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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숙] 날것 그대로의 매력으로 돌아온 그녀

고 이만희 감독 <삼포가는 길>의 백화로 출연했던 배우 문숙

고백하자면, 문숙을 몰랐다. 그녀의 얼굴을 처음으로 마주한 건 <문숙의 자연치유>(이미지박스 펴냄)라는 책의 표지에서였다. 세월이 비껴나간 것이 아니라 세월을 품어내고 간직해온 아름다운 여인의 얼굴이 거기에 있었다. 놀랍게도 그녀는 고 이만희 감독의 마지막 뮤즈이자 연인이었던 배우 문숙이었다. 고교 재학 중 TBC 드라마 <세나의 집>으로 데뷔한 그녀는 세편의 영화 <태양 닮은 소녀>(1974), <삼각의 함정>(1974), <삼포가는 길>(1975)을 이만희 감독과 함께 만들었고, 이만희 감독이 <삼포가는 길>의 촬영 직후 45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자 홀연히 배우의 삶을 정리하고 미국으로 사라졌다.

그리고 30여년의 세월이 흘렀다. 문숙은 자신이 잊었고 자신을 잊어버린 한국에 두권의 책을 내놓았다. 하나는 이만희 감독과의 마지막 1년을 놀랄 정도로 솔직하게 써낸 2007년작 <마지막 한해: 이만희 감독과 함께한 시간들>(창비 펴냄)이고, 다른 하나는 요가와 명상의 삶에 대한 기록인 <문숙의 자연치유>다. 두 책에 따르면 그녀는 미국으로 건너간 뒤 결혼을 했고, 뉴욕과 산타페에서 예술가로 활동했으며, 자연치유식과 요가를 공부하고 전수해왔다. 지금은 하와이 제도의 섬 마우이에서 개와 고양이, 자연과 함께 살고 있는 문숙은 마침 책 홍보를 위해 한국을 방문했다. 배우 문숙을 만나기 위해 남산 한옥마을의 고즈넉한 찻집으로 들어서자 거기에는 <삼포가는 길>의 백화가 있었다. 삶과 사람에 대한 호기심으로 가득한, <삼포가는 길>의 그 어린 처녀 말이다.

-인터뷰를 요청하게 된 계기를 솔직하게 말씀드려야겠습니다. 사실 선생님의 책 <문숙의 자연치유>를 우연히 알게 됐습니다. 표지 사진의 아름다움에 놀랄 정도로 매력을 느끼게 됐고, 이후에야 이것이 이만희 감독님과 함께했던 배우 문숙의 책이라는 걸 깨닫게 됐어요. =왜요. 너무 아름답게… 늙어서요? (웃음) 아유, 나이 먹는 걸 어떡하나요.

-현직 여배우들의 나이든 아름다움과는 전혀 다른 종류의 아름다움이 느껴졌습니다. =이만희 감독님도 그런 말을 했어요. 다른 배우에게서 볼 수 없는 종류의 순수한 아름다움이 있다고요. 하긴 제가 생머리에 화장도 없이 티셔츠 하나 걸치고 오디션을 보러 갔었으니까. 제가 원래 그래요. (웃음)

-그렇게 자신을 꾸미지 않으시는 분이 연기를 시작한 이유가 뭐였나요. =고등학생 때 TBC 탤런트로 뽑혔죠. 저 그때 고등학생이어서 교복 입고 면접 보러 갔었거든요. 원래 학생은 안 뽑는데 뽑아주더라고요. 어린 시절부터 사람들 앞에서 뭔가를 하는 게 좋았어요. 버스 타면 사람들 앞에서 노래도 부르고… 연예인이었죠. (웃음) 그게 너무 자연스러워서 아무런 의심없이, 내 길은 연기자라고 생각했어요.

-이만희 감독님은 오랫동안 잊혀졌다가 최근에야 재평가를 받기 시작한 분입니다. 그래서 이만희 감독님과의 마지막을 다룬 <마지막 한해>라는 책은 정말 반가웠습니다. =너무 개인적인 이야기들이어서 조금 그렇긴 하지만 기록으로 꼭 남기고 싶었어요. 이만희 감독님의 지인들이 기록으로 남겨놓은 게 거의 없더라고요. 그분의 창의성과 예술성과 아름다움을 가까이서 마주한 사람이 없었기 때문일까요. 그래서 증언을 하기로 마음을 먹었어요.

