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가 그렇게 얘기한다. ‘한국 영화홍보마케팅 업계의 대모’라고. 채윤희 대표는 일간지에 제대로 된 영화지면조차 없던 시절 ‘올댓시네마’라는 전문 홍보사를 차려 <컬러 오브 나이트>(1994)를 시작으로 <쉬리>(1999)로 한국영화 흥행기록을 새로 썼고, 이후 <매트릭스>(1999)와 <친절한 금자씨>(2005) 등 딱히 구체적인 몇편의 제목만 나열하기가 머쓱할 정도로 수백편의 작품들을 매만져왔다. 부침이 심한 한국영화계에서 올댓시네마 이전까지 포함하면 20년 넘게 한국영화와 함께한 산증인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더불어 올댓시네마는 홍보는 물론 제작과 스탭 등 각 분야의 많은 유능한 인재를 배출하기도 해 ‘여성영화인 사관학교’라는 얘기도 들으며 다른 후발 홍보사들의 모델이 되기도 했다.
올해는 올댓시네마의 창립 15주년이기도 하고, 준비위원장으로 시작해 또 하나의 ‘회장’ 직함을 갖고 있는 여성영화인모임이 10주년을 맞는 해이기도 하다. 1999년 4회 부산국제영화제 기간 중 조그만 간담회에서 시작해 어느덧 열살의 나이가 된 여성영화인모임은 12월14일(월)과 15일(화) 양일간 지난 10년을 격려하고 기억하는 ‘2009 여성영화인축제’를 가질 계획이다.
-올해는 보내는 소감이 남다르겠다. =늘 인터뷰를 주선하는 입장이다 보니 이런 인터뷰 자체가 어색하다. 옆에서 감독이나 배우들이 인터뷰하는 걸 보고 있으면 ‘왜 저렇게 못해’, ‘좀 잘하지’하는 생각을 할 때도 많은데 지금이 딱 그렇다. (웃음) 물론 뜻 깊은 해이긴 하지만 영화계 전체가 어려우니 우울하기도 하고. 그래도 힘을 내야 한다. 일단 여성영화인축제에 많은 사람들이 왔으면 좋겠다. 예전에는 예산문제도 있고 해서 하루만 행사를 가졌는데 올해는 10주년이고 해서 이틀간 진행한다. 공로상 작품 상영회를 비롯해 회원과 관객의 투표를 통해 가장 보고 싶은 영화도 상영할 거다. 상영회를 많이 가지면서 포스터 전시회도 하는 등 많은 여성영화인들의 잔치가 됐으면 좋겠다.
-여성영화인모임의 첫 시작은 어땠나. =1999년 부산국제영화제 때 주진숙, 임순례 등 여성영화인 몇분이 간담회를 가지면서 여성영화인모임을 한번 모아보자는 쪽으로 의견이 모아졌다. 난 그 자리에 없었는데 주진숙 교수가 전화를 해와 네트워크를 만들고 정보 공유를 하는 데 도움을 청했고, 이듬해 초 예비모임을 가지면서 공동준비위원장이 돼 활동에 들어갔다. 2000년 4월19일에 창립총회를 가졌는데 반신반의하는 사람들은 없었다. 다들 흩어져서 활동하고 서로 잘 모르고 하다보니 그런 모임이 있으면 좋겠다는 데 많이 공감했다. 생각해보면 올댓시네마를 만든 게 1994년이고 <씨네21>과 <키노>가 1995년부터 나오기 시작했고 부산국제영화제가 1996년 시작됐다. 영화계에 뭔가 발전적인 기운이 꿈틀대고 있었고 여성영화인들도 그런 모임에 대한 갈증이 있었던 것 같다.
-준비위원장으로 시작해서 지금까지 10년 동안 수장 자리를 맡고 있는데 임기가 너무 긴 것 아닌가? (웃음) =영화계가 늘 어렵다는 얘기를 듣는데도 이렇게 이사들과 회원들의 도움으로 10년을 버텨온 게 대견하기도 한 반면, 모임이 좀더 확장되지 못하고 머물러 있지는 않은가 하는 생각이 들어 우울하기도 하다. 애초에 모임을 시작하면서는 임기를 3년 정도로 했고, 난 6년 정도만 하고 물러날 생각이었는데 어쩌다보니 이렇게 됐다. 또 지금은 어려운 시기라 갑자기 그만두기도 그렇고 2, 3년 더 있다 후배에게 넘길까 고민 중이다. 지금도 실질적인 업무를 이사들이 열심히 하고 있고 난 직책만 갖고 있다. 겸손하게 보이려고 하는 얘기가 아니라 실제로 빨리 물러나야 되지 싶다. 이런 단체장을 하려면 카리스마가 필요한데, 그런 건 없지만 아무 사고없이 무난하게 여기까지 온 걸 인정받지 않았나 싶다. (웃음)
-모임의 요즘 고민은 뭔가. =당연한 말이지만 영화계가 잘돼야 우리 모임도 잘된다. 단체지원사업으로 영화진흥위원회에서 지원받는 금액이 있지만 그것만으로는 안되니까 여성 제작자나 영화인들이 내놓는 주머닛돈으로 후원받는 일이 많았는데 요즘은 그게 힘들다. 회장 입장으로서 그런 넉넉한 쌈짓돈을 좀 만들어놓고 누군가에게 물려줘야 하는데, 하고 생각하는 거다.
