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이 귀환했다. 제임스 카메론의 12년 만의 극영화 <아바타>가 지난 12월17일 개봉했다. 비평과 흥행 양쪽에서 <아바타>는 왕의 귀환에 걸맞은 대접을 받고 있다. <아바타>의 가장 눈에 띄는 혁명은 3D 입체와 디지털 액터, CG 기술의 진화다. 이에 감화된 스티븐 스필버그조차 2011년 개봉작 <탱탱의 모험>에서 카메론의 새 발명품을 모조리 끌어들일 것이라 공언했다. 그러니까 우리는 지금 영화의 미래를 보고 있는 것이다. 2시간40분 동안 관객을 아바타의 몸속으로 채워넣는 이 무시무시한 향정신성 테크놀로지 마약을 여러 각도로 조명했다. 진중권, 듀나, 최익환 감독을 비롯한 필자들이 각각의 주제로 <아바타>를 읽었고 프로덕션의 면모들을 살짝 들추어봤다.
제임스 카메론은 대사를 정말 못 쓴다. 아니다. 정정하자면 카메론은 대사를 정말로 카메론답게 쓴다. 그의 가장 유명한 대사인 <타이타닉>의 “나는 세상의 왕이다”는 위대한 영화를 만들었다는 카메론의 자부심이 압축된 문장이다. 그가 오스카에서 동료 영화인들을 향해 이 대사를 다시 외쳤을 때 겸양을 미덕으로 삼는 팬들은 얼굴을 일그러뜨렸을 거다. 그러니까 카메론은 모든 대사를 자신이 주인공인 양 쓴다. 그는 자신이 만든 세상의 왕이며 주인공이다. <아바타>에서도 의기양양한 대사는 여전하다. 판도라를 처음으로 비행하는 사람들에게 헬리콥터 조종사는 말한다. “다들 자기 표정을 좀 봐야 해.”(You should see your faces) 이는 관객을 향한 카메론의 대사다. 판도라에 도착한 용병들을 향해 교관은 말한다. “너희들은 더이상 캔자스에 있는 게 아니야.”(You’re not in Kansas anymore) <오즈의 마법사>를 인용한 이 대사를 통해 카메론은 호언장담한다. 좌석에 앉아서 우스꽝스러운 3D 안경을 끼고 있는 당신들은 더이상 지구에 있는 게 아니야. 당신들은 지금 판도라에 있다.
카메론은 독창적인 이야기꾼이 아니다?
<아바타>는 일종의 우주판 <늑대와 춤을>이다. 지구는 에너지 고갈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행성(이라고는 하지만 사실은 위성) 판도라에서 대체자원을 채굴한다. 판도라의 독성을 지닌 대기를 극복하기 위해 과학자들은 판도라의 토착민 나비의 외형에 인간의 의식을 주입해서 조종이 가능한 생명체 ‘아바타’를 만든다. 하반신이 마비된 전직 해병대원 제이크 설리(샘 워딩턴)는 아바타를 이용해 나비의 무리에 침투해 정보를 캐내는 임무를 부여받는다. 하지만 임무 수행 중 제이크는 점점 나비족에 동화되기 시작한다. 우리는 이런 이야기를 수백번은 더 읽고 본 적이 있다. 특히 고전 SF소설들과 70년대에 등장한 수정주의 서부극()에서 말이다.
제임스 카메론은 결코 독창적인 이야기꾼은 아니다. 그는 언제나 지난 100년의 장르소설과 영화들이 손질해온 원형(原型)적 이야기를 되새김질할 따름이다(). 카메론의 많은 영화들이 종종 표절 논란을 불러일으킨 것도 그 때문이다. <터미네이터>는 SF작가 할란 엘리슨의 고소로 결국 엘리슨의 이름을 엔딩 크레딧에 넣어야만 했고, <아바타>의 이야기 구조 역시 SF작가 폴 앤더슨의 57년작 <콜 미 조>와 지나칠 정도로 흡사하다. 게다가 그는 <아바타>에서 자신의 전작들을 모조리 끌어들인다. 특히 비슷한 영화는 <에이리언2>다. 다국적 기업의 야욕, 반기를 드는 주인공, (로버트 하인라인의 <스타쉽 트루퍼스>로부터 기인한) 인간이 탑승하는 파워슈트. 그러나 카메론의 다소 진부한 이야기가 <아바타>의 기술적인 실험에 최적화되어 있음을 짚고 넘어가야 한다. 카메론은 이야기를 먼저 만든 뒤 그에 맞는 기술을 찾아 헤매는 게 아니라 이야기와 기술을 동시에 고안해낸다. 카메론의 영화에서 기술과 이야기는 분리되지 않는 하나의 결합체다.
