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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구절을 그대로 옮겨놓은 듯한 영웅의 여정 <일라이>
장영엽 2010-04-14

synopsis 대폭발로부터 30년이 지난, 2043년의 지구. 자원은 희박하고, 도시는 약탈자와 악당으로 가득하다. 방랑자 일라이(덴젤 워싱턴)는 신의 계시를 받들어 인류의 미래에 중요한 어떤 책을 동부에서 서부로 옮기는 중이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악당 카네기(게리 올드먼)는 책을 빼앗기 위해 일라이를 뒤쫓는다. 이들의 싸움에 카네기와 동거하던 맹인 여자의 딸, 솔라라(밀라 쿠니스)도 가담한다. 카네기의 협박에 못 이겨 일라이를 염탐하던 솔라라는 점점 일라이에 동조하기 시작한다.

문명은 폭발과 함께 사라지고, 살아남은 자들은 서로를 죽이는 잿빛 도시. 2043년의 지구가 배경인 <일라이>의 풍경은 종말을 맞이한 <더 로드>의 그것과 맞닿아 있다. 다만 이 영화의 주인공 일라이에겐 두려울 것이 없다. ‘어둠의 골짜기를 간다 하여도 신께서 함께 계시기’ 때문이다. 그런 일라이 앞에서 그의 책을 탐하는 악당들은 허수아비처럼 쓰러진다. 이처럼 성경 구절을 그대로 옮겨놓은 듯한 영웅의 여정이 바로 <일라이>의 줄거리이며, 그 이야기에 걸맞게 일라이가 지키려 하는 책도 성경이다. 어쩌면 ‘일라이’라는 이름 또한 ‘전투의 예언자’로 불리는 예언자 엘리야의 줄임말인지도 모르겠다. 그 짐작을 과장이라 할 수 없을 만큼 영화는 노골적으로 종교적인 색채를 드러낸다.

이 영화의 종교적인 면을 탓하려는 건 아니다. 문제는 누구나 다 아는 얘기를 새로운 것처럼 들려주는 연출의 나태함에 있다. 형제감독 앨버트 휴스와 앨런 휴스는 지극히 1차원적인 방식으로 이야기와 캐릭터를 풀어냈다. “보이는 게 아니라 믿음으로 움직인다”는 일라이나 “구하라, 그럼 얻을 것이다”라고 외치는 카네기는 평면적인 선과 악의 대립이며, 성경은 그 어떤 부연설명도 없이 당연하게 고귀하게 여겨야 할 물건으로 설정됐다. 이 신선할 것 없는 이야기를 두어 시간 동안 참고 봐야 하는 것이 고역이다. <씬시티>처럼 그래픽 노블을 영상으로 옮긴 것 같은 세련된 흑백화면과 슬로모션으로 묘사된 액션신이 그나마 영화의 숨통을 틔워주지만, 이 영화의 진부한 설정을 상쇄하지는 못한다. <보스턴 글로브>는 <일라이>에 대해 “<더 로드>와 비교해 줄거리는 두배, 폭약은 네배 정도 많지만 지능은 그 절반”이라고 꼬집었다. 최근 쏟아지는 종말영화 중에서 이 작품이 차지하는 위치는, 딱 그만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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