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알지도 못하면서>까지 홍상수 영화의 의미규칙을 잘 알지 못한 우리들의 실패, 그 의미규칙 통제의 실패가 오히려 홍상수 영화의 핵심이다
- 의미규칙 통제의 실패
<생활의 발견>에서 경수(김상경)는 선영(추상미)의 남편과 맞닥뜨리자 “Can you speak English?"라고 하며 도망친다. 홍상수는 이후 주인공들에게 점점 영어를 말하게 한다. <여자는 남자의 미래다>에서 헌준(김태우)은 자신의 영화가 미국 교수에게 ‘점’(보석)이라고 칭찬받았다고 문호(유지태)에게 말한다. 헌준이 말한 보석의 영단어는 ‘gem’일텐데 원래 사운드인 ‘젬’이 ‘점’으로 발음될 가능성은 거의 없기 때문에, ‘점’이 ‘germ-병균’의 사운드를 연상하도록 의도한 것이다. 외국어의 의미 규칙을 통제하는 데에 아슬아슬하게 실패한 것이다. “보석은 'treasure'아냐?”라는 문호의 반론도 이 실패를 뒤집지 못하며 결국 헌준의 영화가 ‘병균’이 되어버리는 것을 막지 못한다. 의미규칙 통제권의 박탈, 그로 인한 소외는 홍상수 영화에서 분명 존재한다. 홍상수는 <잘 알지도 못하면서>에서 김태우에게 더 유창하게 영어를 말하게 한다. 여기서 김태우가 영어의 의미규칙 통제에 다시 실패하면 그로 인한 소외는 심화된다.
구경남(김태우)은 영화제 관계자들과 함께 극장에 당장 가지 못한다. 극장 근처의 회식에는 참석하겠다고 하는 경남에게 일행인 외국인감독은 “Aren't you coming now?”라고 묻는다. 경남은 대답한다. “I'm not going now". 간단한 문장들로 영어를 잘 통제해온 경남이 말한 마지막 영어 문장. ‘going과 coming 중 무엇이 맞느냐’에 대한 갈등은 문장을 뒤흔들며 바로 뒤따른다. 그는 영어의 통제에 실패한 것인가, 성공한 것인가? go와 come은 그 이동의 의미규칙이 한국어와 달라 구별이 쉽지 않다. 이 짧은 단어들의 혼란은 의미의 최종적 결정 권한에서 김태우가 소외된 것으로 느끼게 하며 그 소외 상태는 스크린의 경계를 넘어 관객도 당사자가 된다. 이는 홍상수가 영화 안팎을 하나로 통합한 사례다. 그 사례 중 대표적인 것은 <해변의 여인>에서 진돗개가 구형 프라이드에 의해 버려지듯, 마지막 테이크에 완전히 같은 구도로 유사 프라이드인 고현정의 마티즈2에 의해 버려지는 자리에 관객을 가져다놓아 ‘개(dog)’로서 배치해두는 상황이다. 이 장면에서 두 남자가 등장해 모래사장에 빠진 고현정을 돕는다. 한명은 김태우처럼 안경을 쓰고 있고 다른 한명은 김승우처럼 맨얼굴이다. 그 두 남자와의 관계의 굴레가 끝까지 고현정을 붙잡으려 안간힘을 쓰는 것 같은 이 상황에서, 고현정은 ‘사례를 하고 싶다’고 그들에게 접근하나 홍상수는 그 두 남자를 빨리 퇴장시킴으로써 고현정을 그 반복의 위기로부터 간신히 비켜나가게 한다. 대신 화면 안쪽으로 사라져가는 마티즈2에 의해 관객이 모래사장에 버려지게 함으로써 스크린이라는 장벽을 넘어 영화와 관객의 공간을 하나로 통합한다. 