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이 참 빠르다. 1년이 지났다. 10년 다이어리 없이도 지난해 이맘때가 눈에 선하다. 1년 동안 거의 매주 영화를 봤고, 격주로 글을 썼다. 이렇게 부지런해도 되나 싶을 정도로 열심히 영화를 봤다. 이렇게 원고를 빨리 줘도 되나 싶을 정도로 마감을 잘 지켰고(그러나 지금은 마감을 넘겼고), 이렇게 빨리 돌아오면 날더러 어쩌란 말이냐 싶을 정도로 순식간에 글 써야 할 순번이 돌아왔다. 그러나 그것도 이번이 마지막이다. 영화를 볼 때마다 ‘아, 이 영화로 어떤 이야기를 쓸 수 있단 말인가’라는 고민을 하느라 제대로 된 감상이 힘들었는데- 어차피 영화 이야기는 길게 쓰지도 않으면서 고민은 무슨 고민! 이라고 생각한다면 오산- 행복한 관객의 입장으로 돌아가(원고료가 없어도 행복할 수 있겠지?) 더 재미있게 영화 볼 생각을 하니 벌써부터 마음이 편안하다. 예전에는 극장에서 영화를 보며 절대 조는 일이 없었는데(아마도 1993년에 본 클로드 를르슈 감독의 <아름다운 이야기>가 마지막으로 졸았던 영화가 아닌가 싶다).
요즘엔 역시 나이가 들었는지, 조금만 재미없는 장면이 나오면 순식간에, 깜빡, 졸음이 몰려온다. 글을 쓸 걱정이 없으면 마음껏 잠들 수 있을 테니 그 또한 기쁜 일이 아니겠는가. 1993년, <아름다운 이야기>를 보고 잠이 들었다가 엔딩 크레딧과 함께 깨어났을 때, 시간과 공간을 인지하지 못하고 여기가 도대체 어디인지 몰라 한참 동안 멍하니 앉아 있었던 기억이 새삼스럽다. 사람들과 함께 앉아 있다가 나 혼자 다른 영화를 보고 나온 듯한 그 묘한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최근에는 <엘라의 계곡>을 보다가 나도 몰래 깜빡깜빡 조는 바람에 전쟁터에서 찍은 휴대전화 영상장면은 영화에서 본 것인지 꿈속에서 본 것인지 혼동될 정도였는데 이것이 또한 영화의 주제와 연결되는 것이 아니었나 싶은 자평을 억지로 해보게 된다.
DJ들의 입담을 보는 맛이 최고야
나는 극장에서 영화를 볼 때면 (잠에 빠졌든 그렇지 않든) 끝까지 앉아서 엔딩 크레딧을 확인하는 편이다. 거의 맨 마지막에 등장하는 영화 삽입곡 리스트를 보기 위해서다. 분명히 아는 노래인데 제목이 생각나지 않을 때가 많으니 사람들이 다 빠져나간 극장에 앉아서 노래와 제목을 훑어본 뒤 “아, 맞아, 그 노래였지”라며 정답을 확인해야- 이런 정신으로 문제집을 풀었다면 훨씬 나은 인생을 살고 있었을 거야! 라고 생각한다면 오산- 마음이 가뿐하다.
최근에 DVD로 본 <락앤롤 보트>를 극장에서 보았더라면 영화 삽입곡 리스트를 보느라 머리가 꺾였을지도 모르겠다. 영화에 들어간 노래가 무려 60곡이다. 로큰롤의 전성기 1966년의 이야기이며, 주인공들이 해적방송의 라디오 DJ들이니 당연한 일 같기도 하지만 많아도 너무 많다. 영화에 노래가 쓰였다기보다 한편의 긴 뮤직비디오처럼 노래를 들려주기 위해 영상을 찍은 것 같다. 내가 좋아하는 배우들이 단체로 등장하는데도(빌 나이, 필립 세이무어 호프먼, 닉 프로스트에다 에마 톰슨까지) 어쩐지 모든 게 너무 심심하고 단순해서 딱히 영화에 대해서 뭐라고 할 말이 없지만 60곡이나 되는 노래들은 참으로 주옥같다. 내가 좋아하는 킹크스에다 크림, 스몰 페이시스, 더 후, 롤링스톤스의 노래들을 상황에 맞게 갖다붙이는 걸 (듣고) 보고 있으면 DJ가 주인공인 건 확실하구나 싶다.
