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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영객잔] 홍상수의 이야기 교육 [1]

<하하하>를 통해 중요한 것과 덜 중요한 것의 위계를 부수는 그의 연출법을 생각하다

생활의 편린들에 대한 이렇다 할 과장이나 미화를 찾아볼 수 없는 홍상수의 영화들은 늘 익숙한 형식으로 회귀한다. 지난 10여년간 견결히 자신의 성채를 쌓아온 홍상수의 열 번째 영화 <하하하>는 초기작들이 지니고 있던 창조적 형식으로의 회귀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또 하나의 이정표가 될 만하다. 이 영화의 놀라움은 차츰 희미해지고 있다고 여겨졌던 양식화된 내러티브 구조에 대한 강박이 다시 나타났다는 점에 있다. 나는 아직까지도 홍상수의 최고작은 <오! 수정>이라고 생각하며, 초기작들에서 일관되게 관철되고 있는, 그 자신이 고안한 구조에 의거한 서사의 엄정한 구축이야말로 홍상수의 참된 성취라고 믿는다.

<하하하>는 오직 ‘형식’에 의해 작동하는 영화다. 비슷한 경로를 따라 진행되는 두개의 이야깃덩어리, 두 남자(또는 한 남자)가 경험한 두 버전의 여행, 더 나은 삶을 살겠다고 다짐하는 우유부단한 인물들, 허망한 실패로 끝나는 욕망, 삼각관계로 이어지는 애정 공세, 대문 앞에서 돌아서는 남자들, 모호한 꿈장면, 힘이 센 장군, 구원과 각성에 대한 절박한 추구, 그리고 한결같은 음주가 원환을 그리며 하나의 형식을 이룬다. 서로 다른 관점으로 이야기가 시작되지만 마주 보는 에피소드들은 점차 반복의 양상을 띠고 크고 작은 변주를 주면서 이야기는 나란히 또는 꼬이며 진행된다. 다 보고 나서 문경(김상경)과 중식(유준상)이 같은 시간대에 통영에 머물렀으며, 그들이 스친 사람들 역시 같다는 걸 알게 되지만, 두 남자는 서로의 눈에 한번도 채이지 않는다. 이것은 같은 시간에 같은 공간을 여행하는 남녀의 마주침이 없는 여정을 그린 <강원도의 힘>에서 보았던 구조이다.

비선형적으로 제시된 연대기 구조

<하하하>의 복잡한 내러티브 디자인에선 예정된 종착지를 향해 달려가는 이야기의 선형 도식이 의당 진리로 받아들여지는 풍조에 정면으로 맞서보려는 결기가 감지된다. 영화를 보는 관객은 중요한 사건과 그렇지 않은 사건을 식별하고 인과의 논리, 시간과 공간에 그들을 연결함으로써 이야기를 구성하도록 훈련받았다. 연속성과 통일성에 기초한 이같은 내러티브 교육은 오로지 하나의 연결고리만 갖는 단순도식을 신앙적 열의로 추종하는 편향을 낳았다. <하하하>는 이같은 선형적 스토리텔링을 대체할 다중시점, 두 갈래 내러티브, 그리고 이 두 가지를 혼합한 <오! 수정>의 구조를 다시 한번 채용한다.

흔히 평행 배열을 따르는 대위법적 내러티브라고 정의된 홍상수의 서사는 상당히 현혹되기 쉬운 구조를 내장하고 있다. <하하하>에서 홍상수는 마주보는 막걸리 잔의 형상처럼 교묘하게 두 주인공의 여정을 겹쳐놓았지만 문경과 중식의 나뉜 액션은 연대기적 시간 순서에 따라 재구성될 수 있을 정도로 합을 맞춘다. 홍상수는 언제나 단일하고 선형적인 방식으로 내러티브를 제시하는 플롯을 회피하기 위한 목적으로 비선형적인 배열을 통해 사건을 구성한다. <강원도의 힘>과 <오! 수정>은 이에 대한 실험이었으며, <하하하>는 이 두 영화의 방식을 통합해, 지금껏 나타나지 않았던 시간의 연대기를 제시하는 홍상수만의 방법론을 제시한 영화다.

<하하하>의 전조로 <강원도의 힘>을 언급했지만, 두 인물이 경험한 근사치의 액션 라인을 시간의 간격에 의해 교직시킨다는 점에서는 <오! 수정>의 후예라고 할 수 있다. 시간의 비밀이 쉽게 풀리지 않지만 완전히 묘연하지만은 않은 홍상수 서사의 특징은 여기서 뚜렷해진다. 문경과 중식의 단락에 등장하는 인물과 장소가 겹치면서 구조의 힘이 작동하기 시작하는데, 두 남자의 액션 라인을 나란히 세워 관찰하는 순간 전체 그림이 모습을 드러낸다. 이야기는 둘로 나뉘어 진행되고, 각각은 내레이션으로 소개되며, 그들 사이에 흑백 스틸 사진이 끼어듦으로써 선행하는 단락과의 분리를 강조한다. 이야기는 통영에 막 도착한 문경으로 시작해서, 여수행 고속버스에 오른 중식 커플로 끝이 난다. 시간의 연대기를 미궁에 빠트리는 비선형적 제시 방법과 달리 문경과 중식의 단락에서 제시되는 사건들은 교묘한 태피스트리 구조로 연결된다. 하나의 시간을 둘로 쪼갠 뒤 앞과 뒤에서 각 인물이 마주치지 않도록 구성한 이 영화의 내러티브에는 거의 ‘하나의 시간’만 흐른다. 관객이 각자의 사건을 상당히 분리된 사건(아주 멀리 떨어진 것)으로 경험함에도 불구하고 여러 증거는 두 사람의 여정이 디제시스적으로 동일한 시간 동안 연이어 일어난 연대기로 연결될 수 있음을 신호하기 때문이다.

