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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우연의 음악’으로의 초대
김혜리 사진 최성열 2010-06-24

홍상수 감독의 아주 특별한 연기 연출의 비밀… 고현정, 유준상, 이선균이 말한다

영화의 여러 요소 가운데에서도 연기는 구중심처의 비밀에 해당한다. 영화의 어떤 메커니즘보다도 문장으로 붙들기 힘든 까닭에 영화비평에서도 연기비평은 주로 스타덤 연구에 집중되는 경향이 있으며, 거장 감독들은 결코 남에게 배울 수 없는 대목이 연기연출이라고 증언하곤 한다. 배우들은 영화를 찍는 동안 감독에게 이끌려 매우 고유한 체험의 숲에 들어갔다 나오고 우리는 그들이 숲에서 빠져나온 뒤에 이야기를 청해 들을 수 있을 따름이다. 지난 6월4일 저녁, 홍상수 감독 전작전(6월1~6일)이 진행 중인 시네마테크 부산에서 ‘홍상수 영화에서 특별히 흥미로운 배우들의 존재와 연기방식’이라는 주제의 좌담이 열렸다. 이 자리에는 두편 이상의 홍상수 감독 작품에 출연한 배우 고현정(<해변의 여인> <잘 알지도 못하면서>), 유준상(<잘 알지도 못하면서> <하하하>), 이선균(<밤과낮> <첩첩산중> <옥희의 영화>(미개봉))이 참석해 직접적인 경험을 회고했다. 좌담 말미에는 내내 홍상수 감독이 합석해 연기에 대한 생각의 일부를 밝혔다. 시네마테크 부산의 좌담에서 오간 고백과 연후에 추가로 청해 들은 홍상수 감독의 말을 단서로 홍상수 영화가 배우에게 다가가는 과정을 재구성해본다. 영화 연기연출의 특별한 사례 하나.

#0. 시작은 공백으로부터

홍상수 감독을 만난 어느 날 저녁이었다. 무슨 일을 하다 외출했는지 묻자 그는 같이 영화를 찍었던 배우들의 사진을 오려 책상에 붙이고 들여다보다가 왔다고 했다. <옥희의 영화>를 막 마치고 영화를 쉬는 기간에 불현듯 배우들의 얼굴이 보고 싶어진 것이다. 홍상수 영화가 완성되는 과정에서 배우가 차지하는 몫은 특수하다. 통상 영화에서 배우는 내러티브를 실어나르는 역할을 수행한다. 한데 이야기 대신 구조를 선택하는 홍상수 영화에서 배우의 됨됨이와 연기는 감독, 공연 배우, 카메라와 차례로 반응을 일으키며 그 구조에 담길 내용을 제공하는 원천이 된다. 배우가 없다면 인물의 형상화가 불가능하지만 그렇다고 배우의 인품과 성격을 본떠 인물을 만드는 것은 아니다. 배우로부터 받은 자극을 받아들여 자기 안에서 인물의 말과 행동이 떠오르면 홍상수는 그것을 해당 배우에게 대입해 통과하는지를 본다. 그래서 버리고 취할 것을 정한다. 그리하여 홍상수 영화에서 배우는 캐릭터 배우(자기를 지우고 배역을 구현하는 배우)와 퍼스낼리티 배우(타고난 강한 개성을 여러 영화에서 공히 발휘하는 배우)의 중간에 위치하게 된다.

“책상 앞에서 스스로와 대화하며 영화의 창의적인 부분을 완결시킨 다음 그것을 실행하는 데에 있어서 배우의 실력과 재능과 인상을 이용하는 감독도 계시지만, 나는 생각의 반 이상을 남겨둔 상태에서 배우를 정하는 쪽인 것 같다.”(홍상수)