-<삼포가는 길>을 저도 얼마 전에야 봤습니다. 그런데 선생님이 왜 그토록 어린 나이에 영화를 그만뒀을까가 정말 궁금했습니다. =나 이만희 감독 때문에 관뒀어요. 아유 원통해. (웃음)

-이만희 감독님 사후에 마음고생이 심하셨을 테지만, <삼포가는 길>로는 대종상 신인여우상을 받으시는 등 미래가 밝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꼭 미국으로 떠나셔야 했나요. =정신이 없었어요. 영화감독과 배우의 관계를 떠나서 나와 세상에서 가장 가까운 사람이 말 한마디 없이 없어져버렸다는 배신감이 있었어요. 막막한 세상에 버림받은 듯한 느낌이 무섭기도 했고요.

-<마지막 한해>에는 너무나도 개인적이어서 보통 사람들은 도무지 드러내고 싶어 하지 않을 이야기들까지 모두 실려 있습니다. 보통의 용기가 아니셨을 거란 생각이 듭니다. =나이를 먹으니까 괜찮아요. 모든 게 아름다워요. 좋고 싫은 감정을 벗어나서 그저 있는 대로 다 이야기하고 싶었어요. 자식들에게도 꽁꽁 숨겼던 이야기들이었는데, 이걸 털어버릴 수 있기까지 30년의 세월이 걸린 거죠.

-최근 한국에서 이만희 감독님에 대한 재평가가 이루어지고 있다는 사실은 아셨습니까. =알아요. 문관규 교수님이 영어로 이만희 감독님 책을 쓴다고 해서 인터뷰한 적 있어요(<LEE Man-hee 이만희> 문관규 저, 영화진흥위원회 펴냄). 교수님은 저를 만나서 대단한 충격을 받았다고 말씀하시더라고요. 제가 미국에서 미술을 전공했잖아요. 그래서 이만희 감독님의 영화를 예술적으로 평가할 수 있는 눈이 이제는 생긴 거예요. 그래서 문관규 교수님과 이야기를 할 때도 예술적인 평가를 나름대로 이야기할 수 있었어요. 이만희 감독님의 영화에는 처절함의 아름다움, 비참함의 아름다움, 가장 더러운 것의 아름다움이 있어요. 그걸 볼 수 있는 사람은 그 사람밖에 없었어요. 이제는 그게 눈에 보이더라고요. 임권택 감독님 영화는 정연(Formal)하잖아요. 궁중에 걸린 왕의 초상화를 보는 듯 프레이밍까지 완벽하게 아름다워요. 이만희 감독님은 정반대예요. 격식이 없어요(Informal). 반 고흐와 피카소의 마지막 작품들을 보는 것 같아요. 피카소의 마지막 작품은 선으로 이루어진 긁적거림이었어요. 반 고흐의 마지막 작품들은 추상주의가 나오지 않았던 시대인데도 프레임이 없거나 거의 메워지지 않은 추상화에 가까워요. 그렇게 해체된 예술 형태가 이만희 감독님의 영화에 들어 있더라고요. 대가가 아니면 그런 건 못해요.

-<삼포가는 길>의 기차역 이별장면은 가슴을 진동시키는 슬픔이 있습니다. <마지막 한해>를 읽고나서 그 장면을 보자, 마치 이만희 감독님이 문숙 선생님을 떠나보내려 한다는 기분이 들더군요. =그는 알고 있었던 것 같아요. 그 장면을 촬영하고 한달이 채 못 돼 돌아가셨거든요. 정말로 몸이 안 좋았을 텐데 저에게는 한마디 말도 없었어요. 그분 성격이 그래요. 말이 없어요. 고통스럽고 가망이 없다는 것도 알았을 텐데 말이에요. 그 장면을 다시 보면서 제가 정말 힘들었던 이유도 그 때문이에요. 다른 사람에게 말할 수 없는 자기만의 고독한 아름다움을 카메라로 들여다봤다는 걸 다시 생각해보면… 주인공인 노영달(백일섭)이 백화(문숙)을 남겨두고 떠나는 장면을 찍으면서 이만희 감독님의 기분이 어땠을지. 지금으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을 만큼 슬퍼요.

-문숙이라는 이름은 이만희 감독님이 지어주신 예명으로 알고 있습니다. 아직도 그 이름을 쓰시는 이유는 뭔가요. =제가 그분에게 받은 건 이름 하나밖에 없어요. 영화 촬영하면서 사용하는 스톱워치를 주셨는데 그건 잃어버렸어요. 남은 건 이름뿐이니까 계속 간직해야죠.