<하하하>의 비선형적 연대기 구조를 규명하는 것은 내러티브의 성립과 그 동력에 대한 홍상수의 급진적 사고를 이해하는 데 긴요하다. 홍상수의 영화에서 늘 멀리 떨어져 있다고 생각한 사람들은 실제로 아주 가까운 거리에 있으며, 가까이 있다고 느꼈던 인물과 사건은 아주 먼 간극을 두고 떨어져 있다. 그러므로 홍상수의 이야기는 비선형적일망정 완전한 비연대기는 아니다. <하하하>에서도 몇개의 예외(중첩된 시간)가 발견되지만, 서로 엇갈리는 액션 라인들이 단일하고 일관된 연대기를 형성한다. 문경과 중식은 눈길에 난 발자국을 거슬러 밟아가는 <여자는 남자의 미래다>의 두 남자처럼(청계산의 비탈길을 오르는 두 남자의 흑백 사진으로 열리는 <하하하>의 첫 이미지는 <여자는 남자의 미래다>의 첫 장면을 연상시킨다) 하나의 길을 왕복하고 있을 뿐이다.

통영에서의 11일에 대한 연대기적 재구성

연대기적 순서에 대한 이같은 추론에 따르면, 통영에서 두 남자의 행장기는 도합 11일의 시간으로 묘사된다. 문경의 에피소드는 10일간으로 그려지며, 중식의 에피소드는 11일 동안이다. 두 남자는 같은 날 통영에 도착했지만, 중식이 연주와 함께 여수로 떠나는 11일째에 대응하는 문경의 에피소드는 존재하지 않는다. 역으로 세병관에서 문경이 성옥에게 염주를 선물하는 2일째에 해당하는 중식의 에피소드 역시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니까 총 11일의 시간 동안 두 남자는 각각 10일에 해당하는 에피소드를 가지는 셈(문경에게는 11일이 부재하고, 중식에겐 2일이 부재하다)이다. 거칠게나마 실제 사건이 벌어진 시간 순서에 따라 11일의 여정을 연대기로 구성해보면 다음과 같다.

1일, 통영에 도착한 문경은 엄마(윤여정)가 운영하는 호동식당에서 복국을 먹다가, 장 관장(기주봉)을 알게 된다/이어서 중식과 정호(김강우)가 호동식당에서 복국을 먹고, 중식은 조선소에서 일하는 정화(김규리)를 알게 된다/그날 문경은 장 관장의 안내로 통영역사관을 경유해 세병관에 들렀다가 관광해설가로 일하는 성옥(문소리)을 만난다/중식과 정호, 정화는 호동식당을 나와 배를 타는데, 이 자리에서 정화는 술을 마시고 싶다고 말한다/늦은 오후 문경은 호동식당에서 지역 인사들과 술자리를 갖고 정화를 만난다. 몰래 그곳을 빠져나온 문경과 정화는 나폴리 모텔 주차장 앞에서 엄마의 전화를 받고 헤어진다/연주가 통영에 도착하고 나폴리 모텔에서 그녀는 중식에게 선물을 한다.

2일, 다음날 세병관을 찾은 문경은 이순신의 위대함에 대한 성옥의 열띤 해설을 듣고, 그녀에게 염주를 선물한다.

3일(이날부터 시간적으로 중식의 액션이 앞서게 된다), 아침, 비가 오고 나폴리 모텔에서 중식은 연주와 시낭송회 이야기를 한다/세병관에서 성옥을 기다리던 문경은 집까지 그녀를 따라간다. 이름을 기억하는 것에 대한 대화를 주고받은 뒤 성옥은 들어가고, 문경은 문 앞에서 (엄마에게 준) 주황색 모자를 쓰고 있는 정호와 마주친다/중식과 연주, 정호와 성옥이 낭송회에 동반 참석하고 중식은 즉흥 피아노 연주를 한다/문경이 호동식당에서 복국을 먹고, 엄마에게 주황색 모자의 행방을 추궁한 뒤 집 소파에서 잠에 빠져 장군의 꿈을 꾼다.

4일, 나폴리 모텔 앞에서 정호가 중식에게 전날 쓴 시를 건네고, 성옥의 집 앞에서 중식이 정호의 시를 품평한다. 중식은 아침을 먹고, 성옥이 정호에게 화분을 선물로 줬다가 말싸움을 한다/세병관 앞에서 문경이 성옥을 만나 자작 시를 건네고, 낮술을 마시다 성옥이 문경의 시를 품평한다. 문경과 성옥은 나폴리 모텔 주차장 앞에서 헤어진다.