#1. 캐스팅, 단순하고 직접적인 상호탐색

홍상수 감독은 캐릭터의 뚜렷한 청사진을 손에 쥐고 거기 맞는 배우를 찾아다니지 않는다. 그의 표현에 따르면 인물에 관해 품은 대강의 실루엣은 거꾸로 배우들을 만날 수 있게 해주는 핑계에 가깝다. 여기부터 ‘우연의 음악’이 개입한다. 주변 지인들에게 요사이 좋아하는 배우가 누군지 묻기도 하고 마침 방영된 드라마 속 배우를 눈여겨보기도 하고, 그냥 문득 이름이 떠오르기도 한다. 연락을 취해 배우들을 만나 그 자리에서 편하게 느껴지고 인물로 발전할 수 있는 만족스러운 ‘결’ 한 가닥이 보이면 출연을 부탁한다. “몇월 며칠부터 며칠까지 시간이 되십니까?”라고. 조건에 순응하며 단순하게 임한다. 혹시나 일정과 뜻이 맞으면 운이 닿은 것이고, 혹시 배우의 다른 스케줄과 겹치면 포기한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의 공형진은, 홍상수 감독이 <잘 알지도 못하면서>의 헌팅을 가는 길에 김포공항 커피숍에서 처음 마주친 배우다. 공형진은 제주도에 여행을 가는 길이었다고 한다. 비행기를 타고 가는 동안 그에게서 뭔가가 나올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 홍 감독은 제주공항에 내리자마자 그에게 연락을 해 캐스팅이 성사됐다.

“특정 배우를 염두에 두고 시나리오를 쓰지 않는다. 그랬다가 그 배우가 안 한다고 하면 어찌할 것인가. 스케줄이라도 어긋나면 영화가 배우를 기다려야 한다. 그러지 말고 다른 사람과 즐겁게 작업하면 된다. 다른 배우가 들어와 구조가 뒤틀려도 상관없고, 새로운 인물이 나오면 그 또한 좋은 일이다. 중요한 건 주어진 시간, 한달이면 한달 동안 내 안에서 최선의 발견 과정이 일어나는 것이다.”(홍상수)

“출연 제의를 한 뒤에도 좀처럼 제작이 추진되지 않는 영화가 많았다. 홍상수 감독님은 내게 함께하자고 제안한 뒤 작업에 들어가는 길에 불필요한 과정이 없었다. 그저 내가 감독님 영화를 다 봤다고 말씀드리고 감독님도 내 연기를 보았다고 말씀하시고, 함께하고 싶다는 쌍방의 뜻을 확인하는 것으로 충분했다.”(고현정)

“개런티가 없다보니 매니저들은 좋아하지 않는다. (웃음) 반면 굉장히 빨리 찍으셔서 다른 작품에 출연하는 데에 큰 지장은 없다.”(이선균)

#2. 노 개런티, ‘망가지는’ 연기… 다 알면서도

<잘 알지도 못하면서> 이후 홍상수 영화의 배우들은 노 개런티를 감수했다. 이미 재능을 입증하고 인기를 쌓아올린 배우에게 호락호락한 결정은 아니다. 또, 모든 배우가 홍상수 영화에 출연하는 것을 흔쾌히 여길 수는 없다. 초기에는 섹스신과 결코 아름답지 않은 노출이 부담스럽게 여겨졌으며, 캐릭터에 몰입하기 전에 이른바 ‘망가지는’ 연기를 해야 할 거라는, 배우로서 자아를 보호하지 못한 채 휘둘릴 거라는 두려움도 존재했다. 이 경계심은 홍상수 영화에서, 배우의 일면을 절묘하게 닮은 캐릭터가 조롱거리가 되고 있다는 인식에서 나온다. 예측할 수 없는 변수가 잔뜩 도사리고 있는 모험적 조건에도 불구하고 어떤 부류의 배우들은 홍상수 감독이 만들어가는 세계에 자신을 넣어보고 무슨 일이 일어날지 보고 싶어 한다. 다른 작업환경과 연기 패러다임에 대한 갈증이 작동하는 것이다.

“<하하하>를 하기로 했을 무렵 뮤지컬을 하고 있었는데, 오랫동안 함께 일한 매니지먼트사 대표님이 ‘그렇게 좋아하는 감독과 마음대로 찍으려면 혼자 차 몰고 가서 일해’라고 반대해서 며칠 동안 전화도 받지 않고 잠적한 적이 있다. (웃음) 결국 대표님이 미안하다고 물러섰다.”(유준상)

“대학에서 연기 수업을 받으며 90년대 한국영화의 연기 패턴을 공부한 적이 있다. 90년대 초반 동시녹음이 도입되면서 최민식, 한석규 선배님의 사실적 연기가 부상했다. 공부 과정에서 <강원도의 힘>을 봤는데 충격적이었다. 배우처럼 보이지 않는 배우들이 출연했고 일상적인 상황 아래 깊은 감정이 오가는 것이 분명한데 표현은 구태여 그것을 드러내지 않았다. 이에 비하면 사실적인 연기로 여겨지는 기존 연기도 ‘연기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배우로서 큰 질문을 얻었다.”(이선균)

