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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작소개] 영화, 술을 캐스팅하다

캐릭터 상징하고, 분위기 암시하는 중요한 소품, 영화 속 술 이야기

허무를 누르는 혼돈의 힘, <캐리비안의 해적>과 럼

<캐리비안의 해적> 1,2,3편(고어 버번스키 감독, 2003, 2006, 2007년)을 보면서 나는 <피터 팬>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피터 팬>의 피터 팬은 어른이 되기를 거부한 채, ‘네버랜드’라는 작은 섬에서 고아 어린이들과 요정들과 어울리면서 해적 후크 선장과 전쟁, 혹은 전쟁놀이를 하며 산다.

여기서 네버랜드를 카리브해 전체로, 나아가 이 세계 바다 전체로 확장하고 해적 선장을 후크 한 명에서 바르보사, 데비 존스, 샤오팽 등으로 늘리면 어떻게 될까. 무대를 그렇게 넓히면, <피터 팬>의 집 없는 고아 어린이들은 <캐리비안…>의 해적선 선원들이 되면 된다. <피터 팬>의 요정들은, 판타지를 강조하면 <캐리비안…>에서 복수를 벼르는 여신 칼립소가 될 것이고, 유희나 쾌락을 강조하면 카리브해 섬 항구의 여자들이 될 것이다. 어느 쪽이든 관람 등급 연령이 높아질 수는 있어도, 텍스트 안에서의 역할에 본질적인 차이는 없다.

다음은 주인공 캐릭터이다. 어른이 되기를 거부한다? 가족이나 집단에 대한 책임을 떠맡지 않고 놀고 싶어 하는 것이다. 그럼으로써 자기 의지와 무관하게 일어나는 가난, 질병, 전쟁(진짜 전쟁) 등등의 비극으로부터 도망쳐 다니겠다는 것이다. 하지만 속세에서는 그러기 힘들기 때문에 피터 팬은 성장을 멈춘 채 세상과 동떨어진 네버랜드 안에 묻혀 산다.

<캐리비안…>의 주인공 잭 스패로 선장(조니 뎁)은 이미 다 커 버렸다. 그럼에도 그 역시 조직이나 공동체에 대해 책임지려 하지 않는다. 가족도 없고, 사회의 어떤 조직에도 발 담그지 않는다. 말이 해적이지, 유머가 있고 여성스럽기까지 한 그에게서 공격적인 면모는 찾아보기 힘들다. 어떻게 선장이 됐는지 모르지만, 부하 선원들에 대한 책임감도 없어서 위기가 닥치면 혼자 도망치기 일쑤다. 그러면서 끊임없이 바다와 육지를 떠돌며 놀려고 한다.

속세의 질서와 전혀 다른 질서, 혹은 무질서의 세계를 무대로 삼고, 거기서 판타지에 가득 찬 모험을 하는 주인공이 속세로 돌아오려고 하거나 속세의 질서를 그 곳에 심으려고 하기는커녕 그 세계 안에서 끝없이 놀려고 한다는 점에서 두 텍스트는 닮아 있다. 그러나 이야기는 다르게 전개된다. 먼저 두 주인공 사이의 큰 차이점. 피터 팬과 달리 잭 스패로는 럼을 마신다는 것이다. 그냥 술이 아니라 럼을!

럼이 처음 만들어진 게 카리브 해의 바베이도스 섬인데, 17세기 중반에 나온 이 섬의 한 문건은 럼이 “독하고, 지옥 같고, 끔찍한 술”이어서 그 별명이 ‘악마를 죽인다’는 뜻의 ‘킬 데블’이라고 전하고 있다. 실제로도 좀 더 정제된 럼이 나오기 전인 19세기 중반까지는 조금이라도 분위기를 잡는 카페에서는 내놓지 않을 만큼 싸구려 술로 취급됐다고 한다. 럼의 어원이라는 ‘rumbullion'이라는 말도 소동, 난동을 뜻한다. 그러니까 19세기 중반 전까지 럼은 마실 때 독하고, 취하면 소동이나 난동을 부리게 하고, 깰 때는 지옥 같은 술이었다는 말인데, 18세기 해적들은 그 럼을 마셨을 거다.

영화에서 잭 스패로도 그 럼을 입에 달고 살다시피 한다. 마실 땐 그렇다 쳐도 깰 때의 그 지옥 같은 고통은 어떻게 할까. 집도 절도 없이 돌아다니는 이들이, 특히 잭처럼 특별한 권력욕도, 별달리 집착하는 대상이나 가치도 없어 보이는 이가 광란의 취기에서 깨어날 때 밀려오는 허무함과 외로움을 어떻게 견딜까. 잭은 혼자 있을 때 간간히 자기 분열 증상을 겪는다. 3편에서 그가 혼자 ‘이 세상 끝’에 갔을 때, 그 분열은 극에 달한다. 영화는 코믹하게 그리지만, 이건 끔찍한 이야기다. 하지만 잭은 멀쩡하게 다시 바다와 육지를 돌아다니며 논다. 이쯤 되면 대단한 내공이다.

