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국(박해일)은 20년간 의절한 아버지 목형(허준호)의 부고 소식을 듣고 아버지가 머물렀던 시골 마을을 찾는다. 이장 천용덕(정재영)과 그를 따르는 덕천(유해진), 석만(김상호), 성규(김준배), 영지(유선) 등은 그에게 경계의 시선을 보낸다. 해국은 점차 아버지의 죽음과 마을 사람들 사이에 어떤 연관이 있는지 의심하게 되고, 자신 때문에 좌천됐던 검사 민욱(유준상)에게 도움을 청한다.
한국 현대사의 가장 더러운 진면목들이 가상의 낯선 시골 마을에 뭉쳐 있다. 한국에서 살아가는 우리 모두, 그 수많은 트라우마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베트남전, 부동산 투기, 수상쩍은 기도원, 경찰과 검찰로 대표되는 공권력의 폭력 행사, 자력구제할 수 없는 소녀를 마을 남자들이 집단으로 강간하는 사건. 어느 한구석에는 반드시 ‘걸려든다’. 이 모든 더러움이 파멸과 구원의 양 갈래로 치닫는 속도전, 크고 넓고 빠른 그 이야기가 <이끼> 원작의 세계다. 윤태호 작가는 <이끼>의 작은 바운더리 안에 그렇게 “내 인생 최고의 밀도”를 켜켜이 쌓아놓았다.
영화 <이끼>는 20년을 넘나드는 이 장대한 이야기를 깔끔하게 재배치하는 데 성공했다. 갈등의 주요 축이 되는 목형의 삶을 초반 오프닝 신부터 바로 치고 나가며 파노라마로 압축한달지, 불가해한 삶의 모서리에서 극한의 공포를 느끼는 순간 뛰어난 배우들의 얼굴과 몸짓을 극적으로 활용한달지. ‘말’로 설명하기에 더해 ‘보여주기’를 적극 활용했다는 점에서 강우석 감독의 ‘이야기꾼’으로서의 파워는 한층 강력해졌다. 그는 이번에 원작으로부터 절묘한 은유의 기법 역시 끌어안으려 한 것 같다.
그러나 그것은 장점인 동시에 다소 함정이 될 수도 있다. 사건들의 숨가쁜 진행 속에서 주요 갈등의 섬세한 디테일은 어느 정도 희생당할 수밖에 없었고, 더불어 중간중간 호흡을 고르며 그 디테일을 잡아채려 시도하거나 혹은 긴장감을 완화시키기 위해 뜬금없는 유머가 비죽 튀어나올 때 스릴러 혹은 누아르의 장르적 쾌감은 분산된다. 드라마로만 보기엔 사건들이 안겨주는 충격의 강도와 진폭이 무척 크고, 누아르 스릴러로 보기엔 치밀함이 다소 헐거워졌다. 작은 바운더리 안에 크고 넓은 이야기를 눌러 담을 때의 그 밀도를 최후의 한순간까지 고려했을 계산법이, 특히 막판 해국과 이장의 최후의 대결에선 약간 아쉽다. 캐릭터들은 하나하나 생생하고 주요 사건들은 허투루 흘러가지 않은 채 스토리의 기승전결을 꽉꽉 채우지만 그것이 하나로 뒤엉켜 마지막 폭발이 일어나는 순간엔 이전까지의 미세한 틈과 균열들이 다소 힘을 약화시켰다는 인상을 받게 된다. 강우석 감독의 새로운 시도가 앞으로 그의 영화 세계를 어떻게 바꿔나갈지, 이제는 ‘<이끼> 이후’가 정말 궁금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