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성된 작품으로서 시(poem)는 ‘아름다움’이지만 문학 형식으로서 시(poetry)는 ‘아름다움을 향하는 자세’에 속한다. 이창동의 신작 <시>는 명백히 포에트리에 관한 이야기다. 완성된 하나의 시(포엠)는 정제된 언어의 조합인 동시에 피어오르는 직관의 언어다. 지극히 이성적인 도덕의 영역과 비범한 직관의 세계가 하나 되었을 때 비로소 온전한 시가 탄생한다. <시>는 이 완성된 아름다움을 완결된 영상으로 담아내기보다 아름다움의 의미는 무엇인지 좇는 질문으로 가득 차 있다. 관객이 영화의 행간에 적극적으로 뛰어들어 각자의 방식으로 질문에 답하는 ‘순간’ 시가 탄생하고 <시>도 완성된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시와 소설은 다르다. 소설이 서사를 통해 메시지를 실어 나르는 데 주력한다면 시는 공백의 공간에서 삶과 아름다움의 의미를 묻는다. 그래서 <시>는 결정된 서사가 아닌 미지의 질문에 관한 영화다. 의사가 나이를 묻자 65살이라고 했다가 이내 수줍게 66살이라고 정정하는 미자(윤정희)는 경기도의 작은 소도시에서 이혼한 딸이 맡기고 간 중학생 손자와 함께 살아간다. 생활보조금과 중풍 든 노인을 간병하며 받는 돈이 수입의 전부인 그녀는 손자가 밥 먹는 모습이 제일 행복하다는 평범한 이웃집 할머니다. 하지만 동시에 그녀는 아직도 레이스 달린 옷과 모자를 즐겨 쓰고 꽃을 좋아하는 ‘아름다움’의 세계에 속한 사람이기도 하다. 그녀가 문화 강좌에서 시를 쓰고 싶어 하는 것은 어쩌면 당위의 영역인지도 모른다. 어느 날 그녀는 강물에 뛰어들어 자살한 여중생이 죽기 전 몇달간 자신의 손자를 비롯한 몇몇 남학생들에게 성폭행당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이 순간부터 그녀의 삶은 세속적이지 않은 아름다움과 일상의 도덕 사이에서 끊임없는 진자 운동을 하기 시작한다.
시는 아름다움을 말한다. 이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부조리한 세상은 시에 아름다움을 허락하지 않는다. 세계는, 일상은 시처럼 마냥 아름답지 않기에 시를 쓰고 낭독하는 금요 낭송회 모임은 어딘지 어색하고 우스꽝스럽다. 그들의 언어는 삶과 유리되어 있고, 그 사실을 알기에 젊은 시인은 술에 취해 “시는 죽어도 싸” 하고 외친다. 세상 모든 것에 감탄사를 내뱉는 아름다운 소녀 그대로인 미자(美子)의 행동과 말투 역시 어딘지 비현실적이고 과장되어 있다. 그들이 바라보는 순수와 아름다움은 공허하다. 그렇기에 미자는 성폭행당한 여학생의 엄마에게 하소연하러 찾아가는 길에 연극 같은 말투로 살구의 아름다움 따위를 말할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삶은 허공에 머무를 수만은 없다. 자신이 꽃의 아름다움을 예찬하고 있던 상대가 성폭행당한 여학생의 엄마라는 걸 깨닫는 순간 그녀의 삶은 급속도로 지상으로 끌어내려진다. <시>가 번뜩임을 발하는 순간은 바로 그런 지점에 있다.
성폭행 사건을 조용히 무마하려는 사람들은 모두 부조리와 부도덕의 세계에 묶여 있다. 그들은 가족과 정이라는 미명하에 도덕을 살해한다. <시>는 도덕과 아름다움 사이에서 진동한다. 하늘거리며 어색한 말투를 남발하던 미자는 삶이 슬쩍슬쩍 침범해 올 때마다 울분을 토하며 진득거린다. 잠든 손자를 깨워 실랑이 벌이는 장면이나 노래방에서 한껏 감정에 취해 노래하는 장면이 파괴력이 있는 것은 그런 까닭이다. 본질적으로 아름다운 그녀, 미자(美子)는 끝끝내 부도덕의 세계에 묶여 있지 못하고 아름다움과 도덕 사이에서 꺽꺽 울음을 터뜨린다. 낭송회 뒷풀이 도중 마당으로 나가 처연하게 우는 미자의 모습에 음담패설을 즐기는 형사가 묻는다. “누님, 왜 우세요. 시가 안 써져서 우세요?” 시는 꽃을 보고 쓰는 것만이 아님을 그녀가 깨닫는 순간 시는 드디어 완성된다.
<시>는 감독의 전작에 비해 훨씬 덜 불편하다. 자극적이지 않은 방식으로 일상을 그저 담담하게 길어 올리는 이창동 특유의 연출은 사건을 일일이 설명하지도 메시지를 전달하려 들지 않는다. 그러나 덜 불편한 것이 더 쉽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다 보여주지 않은 채 관객이 채워주기를 바라며 비워진 행간은 담백하지만 실은 더 많은 것을 요구한다. 그럼에도 이 쉽지 않은 관문을 통과한 관객에게 허락될 여운은 전작보다 훨씬 깊은 곳까지 울려 퍼진다. 김용택 시인이나 최문순 의원처럼 극중으로 ‘진짜’들이 불쑥 등장하는 장면이 주는 소소한 재미도 적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