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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에는 없고 TV에는 있는 것?
이화정 2010-04-08

TV의 인기 비결을 훔치다

<추노>

충무로인들에게 물었다. “요즘 TV 보시나요?” 대답은 이랬다. “가끔 보긴 해요. 아주 작정하고 보진 않죠. TV는 항상 틀어놓으니까요”라는 고전적인 방법의 시청자부터, “TV 아주 열심히 봐요. 요즘 버라이어티 프로그램들 재밌잖아요”라는 충실한 TV 시청자에다, “집에 TV도 없는걸요. 5년 동안 TV는 한번도 보지 않았어요”라고 하는 TV 불신론자도 섞여 있었다. ‘TV를 보느냐’는 질문은 물론, 충무로인들의 단순 시청 여부를 알기 위함이 아니었다. <지붕 뚫고 하이킥!>(이하 <지붕킥>)의 종영이 어느 때보다 뜨거운 논쟁거리를 낳고, <추노>의 액션신이 ‘영화보다 더 흥미롭다’는 찬사를 들으며, <파스타>의 ‘멜로야 말로 지금 세대의 진정한 사랑방식’이라는 평가를 듣는 지금, 우린 그들에게 묻고 싶었다. “그럼, 충무로가 생산하는 상업영화보다 TV가 더 영화적이라는 말인가요?” 만약 그렇다면 시청자가 관객이 될 일은 전무해 보였다. 누군들 영화 같은 ‘무료’ TV를 두고, 8천원 관람료와 팝콘료와 차비까지 써가며 극장을 찾는 ‘낭비’를 하겠는가. 한국상업영화가 TV에 빼앗겼을지도 모를 그 ‘관객’들을 되찾으려면, TV에서 답을 찾아야 했다. “TV, 그 인기의 비결이 무엇인가요?”

비결1. 언제 언디서든 ‘다시 보기’

대답은 의외로 간단한 데서 찾을 수 있는 듯했다. “TV는 다시 볼 수 있잖아요.” 뒤늦게 <지붕킥>을 보고 재미를 느낀 뒤, 놓친 부분을 ‘다시 보기’하면서 <하이킥>의 팬이 됐다는 김현석 감독. 그는 본방만이 살길이었던 과거와 달리, 무한증폭된 TV의 접근성이 지금의 결과를 낳은 게 아닐까라는 의견을 내놓았다. 최근 디지털영화 <인플루언스>를 제작한 원동연 대표 역시 IPTV의 기여도를 평가한다. “영화와 TV는 관여도가 다르다. TV는 미니시리즈부터 버라이어티까지 제 맘대로 공짜로 골라볼 수 있는데 선택하고 구매해야 하는 영화는 너무 고관람 제품인 것이다.” 변영주 감독은 “극장의 입장료 할인이 없어진 게 결정적이었다”며 IMF 시절보다 20대가 극장에서 돈을 쓰는 데 더 인색해진 지금의 상황을 분석한다. “신기하게도 지하철을 타보면 그 작은 화면으로 모두 TV를 보고 있다. 미드가 시발점이었는데, 아무때나 양질의 콘텐츠를 적은 돈으로 다운로드받을 수 있는 마당에 누가 극장에 오겠는가.” 산업적인 측면으로 접근하고 보니 극장이 갑자기 멀티플렉스의 어두컴컴한 배경 속으로 까마득히 침잠해버리는 이미지가 연상됐다.

