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년 동안 미국에서만 작업했던 빔 벤더스가 다시 유럽으로 돌아왔다. 이번엔 시작부터 그의 고향인 뒤셀도르프가 배경이다. 그런데 이 독일 마을에서 벌어지는 핀의 일상엔 한 가지 특징이 있다. 모던한 아파트 벽면에는 달리의 일그러진 시계 모양이 떠다니고, 그가 상상하는 죽음의 이미지로 브뉘엘의 <황금시대> 속 스켈레톤이 튀어나온다. 그리고 사진을 찍다 공원에서 만난 노신사는 마그리트의 중절모를 쓰고 있는데, 그 사내는 지금 상황의 극복을 위해 그에게 팔레르모로 갈 것을 권유한다. 막상 이탈리아에 도착해서 핀은 보슈의 영향이 분명한 프레스코화와 맞닥뜨리는데, 이 모든 사건은 우연인 듯 연계되어 진행된다.
자막을 통해 벤더스는 이 영화를 베리만과 안토니오니에게 바친다고 말한다. 그들은 그가 영화를 준비하던 2007년 7월31일의 하루 동안 차례로 죽음을 맞았다. 당시 벤더스는 팔레르모 근처의 간지(Gangi) 지역을 헌팅 중이었다고 하는데, 그러니 도입부부터 초현실주의적 이미지가 나열되는 이 영화를 설명하기 위해 우리는 초현실주의의 자동기술법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벤더스가 영화를 구상하며 우연적 연상에 따르려 했던 것은 분명해 보이는데, 핀의 롤모델인 안드레아 구르스키는 뒤셀도르프 출신이며, 캐스팅된 배우 대부분이 이전에 알았거나 혹은 우연히 알게 된 인물들이다. 벤더스의 기존 작품들이 낭만주의적 범주로 설명된 것을 떠올릴 때 이는 제법 큰 변화이다.
하지만 영상의 아름다움이나 사건의 개념이 잘 정돈된 반면, 스토리 라인과 캐릭터의 상투성은 지적해야 할 문제로 남는다. 최근 벤더스의 필모그래피에 갈증을 느낀 관객이라면 이번 역시 예외는 아닐 것 같다. 표면적으로 <팔레르모 슈팅>은 베리만의 <제7의 봉인>, 프리츠 랑의 <운명> 등에 견줄 수 있지만 그들이 가지는 근본적 고민이나 초월성, 깊이감을 동일하게 주지는 못한다. 현대적 화면이 원인은 아니다. 가장 큰 이유는 데니스 호퍼가 연기한 ‘죽음의 신’이 시각적 청량감조차 주지 못한 통속적 캐릭터로 머문 데 있다. 마지막 시퀀스, 죽음의 신과 핀의 대립에서 관객은 메피스토펠레스적 카리스마가 아닌 단순한 사신의 이미지로 호퍼를 바라보게 된다. 지지난해 칸에서의 격양된 양론을 떠올리며 감상하면 더 재미있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