관객은 모래사장에 빠져 허우적대거나 자기 운명으로부터 영원히 반복될지도 모르는 소외를 겪어야 할 것이다. 이 장면을 두고 ‘홍상수가 인간을 처음으로 긍정적으로 묘사했다’고 말하는 것은 홍상수가 그렇게 했다고 생각함으로써 홍상수 영화에 대해 해석 결정권을 회복하고 싶은 욕망을 확인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행위와 사고의 규칙 중 가장 기초적인 언어라는 의미 규칙, 한국어와 외국어, 그 복수의 의미규칙들 간의 어긋남, 이것을 홍상수는 여러 방법으로 자신의 영화들에서 ‘반죽’한다. <밤과낮>에서 성남(김영호)은 벤치에 앉아 외국곡인 ‘매기의 추억’의 한국어 번안 노래를 듣는다. 그 옆에서 외국인들은 태극권 같은 동양의 운동을 하고 있다. 이는 각각 자신들에게 속하지 않은 의미규칙을 통제하기 위한 노력이다. 그러나 그것은 성남이 손에 든 싸구려 라디오처럼 조악한 음질이거나 무술 초보자들의 몸짓에서 보듯 뭔가 어설프다. <극장전>에서 상원(이기우)은 영실(엄지원)과 섹스를 하려 하지만 잘 안 된다. 화장실에 가려고 여관방문을 열자 계단이 나오는데 거기서 백인 여성이 한국어로 “사과 하나 드실래요?”라고 말한다. 우리는 백인여성을 보는 즉시 그녀가 외국어를 말할 것이라 기대하지만 그녀는 한국어를 말한다. 사전에 기대되는 의미규칙이 그 실현에 있어서 배반될 때 우리는 갑자기 규칙을 통제할 수 없도록 버려지는 상황에 직면한다. 상원이 기대하는 규칙과 외국인 여성에 의해 실현되는 규칙은 반대로 엇갈린다. 따라서 상원은 여관방문을 열기 전, 영실과의 섹스가 자신이 기대한 규칙대로는 잘 안 됐기 때문에 섹스의 실행 규칙을 반대로 바꿔야 한다. 이 장면 후 정확히 같은 구도와 화면사이즈로 상원이 영실의 젖가슴을 잡으며 섹스를 재시도하는 클로즈업이 이어진다. 이번에 상원의 손은 앞에서와 반대쪽 젖가슴을 잡는다. 백인여성의 외국어 발화에 대한 기대가 한국어 발화로 뒤집어져 그 규칙의 통제권이 박탈당한 상원으로서 그 반대 위치는 당연한 선택이다. 그러나 이전과는 반대쪽으로 쓰러지며 다시 섹스에 실패한다. 이전의 섹스규칙을 뒤집어 반대로 실행하지만 여전히 실패는 극복되지 않는다.
이렇게 홍상수의 영화에서는 현재 상황에 잠재된 의미규칙을 인물들이 통제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따라서 그 소외로부터 탈출해 통제권을 자신들에게 가져오기 위해 인물들이 안간힘을 쓰는 눈물겨운 모습이 의도적 대사로 나온다. <극장전>에서 상원은 영실에게 “우리 섹스하지 말자”라고 하지만 그들 관계의 의미를 규정하는 규칙인 섹스를 제거하는 것은 홍상수 영화에서는 존재하는 모든 것을 무(無)로 돌릴 때만 가능하다. <해변의 여인>에서 선희(송선미)는 중래(김승우)에게 갑자기 “감독님하고는 섹스 안 해요”라고 하면서 바다를 향해 “사랑해요!”라고 외친다. 남녀인 그들이 밤에 펜션을 뒤에 두고 해변에 서는 순간 펜션은 절대적으로 그들의 이동 목적지로 성립되면서 그들 사이에 섹스는 강제적으로 침투하게 된다. 