비결2. 욕망에 솔직하다

물론 TV의 인기요인을 접근도의 탓으로 돌려버리는 것만큼 영화인들에게 속 편한 대답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과연 관객은 돈내기 싫어서 영화 대신 TV를 선택한 걸까? 그건 명백히 기대치가 낮으니 조금만 보여줘도 만족한다는, 다분히 시청자 비하적인 발언이다. 시청자의 선택은 그보다 현명하다. 청년필름의 김조광수 대표는 문화의 최전방인 행세를 하면서도 앞서 나가지 못하는 영화의 보수성을 지적한다. “방송에서 버젓이 하는 이야기를 정작 영화는 하지 못한다. 김수현 작가가 TV에서 퀴어드라마를 표방한 마당에, <아빠가 여자를 좋아해>는 내용은 퀴어임에도, 트랜스젠더를 남장여자로 만드는 우스꽝스러움을 연출했다.” <국가대표>를 연출한 김용화 감독은 “자기 욕망을 솔직하게 드러내는 <추노>와 <지붕킥>은 안일하게 기획하고 만드는 몇몇 상업영화에 비해 훨씬 과감하다”는 점을 강조했다. 원동연 대표 역시 “TV가 선정적이고 자극적인 단점은 있지만, 솔직한 건 사실이다. <남자의 자격>에서 아저씨들이 ‘소녀시대’ 공연에 대놓고 환호하는 건 솔직한 욕망이다. TV는 그게 부끄러운 일이 아니란 걸 가르쳐줬다”며 “TV가 영화처럼 가르치려고 들거나 의미만 찾으려고 하지 않는다”라는 점을 지적한다. 이현승 감독은 섹슈얼리티를 강조한 <추노>의 솔직함을 평가하며, “예술적인 자의식이나 아웃사이더적인 기질이 영화를 만드는 자들의 특징인 건 맞다. 그걸 모두 죽이라는 건 아니지만, 산업적으로 봤을 때 좋은 점은 차용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라는 반성을 내비친다.

비결3. 새로운 시도를 용인한다

그렇다고 무턱대고 연출자에게 이 모든 화살을 돌리라는 말은 아니다. 이쯤에서 트렌드와 솔직함을 잃어버린 지금의 영화계에 대한 책임을 조곤조곤 따져 물을 필요가 있다. <연애시대>를 연출하며 ‘영화 같은 TV드라마’의 시대를 연 한지승 감독은 말한다. “예전에는 영화에 정책 검열이라는 창작자의 적이 있었지만, 지금은 자본의 검열이라는 보이지 않는 적이 존재한다. 상업영화가 인풋이 얼마면 아웃풋이 얼마인가에만 관심이 쏠려 있다면 감독의 재능이나 실험적 의식을 펼치기란 전무하다.” 그는 보수적이라고 알려진 방송계가 오히려 탄력적인 창작활동을 가능하게 해준다고 단언한다. “방송은 기획만 인정되고 통과되면 감독이 할 수 있는 역량이 영화보다 훨씬 많은 매체다. 제작시간이 빠듯하다는 단점이 외부의 개입을 막지 못하는 실질적 이유가 되기도 한다.” 김조광수 대표는 ‘안전성’에 기대는 상업영화의 불안이 영화계의 부진과 무관하지 않다고 말한다. “지금처럼 프로듀서가 쇠퇴하고 투자사들이 우세한 구도라면 영화는 어쩔 수 없이 보수적으로 변할 수밖에 없다. 투자자들의 말은 똑같다. ‘이런 거 하지 말라, 위험하다. 안전한 걸 해라.’ 조금이라도 수익을 내려면 이야기도 안전빵, 캐스팅도 안전빵일 수밖에 없게 되는 거다.” 반박은 가능하다. 어린이부터 어른까지 모두 봐야 하는 예능 프로그램과 안방극장은 단 한번도 안전성을 염두에 두지 않은 적이 없다. KBS 예능 프로그램 <1박2일>의 나영석 PD의 말을 빌리자면 이렇다. “일요일 오후라면, 전 세대를 아우르는 오락 프로그램을 만들어야 하는 게 불문율이다. 타깃은 확실하다. 재미를 약간 양보하더라도 60대 우리 아버지도 이해할 수 있는가가 절체절명의 문제가 된다. 순식간에 지나가는 자막 한줄에도 타깃이 정확히 반영된다. 그에 반해 상업영화의 기준은 애매하다. 마니아층을 만족시킨다는 관객층을 정해놓고, 한편으론 ‘이거 잘돼서 대박났으면 좋겠다’는 요행수도 함께 바란다. 예술적인 인정을 원하는지, 아님 상업적인 흥행을 원하는 건지 기준을 명확히 하지 않고는 늘 애매한 결과를 가져올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비결4. 시대의 공기를 담아낸다

