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일이에요, 큰일.” 최근 만난 매니지먼트 S사 관계자는 한숨을 내쉬었다. “도대체 여자배우들은 어떻게 먹고살란 말입니까?” 그는 2010년에 만들어질 예정인 영화 중 여자배우가 제대로 된 연기를 펼칠 만한 작품이 없다고 푸념을 늘어놓았다. 여배우들의 ‘구직난’은 어제오늘 이야기가 아니다. 조폭영화가 유행할 때도, 블록버스터 액션영화가 붐을 이룰 때도, 스릴러가 대세를 만들었을 때도, 여배우들은 도무지 출연할 영화가 없다며 아우성을 쳐왔다.
하지만 요즘 터져나오는 여배우들의 불만은 예년의 그것과는 차원이 다르다. 2010년 제작될 영화들의 면면을 살펴보면 답이 딱 나온다. 올해 충무로를 강타할 가장 뜨거운 트렌드는 전쟁영화다. 여성 캐릭터가 발붙일 곳이 거의 없을 수밖에 없다. 이미 촬영에 들어간 <포화속으로>만 해도 그렇다. 차승원, 권상우, 김승우, 탑이 중심이다. 아무리 최송현이 등장한다 해도 <태극기 휘날리며>에서 이은주 이상의 비중을 갖긴 어려울 게 틀림없다. 사정은 강제규 감독의 <디데이>, 곽경택 감독의 <아름다운 우리>(가제), 백운학 감독의 <연평해전>, 그리고 제작 추진 중인 <빨간 마후라> 또한 마찬가지일 것.
게다가 2010년에는 ‘남자+액션스릴러’가 커다란 흐름을 이룬다. 주진모, 송승헌, 조한선, 김강우 등 오로지 남자배우만 출연하는 송해성 감독의 <무적자>가 극단적인 경우라 해도 최민식 출연이 확정된 김지운 감독의 <아열대의 밤>, 송강호와 김승우가 나오는 이현승 감독의 <밤안개>(가제), 김윤석과 하정우가 출연하는 나홍진 감독의 <황해>, 원빈, 양익준이 등장하는 이정범 감독의 <아.저.씨> 같은 영화에서도 여자배우의 존재감은 빛을 내기 어려울 게 틀림없다.
매니지먼트 H의 관계자는 “2010년 영화계에서 여자배우 비중은 아역배우의 그것과 비슷할 것”이라고 말한다. 현재까지 알려진 바에 따르면 올해 제작될 영화 중 강력한 여성이 주인공이거나 상당한 비중을 가진 경우는 전도연, 서우가 나올 임상수 감독의 <하녀>를 비롯해, 엄정화가 출연하는 이정호 감독의 <베스트셀러>, 그리고 캐스팅이 확정되지는 않았지만 김상만 감독의 <심야 FM>과 김현석 감독의 <시라노> 정도뿐이다. 특히 최근 개봉한 <여배우들>에서도 현실적인 고민이 드러나지만, 30대 이상 여배우들에게는 비중있는 조연의 기회조차 많지 않다. 결국 여배우들이 관심을 쏟는 방향은 TV드라마다. <선덕여왕>의 고현정, <천추태후>의 채시라, <스타일>의 김혜수, <아이리스>의 김태희 등이 드라마를 통해 좋은 성과를 얻은 까닭에 여배우들은 닿지 못할 영화보다는 드라마쪽에 관심을 둘 수밖에 없는 형편이다. 매니지먼트 S의 관계자는 “여성연기자들이 예전보다 드라마에 더 신경 쓰는 건 확실하다”고 말한다.
반대로 남자영화들이 쏟아지다 보니 남성연기자들은 ‘품귀현상’까지 빚고 있다. 2010년 2월부터 촬영에 들어갈 영화를 준비 중인 영화사 W의 관계자는 “주연을 캐스팅하고 남자 조연을 찾는 중인데 정말 없다. 물어보면 ‘난 인민군이라서…’ 식으로 답한다”며 분위기를 전한다. 그러나 진정 우려되는 지점은 배우들의 성비율이 아니다. 남자들의 전쟁, 스릴러, 액션들이 주류를 이룰 2010년 영화시장이 과연 활기찰 것인가, 야말로 현재 많은 충무로 관계자들이 던지는 의문이다. 그러니까 관객이 끼니마다 퍽퍽한 고기만 씹으려 하겠느냐는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