잭의 이런 내공에 힘입어 <캐리비안…>은 이야기를 달리 풀어간다. <피터 팬>에서 피터 팬은 속세에 사는 웬디를 판타지의 세계로 데려갔다가, 다시 속세로 데려다 준다. 두 세계는 더 이상 충돌이 없다. <캐리비안…>에선 속세에서 해적의 세계로 들어온 엘리자베스를 따라 영국군들이 쳐들어온다. 이런 두 세계의 충돌로 인해 해적 세계도 질서가 재편될 수밖에 없는 상황에 놓인다. 거기서 잭은 해적 세계의 총책을 맡을 것을 요구받게 된다.

잭은 자신이 공유하고 있던 피터 팬의 비타협성, 집단에 편입돼 그 집단을 책임지는 것을 거부하는 태도를 버릴 것인가. 그럴 리가 없다. 자신과 달리 사랑이라는 가치의 고결함을 믿어 마지않는 다른 남자에게 그 책임을 잽싸게 떠넘기고는 전처럼 이렇다 할 집착 없이, 필요하면 배도 버리고 여자도 버리면서 다시 바다로 나간다. 그는 럼으로 무장한 피터 팬이다. 럼이 주는 혼돈의 힘으로 허무와 외로움을 누르면서 끝없이 놀려고 하는.

유혹과 위로 혼합한 마법의 술, <마이애미 바이스>와 모히토

남자: 술 한 잔 사도 될까요? 여자: (정박해 있는 남자의 최신식 보트를 보며) 저 배 얼마나 빨라요? 남자: 매우 빨라요. 여자: 보여줘요. 남자: 어디로 가고 싶어요? 여자: 뭘 마시고 싶은데요? 남자: 모히토! 여자:(남자에게 다가와 귀에 대고) 잘 하는 곳을 알아요.

남자는 콜린 파렐이고, 여자는 공리. 둘은 마이애미에서 보트를 타고 바다를 가로질러 나간다. 여자의 머리카락이 휘날린다. “모히토를 가장 잘 만드는 곳으로 안내할게요.” 남자가 어디냐고 묻는다. “보데기타 델 메디오.” ‘보데기타 델 메디오’는 1942년 쿠바의 하바나에 문을 연 레스토랑 겸 바이다. 일찍부터 모히토 칵테일을 만들어 팔아 반세기 넘도록 모히토의 대명사로 불렸던 곳이다. 헤밍웨이, 브리지트 바르도, 냇 킹 콜 등의 명사들이 다녀간 관광 명소이기도 하다.

마이애미에서 하바나까지는 367㎞. 멕시코 만과 대서양의 중간쯤인 그 곳엔 바다밖에 없다. 날아가듯 달려가는 보트의 속력을 보면 2시간 안에 도착할 것 같다.(자료엔 ‘MTI 파워보트’라고 나와 있다. 촬영 끝난 뒤에 팔려고 내놓은 가격이 5억원 상당이란다.) 마침내 도착한 ‘보데기타 델 메디오’의 저녁 야외 파티장. 열정적이면서도 세련된 라틴 음악(만자니타의 <아랑카>)이 연주되고, 마이크를 잡은 중년의 근육질 대머리 아저씨의 어깨춤에 흥이 넘친다. 말 그대로 ‘멋져 부러!’ 이날 밤 주인공 남녀 둘이 함께 자는 데 대해 시비 거는 관객이 있다면, 그 관객 문제 있다고 본다.

<마이애미 바이스>(2006년, 마이클 만 감독)는 이 일련의 장면만으로도 돈 아깝지 않다고 생각한다. 입자가 거칠고 푸른 빛이 짙게 밴 깔깔한 화면이 카리브 해 연안의 신산한 바닷바람까지 전해준다. 그런데 묘한 건, 이 영화의 이국 풍경이 낭만적이기보다 몽환적이라는 점이다. 어딘가 현실에서 떠 있는 것 같고 그래서 설레기도 하지만 불안하기도 하다. 보트가 망망대해를 달릴 때 원경으로 찍은 둥근 수평선은 현실과 환상의 경계선처럼 비쳐진다.

술 얘기를 시작하자. 모히토는 럼주에 설탕, 라임주스, 민트 잎, 소다수를 섞은 쿠바산 칵테일이다. 그 이름이 처음 기록에 나오는 건, 1930년대 쿠바의 한 카페 메뉴판에서이고 실제로 마시기 시작한 건 19세기말로 추정된다. 쿠바와 가까운 마이애미에선 일찍부터 모히토가 유행했지만, 뉴욕이나 샌프란시스코 등지에 본격적으로 퍼져나간 건 80년대 이후라고 한다. 그게 세계로 퍼져 한국까지 들어온 건 더 최근의 일일 테니, 우리가 이름을 들어봤음직한 칵테일 가운데 모히토는 유행의 최첨단에 있는 셈이다.