펜션 이외의 이동 방향은 해변과 수평으로 걷거나 해변의 경계선을 넘어 바다로 들어가는 것이다. 그러나 해변과 수평으로 이동하면 그들은 영원히 돌아가는 것이 불가능하거나 상황의 미해결인 채로 방황하게 되고, 펜션의 반대방향인 바다로 이동하면 그것은 곧 죽음을 의미한다. 이 죽음은 홍상수 영화에서 모든 문제의 ‘클리어(중래의 대사)’하고 영원한 해결책으로 제시되나 거의 실행되지 못하는 어떤 것이다.(<잘알지도 못하면서>에서 구경남은 바다 쪽으로 ‘다 된 밥’을 제쳐두고 달려가거나 풀장 앞에 앉아 ‘정말 물에 들어가고 싶다’고 말한다. 그러나 결국 들어가지 않는다.) 그렇게 그들은 섹스를 피할 수 없다. 그들이 섹스를 피하는 방법은 죽음의 경계선을 넘을지를 영원히 결단하지 못하고 해변의 경계선과 평행하게 방황하거나, 경계선을 넘어 바다에 빠져 죽는 것이다. 섹스에 실패하거나 피함으로써 그것이 죽음으로 이어진 경우는 <밤과낮>에서 성남의 옛 애인 민선(김유진)의 자살이 거의 유일했다. 곧 섹스는 그들 관계를 지배하는 규칙이 되고 그들은 이를 막을 수 없다. 이런 규칙의 지배로부터 벗어나보기 위해 ‘섹스하지 않을 것’이라 다짐하고, (짐승들은 말할 수 없는) 언어로 ‘사랑해요’라고 말하지만 그것은 ‘우리의 사이에 섹스가 놓여있고 그것을 피할 수 없다’라는 것의 다른 표현에 지나지 않는다. 혹은 의미의 실효성이 없는 텅 빈 소리만이 남으면서 그것이 마치 짐승들의 짖는 소리처럼 들리게 된다.(<여자는 남자의 미래다>에서 헌준이 술에 취해 말하는 “(담뱃불로) 지져줘”는 결국 ‘짖어달라’는 것인데 그것만이 홍상수가 보기에 말을 통해 우리의 본질을 드러내는 유일한 방식이다) 다시 말하지만 홍상수 영화에서 소외는 극복될 수 없다.
- 홍상수가 제시하는 양천수라는 해결책과 하정우의 눈물
<잘 알지도 못하면서>라는 제목을 들으면 누구나 직접적으로 반응한다. 이전의 모든 영화는 제목이 어떤 대상을 3인칭적 위치에 놓고 있다. 그러나 ‘잘 알지도 못하면서’라는 제목만이 우리에게 2인칭적으로 방향을 돌려 이야기하고 있다. 그런 면에서 홍상수가 <잘 알지도 못하면서>에서 관객에게 어떤 메시지를 ‘알게 하려고’ 시도했는가를 생각해보는 것은 유의미하다. 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마치 선(禪)과도 같은 무념적 순응에 대한 요구가 느껴지는데 이전 홍상수 영화에서는 경험할 수 없었던 것이다. 고순(고현정)의 ‘있는 그대로 용납하는 양천수(문창길)’에 대한 언급, ‘아는 만큼만 안다고 하라’는 요구, 이어지는 햇볕이 반사되는 잔잔한 바다의 테이크, 이들의 조합은 모든 홍상수 영화 중에서도 매우 특별하다. 관객이 지금까지의 홍상수 영화에서 겪은 격렬한 소외 문제에 대해, 우리의 능력 부재라는 한계를 그대로 인정하는 것이 모든 혼란과 방황을 잠재울 수 있는 유일한 해결책이라고 하는듯한 강한 잔상을 준다. 홍상수의 이전의 어떤 영화도 그런 식으로 마무리된 적은 없다. 따라서 <잘 알지도 못하면서> 다음의 <하하하>는 큰 변화가 있을지도 모른다.