3D와 디지털 액터의 시대 막 열어
기술적인 측면에서 <아바타>의 혁명은 크게 두 가지다. 하나는 3D 입체효과다(). <아바타>의 3D는 3D 효과 자체를 위해 존재하지 않는다. 카메론은 관객을 향해 물체를 집어던지는 잔재주를 단 한번도 부리지 않는다. 심지어 그는 저메키스처럼 3D 효과를 롤러코스터로 활용하며 컷 없이 디지털 공간을 활강하지도 않는다. <아바타>의 주인공들은 거대한 익룡 이크란을 타고 날아다니지만 카메론은 일반 극영화처럼 계속해서 컷을 바꿔댄다. 카메론은 관객이 ‘지금 극장에 앉아 3D영화를 보고 있다’고 느끼게 만드는 ‘3D 소격효과’를 원치 않는다. 내러티브를 해치지 않을 정도에서 부드럽게 재단된 <아바타>의 3D는 깊은 심도를 통해 액션 시퀀스의 완성도에 기여하고, CG로 창조된 세계로 관객의 오감을 밀어넣기 위해 설계됐다.
디지털 액터의 측면에서도 <아바타>는 피터 잭슨의 골룸과 저메키스 영화를 뛰어넘었다(). 얼굴과 신체적인 움직임은 살아 있는 생명체에 가까울 만큼 자연스럽다. 배우의 외형뿐만 아니라 연기의 감정적 뉘앙스까지도 모조리 디지털로 캡처됐다. 물론 그가 저메키스처럼 디지털 인간 캐릭터를 창조하지 않았음은 지적하고 넘어갈 만하다. 언캐니 밸리의 완벽한 극복 여부는 아직 조금 기다려야 한다.
<아바타>를 제임스 카메론의 최고 걸작이라고 할 수 있을까? 카메론의 팬들은 여전히 <에이리언2>나 <어비스>를 좀더 아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아바타>가 카메론의 또 다른 혁명이라고 말하는 데는 망설일 필요가 없다. <터미네이터2>로 디지털 특수효과를, <트루 라이즈>로 하이퍼 리얼리즘 특수효과의 세계를 열어젖힌 카메론은 <아바타>를 통해 진정한 3D와 디지털 액터의 시대를 개막했다. 동시에 그는 다소 진부해 보일지라도 기술과 주제의식을 단단히 결합하는 드라마투르기의 해답을 보여준다. 진보한 영화적 테크놀로지를 이용해, 카메론은 관객이 동족에 대한 애정을 버리고 아바타와 나비족의 마음에 완벽하게 동화하도록 만든다. 눈을 뜨면 더이상 이곳은 캔자스가 아니다. 테크놀로지의 왕이 깔아놓은 노란 벽돌길이 안내하는, 멋진 신세계다.
“3D 효과는 리얼리티의 입구”
12년 만에 돌아온 제임스 카메론
<아바타>의 개봉 이후 제임스 카메론의 새로운 인터뷰들이 속속 나오고 있다. 직접 마주앉아 인터뷰를 할 수 있으면 좋으련만 카메론은 지금 세상에서 가장 바쁜 남자인데다가 서울로부터 5968마일 떨어져 있다. 카메론의 몇몇 외신 인터뷰들에서 중요한 답변만 몇개 골라내서 싣는다.
