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면제를 먹었다. “이상한 낌새만 있어도 아파트가 떠나가도록 고함을 질렀다. 포커스가 맞지 않아서 계속 엔지가 났다. 결국 열번의 테이크가 나오자, 배우도 지치고 연기도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그 순간, 나도 모르게 화를 냈다. 마지막에는 ‘컷’을 외치자마자, 오케이 사인을 내리지도 않은 채 촬영을 종료했다. 그날은 결국 수면제를 먹어야 잠들 수 있었다.”
또 수면제를 먹었다. “화면은 무슨 누아르영화처럼 어두웠고, 내레이션은 활력이 없었으며, 음악은 밸런스가 맞지 않고, 엔딩 편집은 무슨 자투리 영상 같은 느낌으로 나왔으니 기술 시사 반응이 좋았을 리가 있나. 무거운 마음을 먹고 다시 수면제를 먹고 잤다.”
<여자없는 세상>을 연출한 송재윤 감독의 고백이다. 한국영화아카데미 장편영화 제작연구과정 2기의 성과물인 이 작품의 제작기는 절절하다. 얼마 전 출간된 <카메라, 88만원 세대의 심장을 쏘다>를 이루는 내용이다. 이 책엔 같은 과정으로 만든 다른 두 작품에 대한 분투기도 담겨 있다. <나는 곤경에 처했다!>와 <너와 나의 21세기>다.
세 영화는 이른바 ‘88만원 세대’의 욕망과 현실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20대 백수 또는 비정규직 청춘남녀들의 찌질하면서도 애처로운 초상이 픽 웃음을 주다가도 슬프다. “내가 백수라고 우습지? 빈정대냐? 경멸하냐? 지구는 너희 같은 직장인들만 지키는 게 아냐. 너도 직장인이지? 게다가 정규직이지?”(<나는 곤경에 처했다!>) “이래서 아파트 사는 새끼들은 재수가 없어. 너도 똑같아 이 새끼야….” “결론은 돈이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무조건 좆나게 많이 벌어야 한다.”(<여자없는 세상>) 기성 감독들에게 꿀릴 게 없는 완성도다. 리얼하고 재밌다. 그렇게 되기까지 어떤 시행착오와 마음고생을 겪었는지는 알 길이 없었다. 책을 보고서야 알았다.
시작부터 치욕적이었다. 송재윤 감독이 시나리오 수업 때 <여자없는 세상>의 트리트먼트를 보여주자 지도교수는 이렇게 말한다. “내가 직접 서명해줄 테니 아카데미 자퇴해라.” 어렵게 크랭크인에 돌입하지만 첩첩산중이다. 욕심과 예산 사이의 스트레스와 냉전. 프로듀서는 물론 촬영감독이나 제작부장과도 뭐 하나 쉬운 게 없다. 하루하루가 드라마고, 영화다. “이런 종류의 초저예산 영화를 제대로 완성하기 위해선 두 가지 방편이 있다고 정의내렸다. 하나는 왕따가 돼서 자기 혼자 영화를 찍거나, 다른 하나는 악마가 돼서 스탭들을 따라오게 만들거나. 둘 중 하나다.” 그는 잠을 잘 수 없었다. 그래서 수면제를 먹었다.
이들 영화를 보기란 쉽지 않다. 개봉관은 고작 서울 한곳, 부산 한곳이다. 극장에 갈 짬이 없다면 책으로 아쉬움을 풀기를 권한다. <카메라, 88만원세대의 심장을 쏘다>를 읽으면 새파랗게 젊은 영화인들의 심장박동이 느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