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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선가 그녀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틀림없이 나타난다 톰반장?!
강병진 2010-06-22

<나잇 & 데이>, 고전 로맨틱코미디가 스파이물을 만났을 때

제이슨 본에게는 마리라는 이름의 연인이 있었다. 그녀는 제이슨 본의 냉혹한 본능을 무화시키는 존재다. 또한 본 시리즈를 걸쳐 가장 비극적인 죽음을 맞이한 그녀는 모든 걸 잊고 살려던 본의 본능을 깨워버린 여인이기도 하다. 그런데 마리의 입장에서 다시 보자. 그녀에게 제이슨 본은 1만달러의 돈에 혹해 차에 태운 낯선 사람에 불과하다. 하필 그가 기억을 잃어버린 CIA의 최정예 요원일 게 뭐람. 게다가 하필 쫓기고 있는 건 또 뭐람. 왜 내가 이상한 남자를 만나 총알을 피하고 머리를 자르고 염색하는 수모를 겪어야 하는 건가? 자상한 매력이 없었거나 몸을 던져 자신을 지키는 모습이 섹시하지 않았거나 감싸주고픈 외로움이 보이지 않았다면 마리는 분명 제이슨 본에게서 탈출하려 했을 것이다. 영화 <나잇 & 데이>는 <본 아이덴티티>가 드러내지 않았던 마리의 이야기를 유머러스하게 상상한 결과물에 가깝다. 단, 이 영화 속의 마리는 오래된 자동차를 재조립할 줄 알고, 마음에 드는 남자에게 처음부터 키스로 들이미는 터프한 미국 남부의 여성이다.

<본 아이덴티티>를 로맨틱코미디로 만든다면?

<나잇 & 데이>에서도 남자는 당연히 ‘하필’ 최정예급 비밀요원이다. 동생의 결혼식 때문에 위치타 공항에서 보스턴행 비행기표를 끊은 준(카메론 디아즈)은 그와 두번 부딪힌다. 남자의 이름은 로이 밀러(톰 크루즈)다. 비행기 안에서 그들은 서로의 꿈을 이야기한다. 이를 테면 “여행지의 고급 호텔에서 낯선 사람과 키스하기” 같은 꿈. 로이의 친절함과 로맨틱함, 그리고 뛰어난 순발력(!)에 반한 준은 화장실에 들어가 로맨틱한 상상에 빠지고 동시에 로이는 같은 비행기에 타고 있던 사람들을 죽여버린다. 그는 첨단 에너지원을 개발한 어린 과학자 사이먼(폴 다노)을 보호하고 있던 도중, 무기밀매상에게 기술을 팔아넘기려 했다는 누명을 쓰고 쫓기는 중이다. 하나 남자를 얻겠다고 다짜고짜 키스로 들이미는 준의 입장에서 이 남자의 처지가, 그리고 이 남자가 벌인 일들이 납득이 갈 리 없다. ‘도대체 이 남자는 뭐야?’ 라고 생각하는 순간 로이가 먹인 약에 쓰러진 준은 다음날 아침 자신의 집에서 자신의 잠옷을 입은 채 깨어난다. ‘혹시 꿈이었던 걸까?’ 하는 순간 로이를 쫓던 FBI요원들은 준을 납치하려 하고, 로이는 그녀가 위기에 처할 때마다 나타난다. 준은 로이의 손에 이끌려 온갖 수난을 겪으면서도 생각을 멈추지 않는다. 모두가 미치광이에 배신자라고 하는 이 남자의 진심은 무엇일까.

