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스카 와오의 짧고 놀라운 삶>(이하 <오스카 와오>)의 마지막 문장. “사람들이 말하는 게 바로 이런 거로군! 젠장! 이렇게 늦게야 알게 되다니. 이토록 아름다운 걸! 이 아름다움을!” 그리고 당신 역시 지금 주노 디아스의 장편 <오스카 와오>과 단편집 <드라운>의 첫장을 막 넘겼다면, 마지막 페이지를 덮을 때 똑같은 탄식을 내뱉고 말 것이다. 두권의 책만으로도 가능하다. 언어가 가지고 있는 주술적인 힘, 다음 페이지가 궁금해서 안달복달하게 만드는 잘 짜인 이야기의 매력. ‘소설’이 가질 수 있는 가장 뛰어난 자질을 모두 갖춘 작품임을 누구나 간파할 수 있다. 도미니카공화국에서 태어난 이방인 주노 디아스는 현재 미국 ‘주류’ 문학계에서 가장 주목받는 주인공이다. 21세기를 영광스럽게 장식할 첫 번째 소설가를, 우리는 지금 정말 운 좋게도 동시대에서 만나고 있는지 모른다. 한국문학번역원이 주최한 ‘세계 작가 축제’에 참석차 한국을 방문한 그를 만났다.
-공식 행사에 나서는 걸 매우 불편해한다는 인터뷰를 읽은 적이 있다. 하지만 당신은 지금 지구를 빙 돌아 한국에까지 와 있다. (웃음) 소감이 어떤가. =지금도 그다지 좋아하진 않는다. 이건 내 성격문제인데, 나는 군인 가족 사이에서 성장했다. 의무는 좋고 싫고의 문제가 아니었다. 그건 무조건 ‘좋은’ 뜻이다. 일단 뭔가 하기로 했으면, 정말정말 잘해내야 한다. 하지만 내 책을 아름답게 꾸며주고 출간한 회사가 내게 초청장을 보낸 일은 결코 사소한 문제가 아닐뿐더러 영광스러운 일이기도 하다. 대체 뉴저지 출신 방문자에게 뭐 궁금한 게 있다고 한국에서 나를 초청했겠는가. (일동 웃음)
-<드라운>에 수록된 <이스라엘>(1995)은 잡지에 실린 당신의 첫 단편이다. 당신이 쓴 작품이 처음 활자화되었을 때 기분이 어땠나. =벌써 15년 전 일이라 정확히 기억은 안 나는데…. 이거 하나만은 분명하다. 나는 ‘걱정도 팔자’ 타입이다. 천성이 그러하다.
-그렇게 안 보이는데! (웃음) = 정말 좋은 일이 생기면 분명 안 좋은 일도 생길 거라고 믿는다. 인생은 그런 식으로 균형이 맞아떨어지는 것 같다. 그래서 <이스라엘>이 처음 활자화되었을 때 흥분되고 기뻤지만, 온전히 즐길 수만은 없었다. 이번에 행운이 왔으니 그 다음에 불운이 뒤따를 것이다, 앞으로 다시는 잡지에 실리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불안에 사로잡혔다.
-일종의 ‘푸쿠’(<오스카 와오>에 중요하게 등장하는, 도미니카인 특유의 ‘재앙’)인 건가? =미신적인 건 아니고 그냥 내 개인적인 성격이다.
-첫 작품을 발표하기까지 시간이 오래 걸렸나. =그렇다고 할 수 있다. 미국에는 ‘이민자처럼 일하라’라는 농담이 있다. 쉬지 않고 매 순간, 거의 죽을 만큼. 나 역시 이민자고 실제로 이민자처럼 일했다. 아침 9시부터 오후 5시까지는 당구장 테이블을 치우고 신문을 배달하는 육체노동을 했고, 저녁 6시부터 밤 10시까지 대학 수업을 들었다. 아침 일찍 일어나선 매일 세 시간씩 글을 쓰려고 노력했다. 4시간 이상 자본 적이 없다. 그걸 8년 동안 계속했다. 나는 지금도 친구들에게 “20대 때 죽도록 일한 것의 보상을 지금 받는 모양”이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그 시기에 당신을 지탱해준 원동력은 무엇인가. =그 이미지들, 도미니카인의 이미지는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고 봐야 한다. 도미니카공화국이나 도미니카인은 존재하지 않는 거나 마찬가지다. 사람들은 우리에 대해 거의 알지 못한다. 설령 어떤 이미지가 있다 하더라도 그건 매우 부정적이다.
