과 항문을 외과수술로 이어붙이겠다는 거다. 장르적 악취미에 단련된 호러팬들조차 기겁하게 만드는 <인간지네>는 관객의 비위와 수치심을 극한까지 밀어붙이려 작정한 진정한 괴작이라 할 만하다. 이를테면 인간지네의 첫 번째 마디를 담당하는 일본인이 배설을 하며 자신의 항문에 입이 붙어 있는 미국인 소녀에게 일본어로 “고멘네!”(미안해!)라고 소리치며 울부짖는 장면 같은 것. <인간지네>는 판타스틱 페스트와 스크림페스트 등 수많은 장르 국제영화제 수상작이다. 호기심과 비위가 정비례하지 않는 관객에게는 절대 권하지 않겠다.
3. 우린 경고했어요, 분명히
<세르비안 필름>(A Serbian Film) 스르쟌 스파소예비치/ 2010년/ 103분/ 세르비아/ 금지구역
비위 약한 관객에게 <인간지네>는 절대 권하지 않는다고 앞에서 말했다. <세르비안 필름>은 어떠한 관객에게도, 심지어 비위와 심장이 압도적으로 강력한 호러팬에게도 마음 놓고 권하질 못하겠다. 맞다. 이 영화는 그 정도로 강하다. 파울로 파졸리니의 전설적인 <살로 소돔의 120일>, 메이드 인 프랑스 고어영화 <마터스> <인사이드> 정도는 <세르비안 필름> 앞에서는 가족영화라고 할 만하다. 주인공은 은퇴한 세르비아의 포르노 스타 밀로스다. 그는 돈을 벌기 위해 예술적인 포르노의 출연 제의를 받아들이지만 그 포르노의 정체는 도저히 보통의 인간이 감당할 수 없는 종류다. 밀로스는 도망치려 하지만 이미 발이 묶여버린 그는 환각상태에서 입에 담을 수 없는 포르노를 찍기 시작한다. 그게 뭐냐고? 인간이 상상할 수 있거나,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모든 종류의 행위라고만 말해두자. 이 영화를 추천작 열편에 포함시키는 이유는 오로지 당신에게 경고하기 위해서다. <세르비안 필름>은 마음에 상처를 남기는 영화다. 물론 지금 이 글을 읽는 당신은 호기심에 손톱을 물어뜯고 있을 게 틀림없다.
4. <쏘우> 시리즈 각본가의 감독 데뷔작
<콜렉터>(The Collector) 마커스 던스탠/ 2009년/ 90분/ 미국/ 월드 판타스틱 시네마
일단 이 영화의 감독이 <쏘우4>에서 <쏘우7>까지의 각본을 담당한 마커스 던스탠이라는 걸 알아야 한다. 그의 데뷔작인 <콜렉터>는 당연히 <쏘우>를 비롯한 지난 10년간의 고문-슬래셔 유행 속에서 존재한다. 또 다른 고문-슬래셔라며 고개를 돌릴 필요는 없다. <콜렉터>는 뭔가 좀 치졸했던 최근 <쏘우> 시리즈보다 훨씬 장르적으로 고전적인 재미가 있다. 주인공 아킨은 보석중개인의 집을 수리하던 중 빚을 갚을 돈을 마련하기 위해 의뢰인의 저택으로 몰래 들어간다. 그런데 보석중개인 부부는 인간을 수집하는 연쇄살인마에게 붙잡힌 상태인데다가 저택은 이 괴이한 살인마가 설치해놓은 수제 부비트랩으로 발디딜 틈이 없다. 이제 아킨은 온갖 트랩을 피해서 살아남는 동시에 어딘가에 숨어 있는 부부의 딸을 구해야 한다. <쏘우> 시리즈와 비슷한 설정으로 시작하지만 <콜렉터>는 3층 저택에서 벌이는 아킨과 딸과 살인마의 톰과 제리식 추격을 아주 찰떡지게 요리해낸다. <쏘우>에다 웨스 크레이븐 스타일의 슬래셔영화를 더했다고 생각해보시라. 여러모로 미래가 기대되는 감독의 데뷔작.
