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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오성] 그는 링을 떠나지 않았다
김도훈 사진 오계옥 2010-04-05

<반가운 살인자> 유오성

유오성은 와이셔츠에 양복 한벌 걸치고 스튜디오로 들어섰다. 손에는 휴대폰 하나 달랑 들었다. 잡지의 커버를 진행하기 위해서는 세벌 정도의 의상이 필요하다. 여배우들이야 원체 까다롭다. 의상 갈아입는 시간 때문에 대화를 나눌 시간이 부족할 때도 있다. 남자배우들도 마찬가지다. 메트로섹슈얼 시대 아닌가. 아니, 메트로섹슈얼이 아닌 중견배우들도 맞춤 슈트를 양손에 짊어진 스타일리스트 두어명을 대동하고 스튜디오로 오는 시대다. 유오성은 단벌 양복 하나 걸쳤다. 매니저도, 스타일리스트도 없다. “어쩌죠. 제가 요새는 혼자 다니거든요. 생각해보니 너무 무성의한 것 같네요.” 생각해보니 상관없을 것 같다. 찍고 싶었던 건 화려한 맞춤 슈트를 입은 유오성이 아니라 그냥 유오성이다. <챔피언>(2002) 이후 8년 만에 <씨네21>의 지면에 등장하는, 배우 유오성.

유오성은 오랫동안 사라졌다. 간간이 얼굴을 내보인 <각설탕>(2006)과 독립영화 <감자 심포니>(2009)는 우정출연이었다. 드라마가 몇편 있긴 했다. 타이틀 롤을 맡았던 <장길산>(2004)은 못 미더운 복귀작이었다. <투명인간 최장수>(2006)의 자그마한 성공은 좀 부족했다. 그러면서 충무로는 유오성의 이름을 거의 지웠다. <챔피언>을 좌초시킨 법정 싸움과 <도마 안중근>(2004)을 둘러싼 진흙탕 싸움에서 유오성은 패했다. 전쟁을 둘러싼 감독들은 상처 하나 없이 빠져나왔으나 이미지를 업의 원천으로 짊어진 배우로서는 그럴 수가 없었을 거다. 생각해보면 아이러니한 일이다. 우리는 충무로의 남자다움을 상징하던 두 배우, 유오성과 최민식을 영화와 관계없는 이미지의 정쟁으로 거의 잃을 뻔했다. <씨네21>의 10년 전 설문조사에서 최민식과 유오성은 나란히 ‘좋아하는 한국 남자배우’ 1, 2위를 차지했다. 배우의 이미지란 종종 허탈한 허상이다.

억울하냐? 억울해? 그게 바로 인생이다!

6년 만의 주연작 <반가운 살인자>에서 유오성은 백수 영석이다. 사업을 말아먹고 집을 나와 몇년간 실종자로 살다가 다시 귀가한 패배자다. 아내는 이미 다른 남자와 결혼할 생각이고, 딸은 아빠와 말을 섞으려고 하지 않는다. 그러던 어느 날 영석의 동네에서 비오는 날 여자들을 타깃으로 삼은 연쇄살인사건이 벌어진다. 영석은 자신의 생명보험금을 수혜받을 딸을 위해서 목숨을 내놓고 연쇄살인마를 쫓기 시작한다. <반가운 살인자>의 영석 역할은 드라마 <투명인간 최장수>의 연장선이다. 그러나 드라마를 보지 않은 영화팬들에게 영석은 단 한번도 유오성으로부터 기대치 않았던 역할일 것이다. <비트> <친구> <챔피언> <>로부터 우리가 상상하는 유오성의 영화적 아우라는 상처입고 무리에서 떨어져나간 늑대처럼 고독한 남자다. <반가운 살인자>의 유오성은 산산조각난 가족을 끝끝내 이어붙이지 못하는, 그래도 마지막으로 아비 노릇 한번 제대로 해보고 죽으려 기를 쓰는, 처량하고 쓸모없는 중년 남자다.