영화에서 제일 재미있었던 건 모든 상황을 라디오방송으로 중계하는 DJ들의 입담을 보는 것이었다. DJ들은 결혼식도 중계하고, 젊은 남녀의 첫날밤도 (문 밖에서) 중계하고, 자신들의 침몰도 직접 중계한다. 디제이들은 눈으로 보고 말로 전한다. 나 역시 문학전문 라디오방송(흠, 흠) <문장의 소리> 디제이로서 한마디 하자면, 보는 것을 말로 전할 때 어떤 방식으로 설명하는가에 따라 듣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 것을 상상할 수 있는지가 결정된다. 술자리에서 그런 농담을 나눈 적도 있다. 누군가가 말했다. “라디오에서 요가 강좌 하면 재미있을 것 같지 않아요?” 정말 재미있을 것 같다. 보여주는 대신 그 모든 동작을 말로 설명하는 거다. 요가 강좌가 끝나면 전기기타 강좌, 발레 강좌, 화재 진압 강좌를 시리즈로 들려주는 거다. 나중에 꼭 해봐야겠다.
대책없는 해피엔딩으로 용서하소서
<락앤롤 보트>의 디제이들은 모두 어린아이들이다. 철들지 않은 사람들이다. 음악을 너무 좋아하고, 노는 걸 너무 좋아하는 사람들이다. 대책없는 사람들이다. 여건이 허락한다면 그렇게 살아도 재미있겠지 싶다.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돈도 벌고, 놀기도 하는 거다. 김연수군과 나는 이미 그렇게 살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대책없는 사람들의 마지막 장면은 대책없는 해피엔딩이다. 그래서 피식, 웃음이 난다. 가끔은 대책없는 해피엔딩을 보는 것도 나쁘지 않다. 주인공들은 마지막에 이렇게 외친다. “로큰롤!” 인생은, 그렇게, 또 계속 흘러가는 거다. 대책없이 흘러가는 거다. 대책이 없더라도 재미있게 사는 건 중요하다. 나는 1년 동안 재미있었다. 혼자만 그랬나? 혹시, 내가 쓴 글 때문에 기분 나쁜 사람이 있었다면, 허술한 글 때문에 마음 상한 사람이 있었다면, 대책없는 해피엔딩으로 나를 용서해주기 바란다.
마지막 글을 쓰다가 잊고 지낸 일이 하나 떠올랐다. 칼럼을 처음 쓰던 1년 전, 김연수군은 <쌍화점>의 스포일러를 터뜨리며 나를 괴롭게 만들었다. 그때 나는 “고분고분 당하고 있지만은 않겠다”고 다짐했는데, 내가 또 성격이 워낙 좋다보니 그걸 잊고 말았다. 칼럼도 끝나는 마당에 복수나 해야겠다. 하하하. 두둥, <락앤롤 보트>에서 칼(Carl)의 아버지는 바로, … 새벽의 ‘밥’(Bob)이다. … (침묵) … 아무도 무슨 이야기인지 모르겠지? 관심이 없겠지. 그러니까, 그게 칼의 아버지가 밥이라는 게, 말하고 나니 또 이상하다. 새벽의 밥이라니, 그렇다면 야식을 말하는 것인가? 푸훗, 자, 이렇게 또 마지막으로 한번 웃어봤고요. 이상으로 저는 물러갑니다.
ps. 여기서 끝내려고 했으나 1년 전 첫 번째 칼럼을 김연수군과 내가 같이 쓴 것처럼 마지막 칼럼도 그랬으면 좋겠다는 의견이 있어, 그러기로 했다. 같이 영화를 보러 갈까 싶기도 한데, 무슨 영화를 봐야 할지는 모르겠다. 어쨌거나 다음주에 딱 한번만 더 찾아올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