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ynopsis 미래의 지구는 머나먼 행성 판도라에서 대체자원을 채굴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판도라의 토착민 ‘나비’족의 외형에 인간의 의식을 주입, 원격 조종이 가능한 새로운 생명체 ‘아바타’를 탄생시키는 프로그램을 개발한다. 여기에 참가한 제이크 설리(샘 워딩턴)는 임무 수행 중 나비의 여전사 네이티리(조 샐다나)를 만나고 사랑에 빠지게 된다. 그와 동시에 나비족을 강제 이주시키려는 개발회사와 군대의 안내인 역할을 해야 하는 운명에 처한다.
제임스 카메론은 피터 잭슨의 <반지의 제왕> 시리즈와 마이클 베이의 <트랜스포머> 시리즈를 보며 무슨 생각을 했을까. 두 영화 모두 할리우드 테크놀로지의 혁신이면서 영화제작 시스템 자체에 지각변동을 가져온 작품들이라면 복귀 시기를 조율하던 제임스 카메론에게 분명 충분한 자극이 됐을 것이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자면 <아바타>는 3D영화의 신기원이라는 점에서 과거 스필버그의 <쥬라기 공원>(1993)이 보여준 CG 특수효과의 혁명과 맞먹는 성취를 이뤘다. <아바타>는 기존 아동용 3D 입체영화들이 의도했던 (화면 밖으로 물건이 쑥 튀어나오는 것 같은 방식의) 깜짝효과와는 거리가 멀다. <아바타>는 그런 영화들보다 더 신기하게 보이기에 놀라운 것이 아니라 너무나 자연스레 적응되도록 하기에 놀랍다. 결국 중요한 것은 기법이 아니라 화법이라는 얘기다.
<아바타>는 여러모로 <디스트릭트9>을 떠올리게 한다. 인간이 아닌 영화 속 피조물에 더 감정이입을 하게 만드는 장치 말이다. 제임스 카메론은 <디스트릭트9>에서 강제 이주를 당한 외계인과 마찬가지로 <아바타>의 판도라 행성 외계인들을 경유해 시선의 역전을 꾀한다. 영화 속 군인들을 무차별적으로 학살하고 처벌할 때 느끼는 짜릿함의 정체는 뭘까. <아바타>를 수정주의 서부극의 내러티브로 읽을 수 있는 것은 외계인들이 인간보다 더 인간적으로 느껴지기 때문이다. 사실 그것은 그리 낯선 것도 아니다. <터미네이터2: 심판의 날>(1991)에서는 터미네이터가 오히려 인간보다 더 휴머니즘을 지닌 캐릭터로 묘사됐으니까.
<아바타>는 늘 새로운 한계를 돌파해온 제임스 카메론이 본격적으로 인간의 육체를 지워버리기 시작하고, 2차원 스크린의 한계에 정면으로 도전한 작품이다. 제이크는 다리에 장애가 있는 불행한 육체보다 아바타로서의 자신에게 더 빠져든다. 아바타로서의 활동을 끝내고 실제의 육체로 복귀하는 순간 자신의 초라함은 더욱 크게 느껴지는 것이다. 잠(?)에서 깨어나기 싫은 그는 영원히 아바타로 살고 싶은지도 모른다. 그렇게 <아바타>는 영화라는 매체가 지닌 눈속임의 속성처럼 환영의 매력에 몸을 내맡긴다. 나는 영원한 ‘영화’ 감독이라는 제임스 카메론 자신의 굳은 다짐이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