“<잘 알지도 못하면서>를 엿새 동안 찍고 나서 태어나 처음으로 온몸의 세포들이 다 열려 있는 느낌을 받았다. 마지막 촬영이 끝나고 술도 많이 마셨는데 새벽 공기를 마시며 이만큼 내 몸이 온전히 깨어난 적이 있었던가 싶었다.”(유준상)

“이미 홀리고 싶은 상태로, 한번 홀려봐야지 하는 자세로 홍상수 감독님을 만나게 되는 것 같다.”(고현정)

#3. 준비, 아침의 대본

특별한 기술을 익히거나, 외모를 극적으로 변화시키는 준비 과정은 없다. 접신하듯 인물을 마음속에 들이고, 캐릭터와 공명하는 감정적 기억과 무의식을 이끌어내는 메소드 연기 방식의 예열과정도 없다. 촬영날 아침까지 대본이 존재하지 않는 판국에 말하나 마나다. 홍상수식 연기의 핵심은 거의 즉물적인 육체성 그리고 대사와 행동이 직조해나가는 양식이다. 악기와 음색은 정해져 있지만 악보는 최후의 순간에 나오고 곧장 연주가 이뤄지는 셈이다. 훈련받은 연기자가 필요한 이유다. 홍상수 감독의 연출방법론은 결국은 단순성으로 요약되고 이는 배우로 하여금 통상의 여러 단계를 생략하거나 초월하도록 밀어붙인다. 한편 홍상수 감독의 대다수 작품은 여행의 영화다. 보통의 영화와 드라마의 인물은 일정한 구도 안에서 만난다. A가 B를 사랑하고 A와 C에게 원한이 있고 B는 D에게 도전한다는 설정이 있다. 그러나 여행지에서 마주쳤다 헤어지는 홍상수 인물들에게는 대부분 역사가 없다. 과거, 직업, 생활의 맥락이 없다. 배우는 여행지에서 만난 사람에게 리액션하는 여행자가 된다. 멀뚱히 지켜보다 이따금 몸을 기울이는 카메라의 거리는 관객과 영화 사이의, 극중 인물과 인물 사이의 거리와 유사한 간격을 만들어낸다.

“연기의 스타일을 주문하지 않는다. 다만 내가 원하는 배우들의 상태가 있다.”(홍상수)

“내 경우에는 대본을 촬영 당일에 받음으로써 쓸데없는 ‘짓거리’들을 안 하게 되어 좋다. 연예인이면 연예인, 배우면 배우로서 체화돼 있던 늘 하던 몸짓을 할 겨를이 아예 없는 것이다. (…) 과거의 내력없는 인물들이 여행지에서 만나는 상황을 연기하는 일 자체가 어떤 면에서 굉장히 세련되게 느껴지고 내게 주어진 자유 같다. 내 마음대로 만들어낼 수 있으니까. 홍 감독님 영화의 톤은 촌스러운데(웃음), 촬영하는 현장 안에 있는 동안 무엇인가의 첨단에 있다는 느낌을 준다.”(고현정)

“의상을 준비하는 과정부터 허세에서 빠져나올 수밖에 없다. 평소 입는 옷 몇벌 가져가 감독님께 보여드리는데, 꼭 숙소에서 혼자 있을 때 입으려고 가져간 옷, 대체 왜 가져갔을까 싶은 몸의 단점을 드러내는 옷을 고르신다. 그런데도 ‘너무 예뻐요’ 하는 한마디에 설득당해버린다.”(고현정)

“<밤과낮>에서 북한 말로 연기해야 하는데 준비라곤 북한 분을 한두번 만난 게 다였다. 연습을 하려 해도 대사는 촬영일 아침 10시까지 나오지 않았다. 그러다보니 놀랄 만한 집중력이 발휘됐다. A4용지 한장짜리 긴 대사도 십분 안에 신기하게 외워졌다. 그런데 찍고 나면 뇌를 미리 당겨써서 그런지 머리가 좀 나빠지는 것 같다. (웃음) 이제는 준비할 것도 기댈 것도 없는 홍 감독님의 방식을 아니까 촬영 전날 술을 마시고 현장으로 내려간다.”(이선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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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 이다혜 디자인 김차인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