5. SF감독 지망생은 필견!
<카고>(Cargo) 이반 엥글러/ 2009년/ 117분/ 스위스/ 부천 초이스
SF영화를 만드는 건 할리우드 바깥에서도 더이상 어려운 일이 아니다. 대륙과 국가에 관계없이 균등하게 발전하고 있는 디지털 특수효과 덕분이다. 문제는 SF장르가 가지고 있는 고유의 관습을 얼마나 잘 구사하느냐인데, 스위스에서 날아온 SF영화 <카고>는 훌륭한 성공 사례다. <카고>의 무대는 오염된 지구를 떠나 모든 인류가 우주정거장에서 살고 있는 미래다. 인류의 마지막 희망은 지구와 흡사하게 환경을 설계한 행성 레아다. 주인공인 의사 로라는 언니가 살고 있는 레아로 가기 위해 화물을 운반하는 카고선에 탑승한다. 그런데 모두가 냉동수면 중인 카고선에서 누군가가 살인을 저지르고, 인류의 희망을 건 거대한 사기극이 차츰 드러나기 시작한다. <카고>의 아이디어가 그리 기발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젊은 감독 이반 엥글러는 <에이리언> 같은 할리우드 선배들의 장르적 관습과 아서 C. 클라크 같은 고전 작가들의 오래된 아이디어를 능숙하게 접목시켜 꽤 근사한 장르영화를 만들어냈다. 스위스 최초의 장편 SF영화 <카고>는 지금 한국에서 SF영화를 꿈꾸는 젊은 감독들에게 하나의 좋은 본보기가 될 거다.
6. 2시간30분의 마약체험?
<엔터 더 보이드>(Enter the Void) 가스파 노에/ 2009년/ 155분/ 프랑스/ 스트레인지 오마주
<엔터 더 보이드>가 2009년 칸영화제 경쟁부문에서 상영했을 때 극장은 끊임없는 야유로 시끌벅적했다. 그러나 <엔터 더 보이드>가 가스파 노에의 전작 <난 혼자다>(1998), <돌이킬 수 없는>(2002)만큼 참을 수 없는 영상폭력을 제공하기 때문에 야유를 받았던 건 아니다. 오히려 2시간30분의 막가파 영상실험에 질린 기자들의 항의였달까. 도쿄에서 마약과 몸을 팔며 살아가는 미국인 남매의 이야기를 가스파 노에는 2시간30분 동안 1인칭 시점으로만 이끌고 간다(절반은 살아 있는 주인공의 시선, 나머지 절반은 죽어서 영혼이 된 주인공의 시선이다). 주인공이 LSD를 들이마셨을 때 우리가 화면으로 보는 것은 디지털 특수효과로 만들어낸 빛의 향연이다. 가스파 노에는 68년 관객이 대마초를 피우고 극장으로 몰려가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를 보았을 때 느꼈을 환각적인 체험을 되살리고 싶어 한 게 아닐까. 할 소리가 아닐지도 모르겠다만 몰래 소주 한잔 원샷하고 극장에 들어가면 이 마약적인 영화를 제대로 즐길 수 있을 거다. 그러라는 소리는 절대 아니다. 그렇지만….
7. 스타워즈 코스프레 입장 관객 우대
<조지 루카스: 이 사람을 고발합니다>(The People vs. George Lucas) 알렉산드르 필립/ 2010년/ 93분/ 미국/ 판타스틱 감독백서
조지 루카스. 아아. 이 거대한 이름은 애증의 대상이다. 우리는 <스타워즈>의 우주를 우리에게 소개한 창조자 조지 루카스를 열정적으로 사랑한다. 그러나 오리지널 시리즈를 디지털로 훼손한 뒤 원본마저 없애버린 조지 루카스를 모두가 혐오한다. 새로운 <스타워즈> 시리즈는 어떻고. 다른 감독에게 맡기라는 팬들의 성화를 무시하고 시대에 뒤떨어진 연출력으로 우리를 낙담시킨 조지 루카스에 대한 증오는 시간이 갈수록 더 활활 타오르는 듯하다. 알렉산드르 필립 감독은 대체 왜 우리 모두가 조지 루카스를 사랑하는 동시에 그토록 혐오하는가를 팬들과 영화 관계자들의 인터뷰, 팬들이 만든 패러디 영상물과 애니메이션 등을 이용해 멋지게 설명한다. <스타워즈> 세계를 그리스 신화 혹은 성경처럼 받아들이는 팬들이 (오리지널 시리즈를 함께 완성한 스탭들과 팬들의 노고를 무시한 채 스스로를 신으로 받아들이는) 돼지 조지 루카스를 비난하는 장면들은 정말 배꼽이 빠지게 재미있다. <스타워즈> 시리즈의 팬이라면 이 유쾌한 다큐멘터리를 절대로 놓쳐서는 안된다. 이왕이면 코스프레를 하고 극장으로 들어가시라.
