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회 인권영화제가 5월27일부터 30일까지 4일 동안 서울 대학로 마로니에 공원에서 열린다. 올해 4월 청계광장 사용을 두 차례 신청했으나 모두 불허 통보를 받아 대학로로 자리를 옮긴 인권영화제는 최소한의 표현의 자유마저 허락지 않는 현 정부 아래에서 개최만으로도 큰 의미를 지닌 영화제다. 개막작 <눈을 크게 떠라-좌파가 집권한 남미를 가다>를 시작으로 29편의 상영작이 자유·평화의 날, 소수자의 날, 자본·저항의 날, 노동·빈곤의 날 등으로 나뉘어 소개되는데, 이중 신작 위주로 7편을 미리 뽑아 둘러봤다(seoul.humanrightsff.org).
쌍용차를 기억합시다 <당신과 나의 전쟁>
“전쟁 같은 출근길은 축복이다.” IMF 이후 한국사회는 기막힌 역설을 받아들여야 했다. 구조조정은 당연했고, 정리해고는 더이상 의문시되지 않았다. 2009년 여름, 헐값에 매각된 회사를 되살리기 위해 투쟁의 성을 쌓았던 쌍용자동차 노동자는 자본과 공권력 앞에서 폭도로 내몰릴 수밖에 없었다. 2009년 평택의 오월은 1980년 광주 오월의 재연이었다. “열심히 일한 죄밖에 없는” 2500명의 노동자는 정리해고 블랙리스트에 올랐고, 공권력은 연간 사용 최루액의 90%를 쌍용자동차 노동자를 향해 분사했다. 물과 전기를 끊고 음식물 반입까지 봉쇄하는 비인간적인 폭력이 자행되는 동안 쌍용자동차 노동자는 오직 ‘분노’만 먹을 수 있었다. 하지만 그들의 함성은 전직 대통령들의 죽음과 추모 물결 속에서 이내 묻혀버렸다. 누군가는 절규 앞에서 “어쩔 수 없어” 침묵했고 누군가는 “내 일이 아니라 안도했”지만 비극은 끝나지 않았다. 태준식 감독은 “언덕에 오르려면 신발 끈을 조여매야 한다”는 MB의 설교 앞에서 “당신과 나의 전쟁” 또한 눈앞에 도래해 있다고 말한다. 특별 재상영되는 <인간의 시간>(2000)과 함께 보라. 자본은 더욱 간교해졌고, 당신과 나는 더욱 둔감해졌다.
마라도나가 정치를? <눈을 크게 떠라-좌파가 집권한 남미를 가다>
“어떤 시간이 될지는 알 수 없지만, 최소한 우리가 바라는 시간을 상상할 권리는 있다… (중략) …인류의 엄청난 다수는 보고 듣고 침묵할 권리 외에는 가진 게 없다. 한번도 발표된 적 없는, 꿈꿀 권리를 행사하기 시작하는 것은 어떨까? 아주 잠시라도 이성을 잃는 게 어떨까? 또 다른 세상을 꿈꾸며 혐오스러운 오늘을 넘어선 곳에 우리의 시선을 고정시키자.” 어쩌면 에두아르도 갈리아노의 이 글이 좌파가 집권한 남미로의 여행을 부추겼는지도 모른다. <눈을 크게 떠라…>는 혁명이 불가능하다고 여기는 21세기에 쓴 모터사이클 다이어리다. 브라질 아마존의 콩 농장, 볼리비아의 광산, 에콰도르의 밀림 등을 떠돌며 신자유주의에 저항하는 이들의 목소리를 채집하는 카메라는 룰라 다 실바(브라질), 우고 차베스(베네수엘라), 에보 모랄레스(볼리비아) 등과 같은 좌파 정권이 남미에 줄지어 탄생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시장을 유일신으로 받드는 신자유주의에 대한 극렬한 거부의 몸짓이 자리하고 있었다고 설명한다. 그까짓 자유, 걷어차 버리자는 축구선수 마라도나의 정치 선동도 볼 수 있다.