-정치적인 면에서 <아바타>는 지금 미국의 외교정책에 대한 풍자로 보인다. =물론이다. 이 영화는 최근의 국제적 분쟁들과 분명한 관계가 있다. 용병들이 헬리콥터에서 뛰어내리는 장면들을 보면 베트남이 떠오를 거다. 거슬러 오르자면 16, 17세기 유럽인들의 아메리카 원주민 정책과도 연관이 있다. 세상에는 피로 쓰여진 인류의 역사가 굉장히 많다. 나는 <아바타>가 명료한 메타포라고 생각한다. 격앙된 정치적 영화로서가 아니라 인류가 새로 발견한 현대적 문명을 대하는 태도를 보여주는 영화로서 말이다. 그리고 이 영화는 테크놀로지를 향한 인류의 애증(Love & hate relationship)을 이야기하는 작품이다. 테크놀로지 자체가 나쁜 것은 결코 아니다. 문제는 테크놀로지를 발전시킨 인간들이다. 어느 날 갑자기 전 인류가 옷을 벗어던지고 야생으로 달려가진 않을 것이다. 흠, 더이상 야생이라 부를 만한 게 남아 있기나 한가. 아무튼 중요한 건 테크놀로지와 과학을 이용하는 우리만의 좋은 방법을 터득해야만 한다는 거다. <아바타>의 테마가 바로 그거다. 제이크 설리가 눈을 뜨는 것으로 영화가 시작과 끝을 맺는 건 일종의 상징이다. <아바타>는 지각의 변화에 대한 영화고, 지각을 변화시키기 위한 선택에 관한 영화다.
-<아바타>의 3D 입체효과는 아주 자연스럽다. 하지만 3D 기술 자체를 과시하지는 않는 것 같다. =<아바타> 이전까지, 3D영화를 만든 감독들은 관객이 3D로 영화를 본다는 사실을 계속해서 느끼도록 만드는 걸 일종의 의무로 생각했던 것 같다. 나는 다른 방식으로 접근했다. 생각해보라. 만약 내가 관객으로 하여금 3D로 영화를 보고 있다는 걸 끊임없이 되새기도록 만든다면 관객은 2시간30분 동안 자신이 극장에 앉아 있다는 걸 계속 상기하게 될 것이다. 그런 건 원치 않는다. 나는 관객이 판도라 행성으로 들어가도록 만들고 싶었다. 그래서 나는 3D 효과를 일종의 창문 혹은 리얼리티로 들어서는 입구로 만들고 싶었다.
-테크놀로지가 영화를 장악하는 시대에, 이야기를 뒷받침하는 기구로서 테크놀로지를 활용하는 당신의 철학은 뭔가. =나는 <아바타>를 본 사람들이 극장에서 나온 뒤 모션 캡처나 CG에 대해 떠들어댈 거라 생각지 않는다. 오히려 영화의 러브 스토리와 감정적인 부분들에 대해 이야기할 거다. 예전의 나는 테크놀로지와 이야기 사이의 균형에 신경을 덜 썼다. 내가 둘 사이의 균형을 마침내 찾은 것은 <타이타닉>부터다. 그리고 <아바타>도 마찬가지다. 어차피 <아바타>는 만들어진 과정 자체가 최첨단이니 신경 썼던 것은 3D나 이모션 캡처보다는 이야기 그 자체였다.
-트릴로지로 만들 거라는 소문이 자자한데 후속편을 정말로 만들 건가. =사실 내가 4년 반 전에 이십세기 폭스와 <아바타>를 기획할 때 이렇게 말했다. “당신들도 알다시피 우리는 판도라의 산과 풀과 꽃과 생물, 메인 캐릭터의 얼굴을 표현하기 위한 장비 등 수많은 CG 자산을 만드는 데 엄청난 에너지와 시간 그리고 엄청난 돈을 쓰게 될 거요. 엄청난 돈 말이요. 수백만, 수천만, 수억달러를. 그러니까 아예 이 영화를 잠재적인 새 프랜차이즈 시리즈의 시작이라고 보는 편이 나을 거요. 모든 작품들이 모여서 하나의 사가(Saga)를 이루는 영화 말이요.” 나는 이미 모든 걸 계획해뒀다. 대본을 쓰지 않았을 따름이다. 모든 건 <아바타>가 얼마나 많은 돈을 버느냐에 달려 있다. 어찌됐던 확신할 수 있는 것은 <아바타>가 앞으로 지속될 시리즈의 기반을 닦는 시작이라는 사실이다. 물론 속편의 내용은 절대 지금 말하지 않을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