-미국에서 그렇다는 뜻인가. =전세계에서! 물론 미국에서 가장 분명하게 드러나는 현상이지만, 다른 나라에서도 마찬가지다. 나를 포함한 도미니카공화국 출신 젊은 이민자는 ‘나의 이미지’가 없는 채 성장한다. 당신이 TV를 켜면 거기엔 한국인 배우가 나오고, 상점에 가면 한국 상품을 살 수 있다. 그게 ‘거울’이다. 거울을 더 많이 가질수록 우리는 ‘평범한 정상’이 될 수 있다. 신화나 전설 속 괴물이 거울에 모습이 안 비치는 이유가 바로 그거다. 거울을 가지지 못한 민족은 괴물이 되게 마련이다. 그들은 어디를 보더라도 그들 자신을 발견할 수 없기 때문에 상처받기 시작한다. 나의 모티브는 그 무엇보다 가장 평범한 인간 존재가 되고 싶다는 욕망이었다. 나는 적어도, 단 하나의 거울이라도 창조하고 싶었다. 그리하여 어딘가에서 살고 있는 도미니카인 꼬마 단 한명이라도 내 책을 읽고 ‘이건 나야, 나는 여기 존재해’라고 생각할 수 있기를 바란다. 그 욕망이 나를 언제나 이끌어왔고, 지금도 여전히 그러하다.
-그런 혹독한 상황에서 작가가 되겠다는 결심은 어떻게 한 건가. =유색인종 이민자는 의사나 변호사, 엔지니어가 되어야 한다. 우리는 이곳에서 부유하고, 유용하고, 파워풀한 존재가 되어야 한다. 나 역시, 작가가 되겠노라고 스스로에게 ‘허락’하기까지 정말 오랜 시간이 걸렸다. 나는 첫 번째 책 <드라운>을 출간하기 직전까지도 엔지니어로서의 진로를 생각하고 있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착하고 똑똑한 도미니칸 보이’가 되고 싶었다. 어머니는 공장에서 하루 종일 일하며 가족을 부양했다. 나는 ‘가난한 아티스트’가 됨으로써 어머니를 실망시키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테이블 위에 놓인 내 책을 펼쳤을 때 28살의 나는 다짐했다. 더이상 이렇게 살 순 없어, 내가 하고 싶은 건 이거뿐이야, 라고.
-그렇다면 ‘유명한 작가’가 된 지금 가족의 반응은 어떤가. =유명한 작가는 유명한 스니커 디자이너랑 다를 바가 없다. (웃음) 아무도 모르고,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다. 아마 책 읽는 사람들은 알지도 모른다. 하지만 책 읽는 사람들은 인구의 1%에 불과하다. (웃음) 어머니는 아직도 내게 “넌 정말 똑똑한 아이였는데 재능을 왜 낭비하니?”라고 묻는다. 어머니에게 아티스트란 공산당원이거나 말썽꾸러기와 동급이다. 나의 형이나 여동생은 멋진 슈트에 시계, 근사한 차를 몰고 다닌다. 나는 그들에게 굉장히 이상한 존재일 수밖에 없다.
-미국에서 2개 국어로 말하고 글을 쓴다는 건(그의 책에는 영어와 스페인어가 뒤섞여 있다) 어떤 의미인가. =국가는 순수성에 대해 극도로 집착하는 경향이 있다. 사람들은 자신들이 순도 100%의 존재가 아님을 일깨우는 누군가를 싫어하고 심지어 분노한다. 이를테면 <로스트>의 배우 대니얼 대 김을 예로 들어보자. 한국 사람은 그에게 과중한 스트레스를 안겼다. 그가 한국말을 잘 못한다는 사실 때문에. 하지만 좀더 정확하게 말하면 수백만명의 한국인들이 외국에 나가 살 수밖에 없었음을 일깨우는 존재이기 때문에 그를 싫어했다. 그땐 한국이 가난했고 약했으니까. 미국에서 나의 위치도 마찬가지다. 나를 개인적으로 싫어한다는 뜻이 아니라, 내가 표상하는 바를 참을 수가 없는 거다. 미국인은 나를 보면서 자신들의 부를 위해 지구상에서 가장 약하고 가난한 이들을 필요로 한다는 사실을 연상할 수밖에 없다. 다시 말해 미국의 부는, 가난한 나라에서 건너왔고 영어를 할 줄 모르고 짐승처럼 일하는 이들에게 의존한다. 그중에서도 언어는, 순수성을 드러내는 예 중 가장 뜨거운 감자다. 누군가가 한국어를 제대로 말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그 사람을 그냥 날려버린다. 우리는 그걸 듣고 싶지 않다! 정말 슬픈 일이다.