앞서 설명했듯이 지금의 관객에게 <나잇 & 데이>는 <본 아이덴티티>의 로맨틱코미디 버전에 가까워 보일 것이다. 실제로 <나잇 & 데이>는 <본 아이덴티티>의 몇몇 장면을 떠올리게 한다. 준이 비행기 화장실에서 자문자답을 하고 있는 동안 로이가 자신을 쫓는 요원들을 제압하는 장면이 대표적인 예다. <본 아이덴티티>에서 본의 아파트를 찾은 마리가 욕실에 뜨거운 물이 나오지 않는다고 투정하는 동안, 위험을 감지한 본은 식칼을 들고 방 구석구석을 살핀다. 쫓기는 비밀요원을 대하는 여성의 진짜 솔직한 감정이 긴장을 유머로 치환시킨 셈이다. 하지만 <본 아이덴티티>와 달리 이들을 위협하는 세력의 위험도를 낮추고, 두 남녀의 시끌벅적한 여정을 더 주목하는 <나잇 & 데이>는 영화를 제작한 이십세기 폭스의 필모그래피와 좀더 많은 정서를 나누고 있다. 제임스 카메론의 <트루 라이즈>가 이들의 현재를 좀더 과장한 작품이라면, <미스터 & 미세스 스미스>는 이들의 미래를 가늠할 수 있는 작품일 것이다. 빗발치는 총알세례를 서로 부둥켜안고 피해다니는 이들에게 키스의 찰나는 당연한 귀결이다. 연출을 맡은 제임스 맨골드 감독은 <나잇 & 데이>를 “주변 일상에만 관심을 쏟던, 그리고 내성적이던 사람이 폭력이 난무하고 흥분으로 가득 찬 물리적 세계를 여행하는 이야기”라고 말했다. 로이를 향해 “당신은 누구죠?”라는 질문만 반복하던 준은 결국 “지금 당장 섹스하고 싶다”는 본심을 드러낸다. 그녀의 말은 뜻하지 않게 털어낸 진심이지만, 그만큼 이들은 몸이 먼저 반응하는 여행을 하고 있는 것이다. 서로를 향해 총격을 퍼붓던 스미스 부부가 갑자기 격렬한 키스를 할 수밖에 없었던 것처럼.

스파이의 문제? 남녀간의 문제!

그렇다면 <나잇 & 데이>가 이미 우리가 보았던 수많은 할리우드 액션영화와 다를 게 뭔가, 라고 물을 수 있을 것이다. 지난 몇년간, 제이슨 본을 변주하고 있는 할리우드가 제이슨 본 이상의 기준점을 찾을 수 있을까 의구심이 드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우리는 아버지가 된 제이슨 본을 보았다(<테이큰>). 괴물이 된 제이슨 본도 보았다(<인크레더블 헐크>). 그외 쫓고 쫓기면서 골목과 지붕을 누비는 많은 요원들을 보았다. 곧 있으면 여성 버전의 제이슨 본도 나올 것이다(<솔트>). <나잇 & 데이>는 그렇게 수없이 소비된 제이슨 본이 아닌 그를 바라보는 여성의 시선에서 로맨스와 유머를 길어올린다. 하지만 <나잇 & 데이>는 굳이 제이슨 본을 언급할 필요가 없는 영화다. 남성스타와 여성스타, 그리고 액션과 코미디, 이들을 조합하는 건 남성관객과 여성관객을 고루 만족시키려는 할리우드의 기본적 전략이니 말이다. 그리고 <나잇 & 데이>의 진가는 오히려 <트루 라이즈>나 <미스터 & 미세스 스미스> <본 아이덴티티>와 비교하지 않을 때 드러난다.

톰 크루즈는 <나잇 & 데이>가 “스릴과 흥분이 넘치지만 본질적으로 하나의 러브스토리”라고 말한다. <캅랜드> <3:10 투 유마> <앙코르> <아이덴티티> <케이트 & 레오폴드> 등 서부극과 드라마, 로맨틱코미디와 미스터리를 넘나든 제임스 맨골드의 작품 가운데 <나잇 & 데이>와 그나마 같은 결을 가진 영화는 <케이트 & 레오폴드>다. 케이트와 준은 똑같이 묻는다. 도대체 이 남자는 누굴까? 그리고 로이와 레오폴드는 상대 여성에게 언제나 헌신적인 남자다. 여자의 지갑을 훔쳐 달아나는 도둑을 잡아오고, 꽃말을 외워 편지를 쓰는 레오폴드 못지않게, 로이 역시 가공할 신체능력과 여자에게 오믈렛으로 아침을 만들어주고 쪽지를 남길 줄 아는 센스를 지닌 남자다. 이를테면 레이디 퍼스트의 정신을 고수하고 있는 고전적인 남자랄까. 극중에서 로이의 숨겨진 성이 ‘기사’(knight)라는 설정은 이에 대한 명백한 설명일 것이다. 게다가 로이는 여자를 재운 뒤, 알프스를 달리는 기차 침대칸이든 아름다운 무인도든 잘츠부르크의 호텔 스위트룸이든 어느 곳이나 데려갈 뿐만 아니라 날씨와 분위기에 맞는 옷까지 갈아입힌다.