-이만희 감독님의 후기작들을 보면 주인공 남자 캐릭터가 감독님과 많이 닮아 있을 거란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삼포가는 길>은 두분의 진짜 러브 스토리처럼 보이기도 해요. =너무 그렇죠. (웃음) 감독님은 영화를 찍을 때 시나리오나 원작을 자신의 삶에 대한 것으로 완전히 다 바꿔버리세요. <삼포가는 길>도 그런 경우죠. 로케이션 장소로 이동하는 시간은 다 대본을 바꾸는 시간이에요. 그때그때 상황에 따라 자기가 하고 싶은 말, 제가 평소에 잘 쓰는 말을 집어넣어서 대본을 완전히 수정하셨어요. 사실 그 영화 찍으면서 정말 힘들었어요. 설날이고 보름인데 모두 집없이 한달을 떠돌아다니며 영화를 찍었죠. 모두 허기지고 피곤해서 거지가 된 듯한 상황이었어요. 그런데 감독님은 바로 그런 상황과 느낌을 날것 그대로 찍어요. 배우들도 자기들이 알아서 대사를 만들어서 연기를 하게 했어요. 그게 바로 이만희 감독님의 천재적인 면이라고 생각해요. 연출을 안 해요. 생생한 감정을 사람들에게서 끄집어내서 기록하는 거죠.

-30여년 전 당시로서는, 내가 지금 이런 예술가와 일하고 있구나, 그런 기분은 못 느끼셨겠죠 아마도. =그땐 몰랐어요. 진짜 몰랐어요. 영화감독이란 사람들은 원래 다 그런 줄 알았어요. 그래서 이후에 문제가 좀 많았죠. 다른 영화를 찍는데(문숙은 <삼포로 가는 길> 이후 두편의 영화 <미스영의 행방>(1975)과 <저 높은 곳을 향하여>(1977)를 찍었다.-편집자) 이만희 감독님과 영화를 찍을 때와는 너무 다른 거예요. 소리도 마구 지르고들…. 너무 힘들었어요. 게다가 저는 남자는 여자를 다 이만희 감독님처럼 사랑하는 줄 알았어요. 이만희 감독님과 있을 땐 한번도 팔을 안 베고 자본 적이 없어요. 항상 팔을 내주셨거든요. 그런데 결혼해서 남편을 만났을 때는 아침에 일을 해야 하니 팔을 좀 빼고 자겠다더라고요. 너무 서운했어요. 어떻게 남자가 여자에게 팔을 못 베게 할 수가 있을까. 이 사람은 나를 사랑하지 않나보다. (웃음) 알고보니 이만희 감독님의 사랑은, 죽어가는 예술가의 마지막 사랑이었기 때문에 그토록 절실했던 거예요. 어린 저는 몰랐던 거죠.

-이만희 감독님 사후에 뉴욕으로 건너가셔서 미술을 하셨습니다. 특별한 계기가 있었나요. =어차피 예술 방면에 소질이 있으니까 한번 해보자 싶었어요. 제가 옛날에 그림을 취미로 그리기도 했었고요.

-몇번의 전시회도 열면서 미술가로서 성공적인 삶을 사셨다고 알고 있습니다. 어떤 형식의 미술을 하셨나요. =추상표현주의(Abstract Expressionism, 20세기 말 ‘뉴욕 화파’로부터 시작된 미술적 경향. 동종의 양식이 아니라 예술가 개인의 태도에 의해 하나로 묶이는 경향)예요. 태도 자체의 언어가 담겨 있는 경향이라고 할 수 있어요. 이를테면, 제가 여러가지 형태의 선을 그려요. 모르는 사람이 보면 그냥 선이에요. 그러나 잘 보면 각각의 리듬과 드라마가 있고, 또 시가 있어요. 그렇게 형태로 춤추듯이 그림을 그리는 거죠. 그리고 그런 선을 그저 기록하는 거예요. 지우거나 다시 그리는 건 없어요. 그런데 이런 방식의 그림은 이만희 감독님의 영화와도 비슷하죠.