첫 장면을 찍으며 유오성은 눈물을 흘렸다. “첫날… 그랬어요. 울컥했어요. 많은 길을 돌아서 다시 이 자리에 섰잖아요. 글썽거리게 되더라고요. 결국 첫날 첫 장면은 다시 촬영했어요. 오랜만에 만난 현장이고 또 첫날이라. 붕… 떠 있었던 것 같아요. 멍… 하게.” 게다가 <반가운 살인자>는 코미디다. 유오성과 코미디. 돌이켜보면 그는 한번도 코미디를 해본 적이 없다. 영화 자체가 감독만큼이나 코미디인 <도마 안중근>은 일단 제쳐두자. <주유소 습격사건>도 온전한 의미로서의 코미디는 아니었다. <반가운 살인자>에서 유오성은 심지어 (범인을 잡기 위해서라는 이유긴 하지만) 팬티스타킹을 우스꽝스럽게 당겨 올리고 가발을 쓰고 마스카라를 칠하며 여장까지 해낸다. 그런데도 포복절도는 없다. 유오성의 코미디는 어쩐지 부조리하다. 캐릭터와 배우의 삶이 무섭도록 겹치기 때문이다. “영화에 이런 대사가 있어요. 억울하냐? 억울해? 그게 바로 인생이다! (웃음) 시사회 끝나고 누가 그러더라고요. 너무 절절하더라고. 인간 유오성의 대사 같다고. (웃음)”

유오성은 과거의 과오들이 과한 욕심에서 비롯됐다고 고백한다. “과욕을 너무 많이 부렸습니다. 주인공으로서 대접받으려는 게 아니었어요. 오히려 주인공은 책임질 부분이 많은 거죠. 그러다보니 제가 건드릴 필요가 없는 비즈니스적인 부분까지도 예민하게 책임을 지려고 했었습니다. 다른 파트를 존중해야 하는데 당시의 저는 이렇게 생각했어요. 왜 일을 저렇게밖에 못할까? 교만했던 거죠. 너무 책임을 지겠다고 과욕을 부리다보니 교만하게 보였던 거죠. 이제는 어떻게 생각하냐고요? 나만 잘하면 된다. (웃음) 다른 사람들 역시 최선을 다하고 있는 거라는 걸 이해하고, 좀더 여유롭게 가는 거죠.” 그가 말하는 여유는 인간으로서의 여유를 의미하기도 하지만, 고르는 역할에 대한 여유이기도 하다. “남자배우들은 40대 초반까지만 해도 마초, 남자다운 역할에 대한 로망이 있습니다. 그런 역할이 배우를 잘 알려주고, 또 배우 입장에서도 연기를 잘한 것 같은 기분을 느끼게 하죠. 이젠 그런 기분을 철저하게 없앨 겁니다. 이제 원하는 건 영화가 지향하는 목표를 공감하면서, 도드라지고 싶은 욕심을 자제하면서, 양보하면서, 전체 그림을 생각하는 연기입니다.”

깐깐한, 배우로서의 고집은 그대로

그러나 그는 여전히 유오성이기도 하다. 까탈스럽고 철저하게 자기 작품에 책임을 지려 했던 완벽주의자 배우 유오성은 사라지지 않았다(그런 건 사라지면 안된다). 사실 그가 지난 몇년간 영화적 진공상태에 머물렀던 건 충무로가 그를 완전히 코너에 밀어넣고 배척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준비하던 많은 영화가 연기되고, 엎어졌다. 그러나 유오성은 들어오는 배역이라면 뭐든지 하겠다고 들러붙을 생각은 없었다. “시나리오가 제 기준에서 아닐 때는, 하지 않았어요. 영화는 시나리오의 뼈대, 감독의 신념, 이런 부분들이 명확해야 하잖아요. 고집은 여전히 있었습니다. 여전히 팽팽했죠. 그것이 제가 버틸 수 있었던 이유이기도 합니다.” 유오성은 어깨의 힘을 빼고 가슴의 응어리를 풀었지만, 깐깐한 배우로서의 고집은 하나도 버리지 않았다. 우리가 오래전 사랑했던 바로 그 유오성의 고집 말이다.

유오성은 곧 가야를 건국한 김수로 왕의 이야기를 다루는 200억원짜리 MBC 드라마 <김수로>에 출연한다. 그가 연기하는 신귀간은 운명적으로 정해진 왕 김수로에 맞서 스스로의 능력으로 왕의 자리에 오르려는 남자다. <선덕여왕>의 ‘미실’을 연상시키는 역이다. <반가운 살인자>와 <김수로>는 오랜만에 대중의 곁으로 다가가려는 유오성의 새로운 시작이 될 거다. “집사람이 그랬어요. 30대에 바닥을 겪어본 게 당신 성격상 더 나을 것 같다. 더 늙어서 다 잃어버렸다면 당신은 아마, 자살했을 거다. 맞아요. 그랬을 겁니다. 이르게 바닥으로 내려가본 게 오히려 도움이 됐어요. 이제는 배우로서 끊임없이 나가야 할 겁니다. 유오성이라는 배우가 아직 연기를 하고 있다는 사실을 납득시켜야 하니까요. 좀더 많은 대중을 만날 겁니다. 맞아요. 열심히 할 겁니다.” 유오성은 오래전에 챔피언의 자리에서 내려왔다. 그러나 링에서 내려오지는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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