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을 잃고 분노에 사로잡힌 부검의 강민호. 설경구는 달리고 깨지고 분노하고 오열한다. 응축된 그의 ‘쇼’는 보는 이에게도 쉽지 않을 만큼 빡빡한 농도다. 슬프고 처연하다.

“<용서는 없다>는 날것의 영화다. 좀 폼나게 달빛이라도 비춰주든지 비라도 추적추적 내려주면 분위기로 절반은 먹고 들어갔을 텐데. 이건 죄 백주에 아무 장치없이 연기해야 하니….” 설경구의 ‘험담’은 진의를 제대로 파악해야 한다. 이 멋도 없고, 치장도 하지 않은 날것의 영화는 그 결과, 오롯이 설경구 자신의 연기를 필요로 하고 있었다. 그래서 내심 기분이 나쁘지 않을 만했다. 그래도 말은 이렇게 툭툭 내뱉어야 직성이 풀리는, 그는 자타공인 도통 ‘빈말’이라고는 모르는 사람이다.

손꼽힐 정도로 탁월한 감각을 소유한 부검전문의. <용서는 없다>의 강민호의 1막은 그랬다. 그러나 딸이 납치되면서 그의 세련된 리듬은 깨진다. 무언가에 쫓기듯, 홀린 듯 이성이 마비된 남자의 절규가 강민호의 2막이다. 과거의 과오가 원반이 되어 돌아온 끔찍한 현재. 설경구의 연기는 이 현재에 와서 폭발력을 갖는다. “마지막 클라이맥스야말로 강민호의 심리가 분출되는 장면이었다. 그래서 ‘느낌’이 올 때까지 기다렸다. 그리고 그 ‘느낌’이 왔을 때 내리 4시간을 주변 아무것도 안 쳐다보고 연기하고, 됐다 싶을 때 퇴장했다. 돌아보니 도대체 어떻게 찍었는지 나도 모르겠다.” 그 순간만큼은 그는 온전히 강민호가 되었고, 그래서 많이 아팠다. “배우가 그 인물의 삶을 대신 산다는 건 다 거짓말이다. 인간인데 그럴 수가 있나. 그런데 연기하는 순간은 정말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진실이 된다. 진실과 허위의 경계에 사는 인물. 그게 배우다.”

이 ‘가짜의 진실’이 설경구의 생활을 지배한 지도 근 17년. 공교롭게도 올해는 설경구를 각인시켜준 <박하사탕>이 10주년을 맞는 해다. “<박하사탕>은 내게 애증과 속박과 족쇄의 영화였다. 그게 참….” 현대사의 굴곡을 고스란히 떠안은 ‘김영호’의 무서운 연기 때문에 설경구의 많은 날은 김영호로 인식됐다. “그땐 만성위염을 달고 다녔다. 미친 듯이 물불 안 가리고 연기했다. 내가 김영호가 될 정도로. 지금도 대사 잘 안 외우고 내 감정을 내뱉는 그때의 버릇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초반학습이 그만큼 셌다.” 그 10년 동안 설경구도 변했다. 설경구의 표현대로라면 ‘체급선수’가 되어 <역도산>을 찍었고, 시장에서 실패도 맛보았다. <공공의 적>에서 <강철중: 공공의 적 1-1>까지 캐릭터를 만들기도 했다. 그리고 <해운대>로 대중을 사로잡았고, HP 카메라가 도입되면서 한 테이크 분량의 대사는 반드시 외워야 하는 현장에 적응도 해야 했다. 아, 변하지 않은 것도 있다. 그 십년간, 한번 만나서는 좀체 마음을 열지 못하는 고질적 수줍음은 그대로다.

“난 연연하지 않는다. 안되면 인연이 아니다 싶은 거지. 묻고 따지는 대신, 친분을 나눴던 감독과 작업하는 게 좋다. 그게 고맙다.” 다음 작품 역시 ‘하겠다’고 오래전 약속한 영화다. 그의 다음 십년이 또 시작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