사정이 이렇고 보면, 상업영화도 방송처럼 트렌드를 습득하고 트렌드를 반영하는 관객과의 호흡창구로 기능하는 것이 올바른 해답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소녀시대’의 유리를 소재로 한 대본이 당장 개봉을 할 시점인 6개월 뒤에 어떻게 될지 모르는 게’ 영화라는 매체에 주어진 현실적 제약이다. 최근 <반가운 살인자>를 기획한 어지연 PD 역시 같은 고민에 봉착해 있다. “특히 트렌드에 민감해지는 로맨틱 멜로 장르 같은 경우, TV와의 경쟁력에서 뒤처지는 게 사실이다. 그 해결책을 찾는 것이야말로 기획단계의 최우선 고민이 된다.” 관객이 반응할 트렌드만 좇다간, 기획부터 개봉까지 1~2년의 시간이 걸리는 영화는 무용지물의 것이 돼버리기 십상이다. 박흥식 감독은 “보는 자와의 인터랙티브한 교감이 창작에 걸림돌이 되기도 하지만, 지금의 TV에서처럼 장점이 될 수도 있다. 그런데 영화는 기획에서 개발에 이르는 긴 시간 동안 그런 쌍방의 교감을 얻을 창구가 전무하다. 곧 창작자의 자기 주관만이 반영되며 관객의 기호와 멀어지는 것이다.”라고 말한다. 영화가 트렌드를 앞서야 한다는 분석은 어제 오늘 일이 아니다. 마술피리의 오기민 대표는, “<괴물>이나 <왕의 남자>같이 한국상업영화계에 전무후무한 성공을 안겨준 작품은 트렌드와 무관했음”을 정확하게 지적하고 있다. <추격자> 역시 트렌드와 시장의 불문율을 거슬렀다는 점에서(68-69페이지 장항준 감독 인터뷰 참조) 눈여겨볼 만하다. 김현석 감독은 “영화가 더 우월한 매체다, 라는 말은 아니다. TV가 트렌드를 빠르게 반영한 자라나 갭 같은 리테일숍의 패스트 의상이라면, 영화는 디자이너의 작품에 가깝다”고 말한다. 변영주 감독 역시 “현실 반영의 문제는 기본전제다. 그러나 영화는 거기서 더 한발 나아간 당대적 고민을 풀어줘야 한다”며 연출자로서의 고민을 털어놓는다.

비결5. 대본에 적극 투자한다

많은 영화인들이 그 해결책으로 시나리오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드라마 <연애시대>와 영화 <백야행: 하얀 어둠 속을 걷다> 등을 오가며 시나리오를 집필한 박연선 작가는 “TV가 재밌어졌다고 말하는 건 영화에서 배워온 측면이 다분히 있기 때문이다. 드라마는 여기에 최소 16시간(16부)을 쌓아온 시나리오의 힘이 더해진다”며 TV에 있어서 시나리오의 역할을 강조한다. 문제는 방송가에서는 시나리오작가의 중요성을 평가하고 처우가 확실한 반면, 영화계는 작가군의 육성 기반이 거의 없다는 점이다. 영화 <미스터 소크라테스>의 감독이자, MBC 시트콤 <볼수록 매력만점>의 메인 작가로 활동하고 있는 최진원 작가는 영화계 시나리오의 부족을 가장 절실하게 경험한 경우다. “방송은 제작비의 상당부분을 대본작업에 투자한다. 그러니 전문작가들이 방송쪽으로 몰려들 수밖에 없다. 물론, 영화 시나리오 역시 검토 작업에서 많은 이들이 보고 의견을 반영한다. 그러나 전문인력이 아닌데서 오는 낭비는 충분히 생각해봐야 할 문제다”라고 전한다. 그는 “영화계 시나리오의 부족은 결국 영화 시스템 자체가 자본을 투자하는 미래지향적인 구조가 되지 않으면서 발생한 문제”라며 “메이저 회사들이 정작 모험과 투자는 하지 않고 시나리오에 대한 모험을 중소제작자에만 떠안긴 점”을 지적한다.

상업영화의 탈출구는 이미 여럿 영화인들을 모자이크한 대답 속에 모두 존재하고 있는지 모른다. TV와의 단순비교를 가장하고 나섰지만, 우리의 질문은 결국 지금의 상업영화가 가진 문제점들을 도출해보자는 것이었다. 가장 큰 문제점으로 부각된 시나리오에 관한 더 자세한 해결책은 다음호에서 찾아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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