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시장 후보 초청 MBC <100분 토론>을 심야영화 대용으로 관람했다. 시청하지 않은 분들을 위한 중계는 생략하고 (다시 보기 서비스를 이용하시거나 가까운 게시판의 중계를 열독하시면 좋을 듯) 곧바로 관전평. 아니 평 아니고 감상. 아니 감상 아니고 한숨. 논리적인 말을 조급히 하는 사람보다 텅 빈 말을 조근조근 하는 사람에게 유권자는 끌리더라(대개의 연애도 그렇듯). 하물며 제3자에겐 진부할 수 있는 말을 어눌하게 띄엄띄엄 원고를 읽는 후보가 시청자에게 어필할 방법은 더 요원할 터. 더도 덜도 말고, 속 보이는 인테리어 애호가(또는 얼굴마담)보다는 편안한 표정, 일관된 톤으로 말하는 면접의 기술을, 정말 피나게들 익혀야 하지 않을까. 별 의미도 철학도 효용도 없는 누군가의 변들이 상대적으로 설득력 있어 보이게 하는 몇몇 후보의 어눌한 말발이 슬프다. 여기서 추천작. 주성치의 <구품지마관>. 구슬이 서말이라도 꿰어야 보배이듯 의협심과 정책 마인드가 만땅이어도 솜씨있는 말로 꿰어 전시를 해야 이기는 싸움이 된다.
따라서, 뭔가 세상을 조금이라도 바꾸고 싶은, 몫 없는 사람들에게 몫을 돌려주고 싶은 (또는 분하게 잃은 몫을 되찾고 싶은) 정치인들이 숙지했으면 하는 사항. 자신의 코멘트를 대중이 이어폰을 끼고 경청하는 것이 아니라 냉장고 여닫으며 주변음으로 듣는다는 사실. 메시지 담은 진중한 작사, 작곡을 하되 어쩔 수 없이 편안한 커버송 몇개를 준비해야, 그리고 어떻게든 맥락을 만들어 예능의 말석에라도 앉아야 (아니면 존재 자체에 예능감이 있거나) 후크송으로 도배된 순위프로에 진입할 수 있게 된 작금. 그 정글의 법칙을 긍정하진 않더라도 어느 정도 인정한다면, 적어도 그 안에서 무언가 획득하고 싶다면, 절치부심 두 마리 토끼를 쫓아야 한다는 이야기.
국민은 당신들의 논리를 경청하는 게 아니라오
쓴 김에 오지랖 추가. 혹 유력한 여성 후보를 지지하고 지원하는 분 계시면, 그분 말씀하실 때, 글로 치면 첨언과 괄호에 해당하는 부분들은 아예 생략하시라 조언 좀 해주시길. 머리 좋고 사려 깊은 사람일수록 오히려 사이사이 짚고 넘어갈 일, 풀고 넘어갈 지점이 생각나 멈칫대는 경향이 있는데, 그런 사항을 긴밀한 접속사도 없이 다 만져보고 가는 것보다는 차라리 논리적으로 아쉬운 설명이 낫지 싶다. 더불어 발화를 멈춰가며 생각하지 말고 일관된 스피드로 계속 문장을 뱉으며 다음 논리를 생각하시라 조언 좀 부탁. 다시 말하지만 대부분의 국민은 당신들의 논리를 경청하는 게 아니라 말씨와 리듬을 귓등으로 느낀다. 그 촉감으로 호오를 결정하고는, 그걸 이성에서 나온 판단이라 믿는다, 믿어버린다, 믿어서 버린다. 이런 설들을 속절없이 웹에 단문으로 올리는데, 소설가 윤이형님이 건네온 멘트. amber_oid @ysimock 가슴이 떨려서 토론 못 보고 있는데 왠지 예상한 상황이 벌어지고 있는 것 같아 가슴이 아프네요. @amber_oid 예, 이거 예전 케네디 vs 닉슨의 TV토론처럼 일종의 학습동영상이 되어 다음을 위한 반면교사의 발판이 되길(아니면 <프로스트 vs 닉슨> 같은 영화를 샘플 삼거나. 어딜 가나 닉슨이 낀다).
어찌보면 지금의 TV토론 내지 대의정치라는 ‘형식’ 자체가 올바른 ‘내용’을 품기에는, 즉 want가 아닌 need를 검증하기에는 한계가 있다는 것의 방증일 수도 있다. 가령 지금 제일 말 잘하는 후보를 보라. 솔직히 별 관심없을 계급과 인민 얘기를 저리 간절한 표정과 어조로 말하는 모습이 흠, 좀, 무서울 정도다. 사랑하지 않는 상대에게 화사한 표정, 조근조근한 목소리로 연가를 바치는 느낌이랄까. 어쩌나, 아이언맨의 코스튬이 인기를 끄는 세상. 일단 ‘긍정’은 하지 않아도 ‘인정’은 하면서 시스템을 바꿔나가야지, 에후.