5일, 엄마의 생일, 호동식당에서 중식은 엄마, 정호, 성옥과 술을 마시며 담소한다/문경은 나폴리 모텔로 성옥을 호출하지만, 성옥은 화를 내고 나가다 수박을 들고 오는 연주와 마주친다. 호동식당에서 엄마의 야한 옷차림을 타박하다 문경이 종아리를 맞는다.

6일, 나폴리 모텔에서 중식과 연주가 수박을 잘라 먹는다/나폴리 모텔 주차장에서 정호와 정화가 모텔로 들어가고, 이를 목격한 문경이 성옥을 호출한다. 성옥은 모텔에서 나오는 정호를 억지로 업다가 다리를 다친다/저녁, 몹시 바람이 불고 성옥의 집 앞까지 정호를 따라갔던 중식은 문 앞에서 혼자 남는다.

7일, 아침, 중식은 연주를 찾기 위해 마트, 시장을 쏘다닌다/엄마가 집을 나서며 문경에게 영생아파트 열쇠를 준다. 아파트에 간 문경은 마음이 심란해져 그냥 나온다/중식은 연주와 순대를 먹으며 자신들의 관계에 대해 논쟁한다/문경은 카페에서 성옥을 우연히 만나 대화를 나눈다. 나폴리 모텔로 자리를 옮겨 섹스를 한 뒤, 문경은 성옥에게 결혼과 캐나다 이민에 대해 야기한다.

8일, 중식은 연주, 정호, 정화와 카페에서 대화를 나눈다. 중식 커플은 대화의 소재가 되었던 거지에게 봉변을 당할 뻔한다/저녁에 연극 <구토>를 보고 나오다 문경은 정호에게 봉변을 당한다.

9일, 중식이 정호, 연주와 항구를 걷다가 정호가 성옥을 보고 전날의 실수를 사과한다. 중식은 영생아파트에서 나쁜 상상을 하다가 계단에서 넘어진다/호동식당에서 엄마가 6800달러를 주며 울음을 터뜨리자 문경은 따라 운다. 문경은 항구 앞에서 기다리고 있던 성옥을 만나 차를 마시러 간다.

10일, 전날 다친 곳에 침을 맞은 중식은 호동식당에서 밥을 먹은 뒤 큰아버지 댁에 연주를 소개하러 간다. 만취해 속마음을 털어놓다가 끝을 못 맺고 기절한다/문경은 성옥을 엄마에게 소개하려 하지만, 전후 사정을 알게 된 성옥이 호동식당 문 앞에서 돌아선다. 두 사람은 배를 타고 제중당으로 갔다가, 문경 홀로 배를 타고 돌아온다.

11일, 터미널 앞에서 중식은 정호와 이별하고, 정호에게 성옥의 전화가 걸려온다. 중식과 연주는 여수행 버스 안에서 사랑을 다짐한다.

위에 나열한 11일의 경로는 특별한 참조없이 인물들의 대사나 그들이 입고 있는 옷의 색깔, 날씨, 그리고 사물들에 의해 추론되었다. 예를 들면, 2일과 3일을 구분하는 것은 날씨인데, 맑았던 날씨가 비가 오는 것으로 바뀌면서 하루가 넘어가는 식이다. 4일과 5일의 전환은 성옥의 옷 색깔 변화에 의해 일차적으로 신호된다. 내레이션을 통해 문경과 중식이 ‘그날’, ‘다음날’ 등의 시간 계시를 주는 경우도 있다(1일, 4일, 7일). 11일의 시간을 제시함에 있어 홍상수는 이야기의 조각들을 교직시키면서 각 단락의 관계에 혼란을 야기한다. 실제 벌어진 사건의 연속성과 달리 홍상수는 두 남자의 액션 라인을 의식적으로 분리된 것으로, 또는 분리의 장치를 설치한 채로 제시하는데, 그 역할을 떠맡은 형식 중 하나가 문경과 중식의 주고받는 에피소드 사이에 막처럼 삽입되는 흑백 스틸 사진이다. 독립적인 소단락처럼 보이는 이 흑백의 휴지부에 대해 주의할 점은 그것이 늘 거기에 있지 않다는 사실이다. 전반부까지 규칙적으로 삽입되었던 흑백 스틸 사진은 6일째 나폴리 모텔 주차장에서 문경이 정호의 양다리를 성옥에게 고해 바치는 에피소드 이후부터 홀연히 사라진다. 이후에는 계속 나타나지 않다가 9일째 중식이 아파트 계단에서 넘어지는 에피소드 뒤에 한번 더 등장한다. 전반부 강박적으로 지켜지던 A/B 패턴에서 ‘/’가 사라지면서 휴지부가 사라진 AB로 패턴이 바뀌는 것이다. 하지만 선행한 패턴의 지배를 받는 우리의 인식은 두 단락을 여전히 분리된 것으로 지각할 것이다. 이것은 아주 작은 착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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