쓰레기를 먹고 사는 아이 <돌과 꿀>
8살짜리 꼬마 후앙에게 쓰레기는 양식이다. 아이는 악취나는 쓰레기 더미를 뒤져 발견한 금속 폐품을 내다 팔아 돈을 번다. 독수리 떼와 광견병 걸린 개들과 종창 범벅인 소들과 경쟁하며 쓰레기를 줍는 후앙은 희망이라는 단어를 알지 못한다. 당신이 지금 보고 있는 현실은 거짓인가, 진실인가라고 되묻는 내레이션이 흐르는 동안 더러운 장난감을 만지작거리던 후앙의 천진난만한 눈은 어느새 누군가를 쏘아보고 있다. 진흙과 오물을 잔뜩 묻힌 후앙의 뒤꿈치, 신자유주의 시대 에콰도르의 초상이다.
철조망 건너편의 잔인한 폭력 <카발라-백색지대>
청보리가 바람 따라 살랑거리는 평야 한가운데 철조망이 쳐진다. 철조망을 사이로 한쪽은 전쟁놀이라도 벌이는 모양이다. 무장한 군인과 경찰이 기념사진을 찍고, 반대편에선 아무 일도 없다는 듯 새들이 지저귄다. 그리고 얼마 뒤, 아이러니한 상황의 전모가 드러난다. 카발라. 2007년 독일 하일리겐담에서 개최된 G8정상회담을 비호하기 위해 조직된 경찰특수전담반이다. 카발라는 정상회담 반대 시위대가 모습을 드러내자 철조망을 넘어 그들의 숨겨진 임무를 완수한다. 공권력이 정당방호가 아니라 시위를 먹잇감 삼는 폭력임을 명징하게 드러낸 작품.
글을 배우고 싶은 양치기의 슬픔 <펜을 찾아서>
글을 배우고 싶지만 그럴 수 없는 우간다 소년의 이야기. 삼촌 집에서 염소를 돌보며 살아가는 고아 소년은 짬만 나면 근처 학교에 들러 자신보다 한참 어린 아이들의 수업을 엿듣는다. 펜은 저주를 부른다는 부족 어른들의 말을 이해할 수 없는 소년은 급기야 학교 선생에게 찾아가 글을 배우고 싶다고 말한다. 그러나 수업료는 물론이고 연필 하나 살 수 없는 소년에게 입학 허가가 내려질 리 없다. 글이야말로 힘을 얻을 수 있다고 믿었던 소년의 꿈은 신기루처럼 사라진다. 양치기로만 살아야 하는 운명을 알아차린 소년의 체념한 얼굴이 쉽게 잊혀지지 않는다.
고시원 쪽방에도 빛이 들까 <이편한세상>
‘e편한 고시원.’ 이름과 달리 누워 뒤척이기조차 불편한 비좁은 고시원이나 노숙 생활을 해온 용수에겐 더없는 보금자리다. 인권단체의 도움으로 다른 노숙자와 함께 주거지원을 받아 고시원 생활을 시작한 용수는 매서운 겨울, 일자리를 찾아 나서지만 받아주는 곳은 어디에도 없다. 사회 부적응자라는 꼬리표를 좀처럼 떼기 어려운 그에게는 고시원조차 사치인지 모른다. 불편한 세상에 어떻게든 편입하려고 했던 용수의 노력은 수포로 돌아가고, 용수는 감독에게 빌린 담뱃값을 갚고 난 뒤 홀연히 사라진다.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 ‘이 편한 세상’을 찾아서.
철거민 할머니들의 투쟁 <23X371일-용산 남일당 이야기>
예순 넘은 할머니들은 좀처럼 물러설 줄 모른다. 경찰을 방패 세운 용역 깡패가 짓밟아도 할머니들은 깡으로 오롯이 버텨낸다. 진상규명 없는 타협은 불가능하다는 ‘용산4상공철대위’ 23인 중 절반 이상이 머리 희끗한 60대 할머니다. 머리 희끗한 할머니들은 처참한 용산참사의 그날을 기억하며, 이웃사촌과 함께 1년이 넘도록 분향소를 지켜낸다. 터전을 뺏겼지만 동지를 얻고 투쟁을 배웠다는 할머니들의 육성을 따라 카메라는 뉴타운 사업의 유일 수혜자가 대기업 건설 자본임을 드러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