이런 한숨의 릴레이 사이 대안이 하나 생각나긴 했다. 지난 과업과 세세한 지향은 다르되 적어도 지양하는 바는 비슷한 두 후보 중 한 후보가 좀더 말도 잘하고 정책 준비도 열심히 한 다른 후보의 선거대책위원장을 맡아 묵묵히 수행하면 어떨까. 세가 약한 쪽이 그늘을 찾아 들어가는 거라면 별 뉴스가 안되겠지만 그 반대라면 충분히 화제도 될 텐데 말이다. 괜한 이죽거림이 아닌 진정 고대해보는 마음. 그런 의외의 결단일수록 역사에 남는 법이지만, 물론 요원하겠지. 비유하자면, 휴먼드라마를 만드는 데 열심이지만 결과물은 별로인 상업 연출자가, 약자를 위한 다큐멘터리를 꾸준히 만들어온 김동원 또는 빨간경순 감독의 조감독을 해보면 어떨까 하는 뭐 그런 천진한 제안.
<임을 위한 행진곡>의 재생마저 가로막힌 날
막상 주절주절 써놓고 보니 ‘뭔가 다른 영화’를 만들고 싶은, 그리고 어쨌든 그걸 대중에게 선보이고 싶어 하는 나와 동료들에게도 해당하는 이야기다(가령, 인디포럼). 스스로에겐 어려운 과제인데 늘 그렇듯 남한테 훈수 놓기는 쉬운 게지. 가라앉히고 여담. 자유선진당의 지상욱 후보는, 미드 <오피스>에서 스티브 카렐이 맡은 캐릭터가 목소리 옥타브 낮아진 동양인이 되어 앉아 있는 느낌을 준다. 마이클은, 작은 도시의 물정 어두운, 그러면서 ‘좋은 상사 코스프레’에 목 매는 영업점장. 다만 간간이 생기는 여자 파트너는 엄청 미인이었지. 내 말은, 부럽다는 이야기! 이렇게 얄팍한 푸념을 하고 있는데 끼어드는 낯익은 아이디. 경애하는 싱어송라이터 한희정씨. dawnyboom @ysimock 아까 영화 이야기, 뭔가 다른 노래를 만들고 싶은 제게도 해당되는 말. 근데 정말 서울시장 감투보다 그게 (예쁜 와이프가) 더 좋은 거예요? @dawnyboom (이런 질문에는 딴소리를 해야지) 한희정씨가 홍대쪽 구청장 나오시면 한표! 근데 희정씨 노래가 저기 얼굴마담보다 훨씬 길고 넓은 수명과 폭을 지녔다는 데 만표!
에헤라, 애호하는 뮤지션과 대화도 주고받았겠다, 득의양양하고 있는데 맞팔 중인 어느 관객의 지긋한 트윗 독백. acid**** 현실에 힘을 실어주지 못한다면, 이 퍼나름들 이 지껄임들이 무의미해지는 것 같다. 이 한심스러운 기계들 말고 세상과 삶을 직접 봐야겠다고 생각했다. 사람 만나고 싶다, 진짜 사람.
다시 뻘쭘해지는 마음. 소통에 대한 충고를 한답시고 지저귄 시간이 부끄럽네. 마침 TV에서는 노회찬 후보가 오세훈 후보에게 질문을 던지고 있다. “이 이름 아십니까? 이성수씨 아십니까? 윤용현씨 아십니까? 이상림씨 아십니까? 양회성씨 아십니까? 한대성씨 아십니까? 김남훈 경사 아십니까?” 지난해 초 용산에서 스러져간 이들의 이름. 그제사 문득 자판을 만지작거리는 오늘이 5·18인 것을 깨닫는다. 거의 동시에 한희정씨 트윗에 오르는 문장. 잃었던 날들 위로 나는 피어나고 나의 손은 혀를 감싸고 아름답게 잊혀지는 모든 것에 아찔한 날들. 그저 또 다른 연가인가보다 했는데 알고보니 80년 광주를 노래한 그녀의 가사. <임을 위한 행진곡>의 재생마저 가로막힌 날, 가련하고 영험한 소셜네트워크서비스를 통해 숙연해지는 마음. 우리가 빚진 억울한 영혼들을 위해 늦었지만 근조. 입 다물고 묵념.
눈을 뜨면 언제나 시간은 무심히 흐르고 기억 끝엔 무언가 두려운 일이 반복되는 것 같은데 너는 바라지 우리의 침묵이 영원하길.-한희정 1집 <잃어버린 날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