8. 이번 부천의 하이라이트, 건담사마
<기동전사 건담: 역습의 샤아>(機動戰士ガンダム 逆襲のシャア) 도미노 요시유키/ 1988년/ 120분/ 일본/ 선라이즈 회고전
건담 극장판 역사상 최고의 걸작을 꼽으라면 대부분의 팬들은 잠시의 망설임도 없이 <기동전사 건담: 역습의 샤아>를 부르짖을 것이다. 이야기는 첫 번째 <기동전사 건담> TV시리즈 속 1년 전쟁이 끝난 지 14년 뒤. 샤아 아즈나블은 네오지온의 총수로 되돌아온 뒤 거대한 우주요새 액시즈를 지구에 떨어뜨려 핵겨울을 발생시키려 한다. 물론 샤아의 영원한 숙적 아므로 레이가 새로운 병기 뉴건담으로 그의 계획을 저지하려 한다. 짧은 글에 이 걸작의 감동을 다 담을 수는 없고, 일본 극장 개봉시 포스터의 문구가 “당신은 아직까지 건담을 모른다”였다는 것만 언급하고 넘어가야겠다. 이번 회고전에서는 81년판 <기동전사 건담> 극장판 3부작과 2005년에 새롭게 TV시리즈를 재편집하고 추가영상을 더한 <기동전사 Z 건담> 극장판 3부작, 2010년 신작인 <기동전사 건담 UC>가 모두 상영된다. 오랜 건담 오덕이 아니라면 <기동전사 건담: 역습의 샤아>는 최소한 <기동전사 건담> 극장판 3부작 정도는 보고난 뒤 관람하길 권한다. 우주의 학살자, 건담의 창시자인 도미노 요시유키 역시 부천을 방문할 예정이다. 우주적 오덕의 피가 부천에 끓어오른다.
9. 시간을 뛰어넘는 청춘예찬
<시간을 달리는 소녀>(時をかける少女) 다니구치 마사아키/ 2010년/ 122분/ 일본/ 월드 판타스틱 시네마
먼저 <시간을 달리는 소녀> 시리즈의 시간을 정리해보자. 한국 관객이 가장 먼저 접한 <시간을 달리는 소녀>는 2006년작 극장용 애니메이션이다. 그러나 애니메이션이 오리지널은 아니다. 일본 SF작가 쓰쓰이 야스타카가 1967년에 발표한 동명 원작은 이미 여러 번 드라마와 극장용 영화로 만들어졌다. 가장 유명한 것은 1972년 <NHK>에서 <타임 트레블러>라는 제목으로 제작한 드라마와 1983년 당시 일본 역대흥행성적 1위에 오른 극장판이다. 2006년판 애니메이션이 원작의 20년 뒤를 무대로 한 일종의 속편이었다면 2010년판 <시간을 달리는 소녀>는 애니메이션판 주인공의 이모였던 가즈코의 여고생 딸을 주인공으로 한 또 다른 속편이다. 2010년의 소녀가 과거로 돌아가 벌이는 소동과 이루어질 수 없는 순애보를 뒤섞으며 관객을 웃기고 울리는 재미는 딱 <시간을 달리는 소녀> 시리즈답다. 전설적인 아이돌 스타 하라마 도모요가 출연한 1983년 극장용 영화를 구해서 본 뒤 감상하면 감동은 두배다. 83년이든 2010년이든 <시간을 달리는 소녀>는 시간을 달리는 청춘에 대한 가슴어린 예찬이다.
10. 학원청춘영화의 강국은 어디?
<소프트보이>(Softboys) 도요시마 게이스케/ 2010년/ 113분/ 일본/ 월드 판타스틱 시네마
일본이 제일 잘하는 건 뭘까. 가전제품? 생각해보니 가전제품 시장의 일본 독점 시대는 이미 막을 내렸다. 자동차? 고급시장에선 독일차에 밀리고 저가시장에선 한국에 밀린다. 패션? 그들의 패션은 너무 독특한 나머지 세계화가 어렵다. 그러나 어딘가 허허실실한 청춘영화에서라면 일본은 여전히 베스트 오브 베스트다. <소프트보이>는 일본 사가현의 유일한 남자 소프트볼부에 관한 실화를 영화화한 작품이다. 현 내에 남자 소프트볼부가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된 직업학교 학생들이 소프트볼부를 만들어서 전국대회에 나간다. 물론 남자 소프트볼이라는 소재 자체가 이미 코미디다. 남자들은 자몽만한 공을 언더로 던지는 소프트볼 대신 야구를 하는 종족들이며, 남자 소프트볼 전국대회라고 해봐야 동네잔치에 불과하다. <소프트보이>는 <워터 보이즈> 같은 일본 학원청춘영화의 관습을 그대로 빌려온 뒤 좀더 소프트하고 비주류적으로 관객을 웃기는 데 소임을 다한다. 시미즈 다카시와 공동으로 감독한 <유령 vs 우주인>(2007) 같은 코미디 호러영화로 장르팬들에게 잘 알려진 도요시마 게이스케의 첫 번째 청춘학원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