-소설의 중요한 자질 중 하나로 교육적인 면을 꼽을 수 있다. 이를테면 당신의 작품을 통해 한국 독자는 도미니카공화국의 현대사를 배우거나 라틴아메리카 소설이 ‘마콘도’에서 ‘매콘도’로 바뀌어가는 과정을 이해할 수 있다. =동의한다. 역사적으로 소설의 주요 기능 중 하나가 교육이었다. <오스카 와오>를 예로 든다면, 그 작품은 도미니카인 가족의 트라우마가 침묵 속에서 어떻게 유전되는가를 그리고 있다. 오스카 와오의 가족은 도미니카공화국이라는 잊혀진 존재를 표상하고, 국민들이 기억하고 싶어 하지 않던 무언가를 드러낸다. 독자는 페이지를 넘기면서 결국 기억이 되살아나는 과정을 목도하게 된다. 한국 혹은 미국 독자, 도미니카공화국에 대해 전혀 알지 못하는 독자를 이끌어갈 수 있다는 건 멋진 일이다. 소설을 쓰면서 전적으로 독자를 가르치려고 의도한 건 아니지만, 결국엔 그런 효과를 낳게 된다.
-<드라운>에서의 간결하고 냉철한 문체와 <오스카 와오>의 현란하고 코믹하기까지 한 어조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다. =둘 사이에는 11년의 세월이 흘렀고, 난 어른이 되었다. <드라운>을 썼을 때 나는 25살이었다. 나는 그저… 당신도 기억하는가? 어렸을 때 타인이 나에 대해 어떻게 생각할까를 초조하게 걱정하던 시절을. 나는 지나치게 많이 걱정했다. <드라운>을 쓰던 당시의 나는 무척 긴장했었다. <드라운>은 절대로 실수를 저지르지 않겠다고, 완벽하게 작품을 통제하겠다고 작정했던 그때 내 모습 자체다. <오스카 와오>에선 난 그저 흘러가는 대로 두었다. 이 책이 과연 어떻게 나올지 두고보자는 심정이었다.
-다독가이자 열렬한 책 애호가로 유명하다. 최근에 읽은 책 중 추천작을 꼽는다면. =오가와 요코의 <호텔 아이리스>를 읽고는 당장 사랑에 빠졌고, 줄리 오링거의 <보이지 않는 다리>는 최고로 좋았다. 미국에서는 모르는 사람이 없지만 미국 바깥에는 거의 알려진 게 없는 SF작가 새뮤얼 들레이니의 <어둠의 반영>도 끝내줬다. 한국에선 번역 안됐다고? 애도를 표하는 바다.
-미라맥스가 <오스카 와오>의 판권을 구입했다. 영화화 작업이 어느 정도 진척되었는지 궁금하다. =미라맥스는 그 영화를 안 만들 거다. (웃음) 예를 들어보자. 한국인 수가 4500만명인데 할리우드에서 한국인을 본격적으로 다룬 영화를 본 기억이 없다. 심지어 도미니카인은 1천만명 정도밖에 안된다. 훨씬 더 적다. 할리우드로서는 도미니카인이 주인공인 영화를 서둘러 만들 필요가 없다. 일단 판권을 사긴 산다. 할리우드가 일종의 컬렉터라는 건 잘 알 거다. 일단 물건을 사고, 보류한다. 2년마다 소설 판권 계약을 갱신하지만, 영화화하진 않는다. 뭐 상관없다. 마지막으로 <오스카 와오> 판권을 갱신했을 때 그들은 돈을 다 내는 대신 양복 두벌을 선물해줬다. 끝내줬다. 내 팔자에 휴고 보스 슈트를 살 일이 있겠나! (웃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화가 진행된다면 당신은 어떤 부분을 가장 기대하는가. =<중앙역> <모터싸이클 다이어리>을 만든 브라질 감독 월터 살레스가 개인적으로 연락한 적은 있다. 알다시피 그는 뛰어난 감독이고, 적어도 ‘화이트 보이’에 관한 영화로 만들진 않을 것이다. 하지만… 여전히 나는 ‘걱정도 팔자’다. 무슨 뜻인지 이해하나? (웃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