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ynopsis 웨딩드레스 디자이너인 고운(송윤아)은 아홉살 먹은 딸 소라(김향기)와 단둘이 산다. 남편이 세상을 먼저 떠난 뒤 가장 역할까지 떠맡은 터라 고운은 엄마 노릇을 제대로 해본 적이 없다. 소라는 바깥일에 매달리던 엄마가 얼마 전부터 자신에게 부쩍 관심을 주는 것이 이상하다. 갑자기 발레를 배웠으면 좋겠다고 하질 않나, 학교 대신 여행을 가자고 꼬드기질 않나. 전과 달리 엄마와 함께 지내는 시간이 많아지면서 소은은 중요한 사실을 짐작하게 된다. 엄마 품에서 잠들 수 있는 시간이 많지 않음을.
뭔가 좀 이상하다. 고운은 딸 소라에게 게임기를 사준다. 뭘 고르지, 라고 묻는 딸에게 고운은 원하는 것 다 사라고, 엄마는 돈 많다고 답한다. 이튿날 고운은 오빠를 찾아가 승진 기념으로 고급승용차 선물을 해주겠다고 한다. 친구에게 떼일 뻔했던 돈을 돌려받게 된 기쁨치곤 과하다. 눈썰미있는 관객이라면 눈치챌 것이다. 고운의 삶은 얼마 남지 않았다. 영화도 이 사실을 꼭꼭 숨겨놓지 않는다. 일찌감치 털어놓는다. 고운이 위암 말기 환자이며, 뇌까지 암세포가 전이된 상태라 병원에서도 어찌할 수 없다고.
고운이 시한부 인생이라는 사실은 그다지 중요치 않다. <웨딩드레스>에서 고운의 예정된 죽음은 반전이 아니라 이야기의 시작이다. 내일을 기약할 수 없다면, 오늘 당장 무엇을 해야 하나. <웨딩드레스>는 역할 바꾸기를 택한다. 엄마는 더 철없는 아이가 되고, 아이는 더 어른스럽게 행동한다. 딸의 소풍날이 언제인지도 모르는 고운이 처음으로 김밥을 싼 뒤 바닷가로 딸을 이끌 때, 누군가와 함께 밥을 먹지 못하는 결벽증을 가진 소라가 엄마를 위해 친구의 간식을 빼앗아 먹을 때, 슬픔은 예상 수위를 뛰어넘는다.
권형진 감독은 역할 바꾸기를 통해 결핍을 메워주는 이야기 구조에 꽤 능하다. 이미 그는 데뷔작 <호로비츠를 위하여>에서 못난 선생과 잘난 제자의 기분 좋은 해피엔딩을 보여준 적 있다. 아역연기 연출만큼은 다른 무엇보다도 돋보인다. <호로비츠를 위하여>에서 엄정화와 신의재는 사사건건 부딪치기만 하면 됐다. 하지만 <웨딩드레스>의 김향기는 때론 송윤아를 대신해 극을 이끌기도 한다. 숨을 거둔 엄마를 등 뒤로 하고 혼잣말을 하는 후반부 대목에서 김향기는 성인의 감정보다 훨씬 풍부한 결을 보여준다.
병풍 혹은 양념처럼 조연배우들을 소비하지 않는 미덕도 눈여겨볼 대목이다. 동생이 시한부 인생이라는 사실을 뒤늦게 알고 난 뒤 오빠(김명국)가 차를 세워두고 흐느끼는 장면을 비롯해 감독은 고운과 소라 외에 다른 인물들에게도 온기를 불어넣는다. 다만 흠이라면 모두가 착한 이들뿐이라는 사실. 그러고 보니 <호로비츠를 위하여>에서도 징글징글한 인물은 없었다. 하지만 어색하진 않다. 악인이 등장하는 <트럭> 같은 영화보다 동화 같은 스토리가 권형진 감독에겐 더 잘 맞는 ‘턱시도’처럼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