언제 어디서든 나타나 구해주는 남자, 어디든 데려가주는 남자, 매사 여성을 배려하고 자상하게 말하는 남자(<나잇 & 데이>가 개봉할 즈음에는 분명 <트와일라잇>의 에드워드와 로이를 비교하는 여성관객의 수다가 늘어날 것이다). 로이와 준의 만남은 오히려 지금의 블록버스터 트렌드보다 할리우드의 고전 로맨틱코미디쪽에 가깝다. 사사건건 시비와 다툼이 끊이지 않는 남녀 사이에 어느덧 애정이 싹트면서 긴장감은 배가 되고, 동상이몽을 꾸던 그들은 결국 같은 꿈을 꾸게 된다는 점에서 프랭크 카프라의 <어느 날 밤에 생긴 일>(1942)은 직접적인 예다.

톰 크루즈와 카메론 디아즈의 화양연화

화려한 액션과 로맨틱한 판타지를 조합시킬 때, 로이와 준을 연기한 톰 크루즈와 카메론 디아즈는 <나잇 & 데이>의 근본적인 뿌리나 다름없는 배우다. 극중의 로이는 <미션 임파서블>의 이단 헌트와 <제리 맥과이어>를 조합한 캐릭터이고, 준은 <미녀 삼총사>의 나탈리에게서 싸움 실력과 해킹 기술을 제거시킨 <인질>의 셀린느다. 로이를 처음 만난 준은 화장실에서 자신을 향해 말한다. “한번 들이대보는 거야! 로데오도 여러 번 했었잖아?”(<미녀 삼총사2>에서 로데오 게임을 하던 나탈리를 패러디한 대사) 자신의 가장 매력적이었던 시절을 연기하고 있는 톰 크루즈와 카메론 디아즈의 콤비플레이는 반갑고, 경이롭다. 극중에서 로이가 자신을 떠나려는 준에게 반복하는 "나랑 있으면 이만큼 살고, 나랑 떨어지면 요만큼 살아요”라는 대사는 영화에서 두 배우의 존재적 지위를 설명하는 말이기도 하다.

로맨스에서나 액션에서나 톰 크루즈와 카메론 디아즈가 함께 있을 때와 없을 때, 즐거움의 낙차는 상당히 크다. 두 사람 이전에 거론된 배우들의 이름들을 열거해보면 느낌은 더 명확해진다. 카메론 디아즈 이전에는 에바 멘데스였고, 톰 크루즈 이전에는 크리스 터커, 애덤 샌들러, 제라드 버틀러였다. 제작진은 품격있는 매너를 가진 진짜 멋있는 남자와 그런 남자에게 반해 몰래 브래지어를 정리하고 얼굴에 미스트를 뿌려댈 여자가 필요했을 것이다. 스파이 액션물이라는 장르적 특징에 매혹된 관객이라면 이 영화 속 음모가 <미션 임파서블4>의 토끼발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눈치채겠지만. <나잇 & 데이>는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배우들의 진가를 드러내는 것만으로도 여름영화의 재미를 갖추고 있다. 물론 지난 10년간 할리우드가 만든 인기상품의 주역이었던 이들의 과거가 <나잇 & 데이>의 상업적 본질이라는 것도 부정할 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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