-어떤 점에서 비슷한가요. =너무나 로(Raw)해요. 그런데 이 ‘로’하다는 말이 아트에서는 굉장히 중요해요. 꾸밈이 없다는 거니까요. 인간의 ‘로’한 감정을 툭툭 끄집어내는 거죠. 제 그림도 마찬가지예요. 예술을 제대로 배우고 나니까 마침내 이만희 감독님의 ‘로’함이 보였어요. 감독님 영화가 대단히 비주얼하잖아요. 어떻게 보면 추상주의 그림을 보는 듯한 느낌이에요. 링컨센터에서 30년 만에 <삼포가는 길>을 봤을 때, 후시녹음한 제 대사와 입이 너무 안 맞아서 귀를 꼭 틀어막고 봤어요. 근데 영화가 더 살아나더라고요. 감독님이 그 시절 영화를 찍을 땐 동시녹음이 없으니 비주얼만 카메라를 통해 보셨을 거잖아요. 그래서 귀를 막고 보면 이만희 감독님이 그 순간 보고 있었던 아름다움이 느껴져요. 무성영화 같은 아름다움이요. 꼭 그렇게 한번 보세요.

-미술을 하시다가 뉴욕을 떠나 플로리다, 산타페 등을 거치며 요가와 명상을 공부하셨습니다. 배우로서 혹은 예술가로서, 밖으로 발산하던 에너지를 안으로 품으려는 의지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병이 난 거지. (웃음) 배우를 그만두고는 병이 났었어요. <문숙의 자연치유>는 자기를 찾는 이야기예요. 당시의 저에게 일을 그만둔다는 것처럼 불행한 일은 없었어요. 비참해요. 배우라는 사람들은 사실 무당이에요. 신기가 있는 사람들은 묶여버리면 차라리 죽는 게 나아요. 발산하던 에너지가 뭉치니까 몸이 막 아프죠. 그 이후부터 명상을 시작했어요. 자신의 창조성을 다시 끄집어내는 일이에요. 껍질을 벗는 거죠. 벗을 때는 피가 나요. 그래도 벗고 다시 나와야 해요. 그게 바로 치유라는 생각이 들어요. 요가는 사실 창조적인 일이에요. 그저 몸을 풀어주는 행위가 아니에요. 홀로 껍질을 벗는 작업이고, 혼자 무당질을 하는 거예요. (웃음)

-한국에서 요가는 체형관리나 다이어트용 스포츠로 각인되어 있습니다만. =그러게요. 미용 요가? 다이어트 요가? 그러고 싶으면 그렇게 해야죠 뭐. 그러다가 자신을 찾으면 되는 거고요.

-이만희 감독님의 회고전 등이 계속해서 열리면 한국을 찾아서 좀더 많은 관객을 만나고 싶은 생각이 있으신가요. =그럼요. 저는 이만희 감독님에 대한 이야기를 좀더 전해주고 싶어요. 감독님과의 마지막을 경험하고, 그림을 하고 또 요가를 하면서, 이만희 감독님의 예술성을 시간을 뛰어넘어 통역할 수 있다는 사실이 고마울 따름이에요.

-다시 배우로 돌아오고 싶다는 생각은 해보신 적이 없으신가요. =영화에 대한 매력은 끝도 없이 간직하고 있어요. 그 시절엔 불란서 문화관에 가면 영화를 보여줬어요. 저는 어릴 때부터 거기 가서 장 콕토 영화 등을 보곤 했죠. 그런 영화는 그곳 아니면 못 보던 시절이거든요. 근데 당시 이장호 감독님과 김호선 감독님이 저를 거기서 보고는 사람들에게 말했대요. 불란서 문화관에서 본 여배우는 문숙밖에 없었다고. (웃음) 삼류영화관 동시상영관도 정말 많이 찾아다녔죠. 전 영화가 좋아요. 할리우드의 ‘무비’가 아니라, ‘시네마’가 좋아요.

-혹시 90년대 이후 한국의 새로운 젊은 영화들을 보신 적이 있으신가요. =못 봤어요. 말만 들어왔죠.

-그런 젊은 감독들이 영화에 출연해달라고 요청을 한다면 혹시 수락하실 의향이 있으신가요. =수락할 거예요. 엑스트라만 시켜줘도 좋아요. (웃음) 영화 만드는 사람들은 사실 떠돌이들이잖아요. 나는 그렇게 영화 만들면서 같이 떠돌아다닐 때 생겨나는 정이나 의리가 좋아요. 떠돌이 광대패 같은 게, 어쩜 그렇게 좋은지. (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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