이 칵테일은 영화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모히토(Mojito)는 아프리카에서 아메리카로 노예로 끌려온 흑인들의 언어 ‘모조’(Mojo)에서 비롯됐다. ‘모조’는 ‘마법’이나 ‘마법을 걸기’ 혹은 마법을 걸 때 쓰는 소품 등을 뜻한다. 콜린 파렐의 보트엔 'MOJO'라는 글씨가 크게 쓰여 있다. 마법의 술인 모히토를 먹기 위해 둘은 마법이라는 이름의 보트를 타고 현실과 환상의 경계선 너머로 간다.

다시 영화 얘기. 마이애미 경찰 두 명이 남미 마약 조직 속으로 신분을 속이고 위장 잠입해 마약 운송 경로를 파헤친다. 경찰 중 한명인 콜린 파렐이, 마약 조직 두목의 정부인 공리와 사랑에 빠진다. 누아르 영화에서 많이 봐온 이야기다. 다른 건, 이 사랑이 콜린 파렐에게 일으키는 파장이다. 여느 누아르 영화와 달리 그는 이 사랑 때문에 임무 수행에 큰 지장을 겪지 않는다. 더구나 임무를 마친 뒤 냉정하게 여자를 떠나보낸다. 그에게 여자는 마이애미 바깥의, 일상적인 삶 너머의 다른 세계로 자신을 이끄는 존재다. 처음엔 유혹이었다가, 잠시 희망이더니, 곧 환영이 되버리고 만다. 그래서 여자가 떠나느냐, 남자가 떠나보내느냐는 문제는 중요하지가 않다. 남자는 집 떠나지 못하는 오디세우스였다.

영화 초반에 콜린 파렐은 마이애미의 한 나이트클럽에서 여자 바텐더에게 모히토를 주문한다. 여자가 묻는다. “레몬을 넣을까요, 라임을 넣을까요?” 레몬과 라임은 서로 대체제가 되기도 하지만 차이가 있다. 허리나 어깨가 결릴 때 붙이는 파스엔 ‘쿨’이 있고 ‘핫’이 있다. 아쉬울 땐 아무 거나 붙이지만 느낌이 다르다. 말하자면, 레몬은 ‘핫’이고 라임은 ‘쿨’이다. 그리고 라임의 맛이, 최소한 레몬을 주로 먹는 우리들에겐, 더 이국적이다.

콜린 파렐은 라임을 택한다. 이렇게 들린다. ‘마이애미에 갇힌 삶이 싫어. 저 바다 너머 다른 세계로 가고 싶어.’ <매트릭스>에서 키아누 리브스가 빨간 약, 파란 약을 두고 했던 선택과 정반대라고 할까. 라임 모히토의 선택으로 시작한 영화는 다시 모히토를 매개삼아 다른 세계로 갈 듯하다가 결국 마이애미의 한 건물로 들어가는 콜린 파렐의 뒷모습을 비추며 끝난다. 여자를 떠나보내고 나서도 그는 모히토를 마실 거다. 집 못 떠나는 그에게, 혹은 우리들에게 모히토는 유혹인 동시에 위로이다.

확실히 모히토엔 그런 맛이 있다. 이국적이라기보다 초국적인, 그러니까 구체적인 어느 곳이 아니라 그냥 여기와 다른 어떤 세계에 대한 동경이나 기시감 같은 걸 느끼게 한다고 할까.

<술꾼의 품격> 마법 같은 유혹과 위로, 25가지 술과 영화 이야기 임범 지음/ 씨네21북스 / 12000원

<술꾼의 품격>은 영화기자 출신의 대중문화평론가이자 애주가인 임범이 영화에 나오는 술을 소재로, 그 술의 원료, 제조법, 유래 등 자세한 정보와 더불어 영화 이야기를 맛스럽게 풀어낸 에세이이다. 마티니 제조법 유행을 “미디엄 드라이, 젓지 말고 흔들어서”로 바꾸게 한 <007> 시리즈, 알 파치노의 ‘미국인다움’을 상징하는 <여인의 향기>의 잭 다니엘스, ‘신념형 백수’인 <위대한 레보스키>의 레보스키가 마시는 화이트 러시안이란 칵테일, <라스베가스를 떠나며>에서 니콜라스 케이지가 죽기 위해 영화 내내 마신 ‘죽음처럼 명료한 순수 에탄올’ 보드카 이야기 등, 25가지 술과 영화 이야기가 담겨 있다.

작가소개: 임범 1962년생. 한겨레신문사에서 18년 동안 사회부, 경제부, 문화부 기자와 문화부장을 지냈다. 이십대엔 술을 많이 마셨고, 삼십대엔 폭음했고, 사십대에 술을 즐기다가 지금은 애주가가 됐다. 이삼십대엔 사건 기사를 썼고, 사십대엔 영화 기사를 쓰다가, 신문사 그만둔 뒤 영화 일을 하며 ‘대중문화평론가’ ‘애주가’ 등의 직함으로 여러 매체에 문화와 술에 관한 글을 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