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슴푸레할 무렵 충무로에는 자동차가 한대도 다니지 않았다. 텅 빈 거리를 몇몇 동료와 함께 걷는데 갑자기 굉음이 들려왔다. 이런! 하늘에서 대형 헬리콥터가 추락하고 있는 게 아닌가. 쿠쿵! 잠시 뒤 또 다른 헬리콥터가 내 바로 앞으로 떨어지고 있었다. 부웅! 아아, 이런 식으로 인생이 끝나는 건 곤란한데, 라고 생각하는 순간 뒤편에서 강병진의 목소리가 들렸다. “으음, 이게 김혜리 선배가 말했던 꿈이구나.”
월드컵으로 몸이 지쳐 있던 몇주 전의 꿈 이야기다. 이 꿈은 개인적으로 몇 가지 의미를 갖고 있다. 첫째, 처음으로 꿔보는 HD 화질의 꿈이라는 점. 헬기가 추락하는 장면의 해상도가 어찌나 뛰어났던지 파일럿이 탈출 버튼을 누르려 애쓰는 모습까지 생생하게 보였다. 꿈속에서 HD 화질 또는 3D 영상 또는 5.1채널 오디오 체험이 가능하냐, 라고 진지하게 질문하신다면 절대 답할 수 없지만 어쨌거나 나의 인식체계 속에서는 분명 HD였다(꿈속 강병진의 “정말 HD네”라는 혼잣말이 큰 영향을 미쳤겠지만). 두 번째, 꿈을 꾸고 있다는 사실을 자각했는데 알고 보니 그것도 꿈이었다는 것. 꿈속의 꿈을 처음 경험한 건 아니지만 그렇게 눈뜬 채 꿈을 꾸는 모습을 꿈꾼 것은 처음이었다.
장황하게 ‘개꿈’ 이야기를 꺼내는 건 짐작하시다시피 <인셉션> 때문이다. 걸작인 <다크 나이트>로 거장이라는 칭호를 붙여도 이상하지 않게 된 크리스토퍼 놀란의 신작이라는 점,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의 농익은 연기를 만날 수 있다는 사실, 초현실주의적인 비주얼 등 높이 평가할 요소가 숱하게 많지만, 개인적으로는 꿈이라는 주제를 놓고 정면승부한다는 사실이 가장 인상적이었다. 어릴 적 이상하게 꿈에 집착했는데, 한때는 꿨던 꿈을 다시 꾸기 위해 잠이 들기 전 그와 관련된 생각만 집요하게 한 적이 있을 정도다. 물론 <나이트 메어>를 본 뒤에는 잠에 빠지지 않기 위해, 꿈을 꾸지 않기 위해 발버둥치기도 했지만 꿈에 대한 집착은 사라지지 않았다. <인셉션>을 보면서 크리스토퍼 놀란 또한 꿈이라는 세계에 상당히 집착해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영화 속 꿈의 세계에 대한 그 정교한 설계술은 즉흥적으로 만들어낼 수 있는 게 아니다. 아니나 다를까 외지와의 인터뷰에서 놀란은 어릴 때부터 꿈에 매료돼왔고 이 영화를 구체적으로 고민한 것도 10년이 됐다고 말한다. 그러니까 <인셉션>은 놀란의 ‘꿈에 대한 꿈을 위한 꿈의 프로젝트’인 셈이다.
여기에도 꿈꾸는 이들이 있다. 이번주 특집 기사를 통해 신작의 윤곽을 공개한 8명의 감독이 그들이다. 지금 그들이 만들고 있는 작품이 평생을 바쳐온 명실상부 꿈의 영화가 아닐지라도 이 작품 안에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녹여내야 한다는 점에서는 꿈의 프로젝트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들 마음속 꿈이 대박흥행이건 트로피건 레드카펫이건 각자 모두 이루시길 빌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