전반부에서 구경남 자신은 술에 취해 강간이나 화간을 하지 않았지만 그 책임을 공현희(엄지원)와 부상용(공형진)에게 추궁당한다. 구경남은 그 상황의 반복을 막기 위해 고순의 집에 초대받아서 필사적으로 숙취해소에 좋은 콩나물국을 먹는다. 그러나 홍상수 영화에서 언제나 그렇듯 섹스를 피해보려는 노력은 수포로 돌아간다. 고순은 경남에게 편지를 보내고 그들은 섹스를 하게 된다. 양천수의 동네후배(하정우)는 이 현장을 붙잡아 양천수에게 알린다. 영화에서 양천수가 최초로 등장할 때 구경남은 여학생에게 사인을 해주고 있다. 그건 앞에서 부상용을 만날 때도 그랬다. 양천수가 부상용이라는 죽음을 왔다갔다 하는 ‘귀신’의 자리에 등장한다면 양천수도 역시 귀신인가? 결론부터 말하면 양천수는 신(神)에 가깝다. 홍상수 영화에서 물(水)과 하늘(天)은 모든 방황을 무(無)로 돌리는 지점이었으며 풀과 나무는 <해변의 여인>에서 중래가 절을 하는 초월적 대상이었다. 마치 개가 공을 갖고 놀듯 혼자 축구를 하는 경남이 (고국장(유준상)은 경남에게 전화로 ‘개새끼’라는 말을 뱉는다) 풀숲을 배경으로 약초밥을 먹는 것은 마치 ‘개밥에 도토리’의 합일 불가능의 의미를 실현한 것처럼 보이기에 그 행위가 마치 풀과의 합일을 향한 애처로운 기도와 같다. 그런데 양천수(天水)는 낫으로 그 풀을 자르는 이다. 그는 다른 이들과는 달리 풀을 통제하는 초월성이 있다. 하정우가 낫으로 경남을 위협할 때 신의 도구를 대리하는 사도로서 양천수의 일부라고 할 것이다. 그런데 양천수는 부상용의 반복이다. 부상용의 폭력은 양천수의 일부인 하정우에게서 재현된다. 하정우는 부상용의 더러운 부분만이 분리돼 태어난 자다. 양천수가 “자네 말 그렇게 하면 안 돼 같은 사람인데...내가 걱정하지 말라고 그랬다고 그래”라며 상황을 초월하고 용납할 때, 그는 “너무 더럽습니다. 너무 억울합니다”라며 서럽게 운다. 눈물의 원인을 ‘하정우가 고순을 범하고 싶었다’로 삼는 것은 이 대사의 표층만을 말하는 것이다. 자신의 더러움을 초월하거나 통제할 수 없는 무력함, 양천수가 극복한 더러움인 자신에 대한 혐오, 더러움과 함께 분리돼 내버려진듯한 억울함, 죽음의 경계선을 넘기 전에는 무한히 반복될 무거운 소외의 비장감...이 눈물 장면이 영화 전체에서 가장 무력하게 가슴을 아프게 하는 것은 여기에 그 무력함에 대한 홍상수의 연민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홍상수는 이 연민의 순간에도 줌을 한다. 그것은 홍상수의 냉혹함이다.
홍상수는 세상을 따뜻하게 바라본 적이 없고, 인간이 존재의 한계를 극복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단지 그 한계를 받아들이는 방법밖에 없다. 양천수를 통해, ‘아는 만큼만 안다고 하고 있는 그대로를 용납하는’ 방법을 제시한 것이다. 그것만이 의미규칙 통제 실패와 무력함에 대해서 우리가 소외되지 않는 ‘클리어’한 혹은 ‘만사형통’의 방법이다. 양천수를 등장시키고 고순이 그에 대한 해설을 하고 마지막에 카메라가 바다를 바라볼 때 이는 모든 것이 정리되면서 홍상수 영화의 전체 여정 중 특정한 시기가 끝나는 것처럼 여겨지는 바가 있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 이후의 홍상수 영화는 어쩌면 전혀 다를지도 모른다. 그러나 항상 그랬던 것처럼 그가 우리의 의미규칙 통제 안에 머무르지는 않을 것이다. 그 소외에 대해 자기 존재를 의심하며 방황할 것인가 아니면 그 소외를 우리 존재의 일부로서 껴안을 것인가는 홍상수 영화를 보는 우리 각자의 선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