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나친 당도로 대뇌피질이 녹아내리기 전에 전편의 이야기를 한번 정리해보자. <트와일라잇>은 평범한 소녀가 섹시한 뱀파이어와 사랑에 빠진다는 이야기다. 후속편인 <뉴문>은 평범한 소녀가 섹시한 뱀파이어와 늑대인간 사이에서 갈등한다는 이야기다. 뭔가 빠진 게 있냐고? 그럴 리가. 물론 사랑과 갈등 사이에 기억에 그리 남지 않는 전쟁이 종종 끼어들긴 했던 것도 같다. 3편인 <이클립스>는 평범한 소녀가 섹시한 뱀파이어와 늑대인간 사이에서 갈등하다가 뱀파이어를 선택한다는 이야기다. 갈등과 선택의 와중에 역시나 전쟁이 끼어든다. 전편에서 에드워드(로버트 패틴슨)에게 연인을 잃은 뱀파이어 빅토리아(브라이스 댈러스 하워드)가 마구잡이로 시애틀에서 인간을 사냥해 뱀파이어 군단으로 만든 뒤 복수를 꾀한다. 에드워드와 뱀파이어 컬렌가는 빅토리아로부터 벨라(크리스틴 스튜어트)를 지키기 위해 제이콥(테일러 로트너)이 이끄는 늑대인간들과 협약을 맺는다. 일단 <뉴문>이 실망스러운 속편이었던 건 분명하다. 첫 영화 <트와일라잇>의 여성 감독 캐서린 하드윅은 설탕범벅 컵케이크로부터 토핑된 초콜릿을 하나 빼내듯이 원작의 과한 당도를 낮추는 작업을 성공적으로 완수했다. 덕분에 한 챕터를 읽기도 전에 당뇨로 탈진하게 만드는 원작의 느끼함은 근사하게 순화됐다. 2편 <뉴문>의 감독 크리스 웨이츠(<황금나침반>)는 원작에 발목을 잡힌 채 할리퀸 로맨스와 액션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다가 대충 이야기를 후발주자로 던져넘겼다. 팬들이야 장성한 테일러 로트너의 복근이 등장하는 순간 모든 약점을 마음속에서 지워버렸겠지만, 허약한 장르영화 <뉴문>은 <트와일라잇> 극장판 시리즈가 팬덤 안에서만 존재 가치가 있는 괴상한 팬픽으로 사라질 가능성을 보여준 거나 다름없다.
새롭게 바통을 이어받은 <이클립스>의 감독 데이비드 슬레이드는 여러모로 적절한 선택이다. 엘렌 페이지 주연의 <하드 캔디>와 뱀파이어 호러영화 <써티데이즈 오브 나이트>를 감독한 그는 자신의 지장을 분명하게 시리즈에 이식한다. <써티데이즈 오브 나이트>의 인상적인 설원의 뱀파이어 공격 시퀀스를 지휘했던 솜씨는 <이클립스>의 액션장면들에서도 흔적이 꽤 남아 있다. 특히 이 남성적인 장르영화 감독은 벨라를 사이에 둔 에드워드와 제이콥의 심각한(지나치게 심각한 나머지 종종 느끼한) 적대관계에 자조적인 유머를 삽입할 줄도 안다. 이를테면, 시도 때도 없이 웃통을 벗고 나타나는 제이콥에게 인상을 구기며 “저놈은 티셔츠도 없냐”고 읊조리는 에드워드의 대사 같은 것 말이다.
<트와일라잇>과 <뉴문>이 신분 차이를 극복하는 10대 로맨스라면 <이클립스>는 ‘첫경험’의 아찔한 순간에 대한 좀더 성적인 함의를 보여준다. 벨라는 끊임없이 에드워드와 첫관계를 맺고 싶어한다. 에드워드는 이를 거부한다. 인간인 벨라의 몸에 불가해한 위협을 주지 않겠다는 이유도 있지만, 더 큰 이유는 19세기 출신인 그에게 첫경험은 결혼식 이후에나 연인에게 선물하는 로맨스의 절정이기 때문이다. 벨라는 말한다. “그건 구식도 아니고 고대(Ancient)적 생각이야.” 이게 빅토리아 시대의 금욕주의를 21세기에 끌어들이려는 보수적 발언이라고 화를 낼 법한 관객도 막상 에드워드의 샛노란 눈동자가 스크린에 클로즈업되는 순간에는 내 주위에는 왜 저런 놈 없냐며 낮은 신음을 내게 될지도 모른다. 어안이 벙벙할 정도의 구식 할리퀸이 안겨주는 시대를 초월한 마력이랄까.
시리즈의 최종장이 될 차기작 <브레이킹 던>의 감독은 <신과 몬스터>(1998), <킨제이 보고서>(2004)의 빌 콘돈이다. 랄프 로렌 모델과 돌체 앤 가바나 모델 사이에서 고민하는 몽정기 계집애들의 섹스판타지라고 웃어넘길 사람들이야 언제나 웃어넘기겠지만, 의외로 <트와일라잇> 극장판 시리즈는 어울리지 않을 법한 감독들을 거치며 천천히 진화하고 있다. 케이크에 딸기 대신 키위를 얹은 격이라고? 그래도 딸기와 키위는 엄연히 맛이 다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