-여성영화인모임의 회장이라는 직함과 한국영화계 최초의 전문 홍보사라 할 수 있는 올댓시네마의 대표라는 자리가 묘하게 겹친다. 올댓시네마를 처음 만들던 시기의 얘기도 궁금하다. =영화사 다니다가 결혼해서 잠시 쉬고는 다시 일을 시작할 즈음 대기업 자본이 영화계를 기웃거리고 있었고, 전문적인 홍보마케팅 회사가 필요한 시점이 아닌가 하는 생각에 올댓시네마를 만들었다. 운도 좋았다. 삼성물산 드림박스쪽의 제의로 홍보를 맡은 첫 작품이 <컬러 오브 나이트>였는데 큰 성공을 거두면서 자리를 잡게 됐다. 사실 나중에 주변 사람 몇몇이 그 영화를 두고 ‘사기 당해서 본 영화’라고 얘기했던 기억이 난다. (웃음) 미국에서는 모 앙케트에서 ‘최악의 영화’ 그런 걸로 꼽히기도 했던데 국내에서는 에로틱 스릴러로 흥행이 잘됐다.
-수입사가 임의로 편집해서 물의를 빚었던 <제5원소>(1997)의 경우 분노한 뤽 베송 감독이 기자회견 도중 자리를 뜨기도 했던 기억도 난다. =사실 홍보하는 입장에서 그런 상황을 다 감수해야 하는 게 무척 힘들다. 기자회견장에서 그런 불미스런 일이 벌어지리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감독이 묵고 있는 신라호텔 로비에서 정말 괴로워했고 밤새 잠도 못 잤다. 다음날 <씨네21> 인터뷰도 예정돼 있었는데 그냥 떠나버렸으니까. 예전에는 그런 웃지 못할 변수나 사건들이 너무 많았다.
-그래도 역시 빼놓을 수 없는 작품이 <쉬리>다. =어쩌면 우리 회사가 확고하게 자리잡기 시작한 시점이었던 것 같다. 당시에는 멀티플렉스가 보편화된 때가 아니라 감히 580만 관객이라는 흥행을 예상치도 못했다. 전국 23개 극장에서 개봉하는 수준이었으니까. 심지어 언론시사회 날 뒤풀이 자리에서 감독이나 배우를 포함해 30여명이 모여 영화 흥행 스코어 맞히기 내기를 했는데, 가장 많이 내기를 건 사람이 120만 관객이었다. (웃음) 강제규 감독도 80만명 정도를 예상하고 나도 그 정도였다. 그런데 주말마다 기록을 경신하면서 거의 두달 동안 극장에서 행사를 가졌다. 요즘엔 주로 온라인으로 하지만 그때만 해도 관객과 직접 대면하며 소통할 때라 100만 번째 관객에게 한석규씨가 입었던 의상을 선물로 주고 그랬다. 나중에 500만 관객을 돌파하고는 다시 감독님 만난 자리에서 “이 기록이 몇년 뒤에 깨질까요?”라고 묻기에 “당분간 힘들겠죠. 감독님이 다음 작품 만드셔서 깨야죠” 그랬는데, 웬걸 다음해 <공동경비구역 JSA>가 바로 그 기록을 깼다. 점차 멀티플렉스도 자리잡으면서 한국영화가 힘차게 성장하던 시기였다.
-회사 규모는 어땠나? 올댓시네마가 많은 영화 마케터 지망생들의 선망의 회사가 되기 시작했는데. =처음에는 충무로에서 나를 포함해 전체 3명의 직원으로 시작했다. 그때 두명의 직원이 현재 KM컬쳐의 심영 이사와 <미녀는 괴로워>(2006)의 노은희 PD다. 그러다가 나중에 <쉬리> 하면서 6명 정도가 된 건데 이후 현재까지 직원 수로는 별 차이가 없다. <쉬리>가 흥행기록을 깨면서 그 성공요인을 보고서로 작성한다며 삼성경제연구소에서도 찾아오고, 대학 마케팅 교수들도 찾아오고 그랬는데 다들 깜짝 놀라는 눈치였다. 어떻게 보면 직원 수가 비슷한 게 이후 발전하지 못한 걸로 보일지도 모르겠지만 나는 이게 적정한 규모라고 생각한다.
-바로 그 규모라는 측면에서 이후 제작을 겸하거나 하는 식으로 회사를 키울 욕심이 생기지 않았나. =사실 이 업계에서는 마케팅을 제작으로 나아가기 위한 전 단계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런 점에서 ‘나도 전문가다’라는 생각으로 홍보마케팅만의 전문성을 키우고 싶다, 영원한 마케터로 남고 싶다는 오기가 있었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가장 지겹도록 들어온 말이 바로 ‘시집 안 가요?’라는 것과 버금가게 ‘제작 안 해요?’라는 얘기다. (웃음) 물론 그동안 많은 제안도 있었고, 해볼까 하는 마음을 먹은 적도 있지만 두려움도 있다. 제작을 겸하려고 하다가 접은 다른 회사들도 꽤 봤고, 또 제작의 어려움을 옆에서 지켜보다보니 쉽지 않은 결정이다.
-영화홍보마케터를 꿈꾸는 학생이나 지망생들에게 강의도 많이 하고 있는데, 중요하게 해주는 얘기가 뭔가. =일단 체력이 좋아야 한다고 말한다. (웃음) 물론 요즘은 특별한 일이 없으면 주5일 근무를 준수하고 있고 초창기의 수작업은 별로 없지만, 여러 가지 고통이나 스트레스를 견디고 관리하는 차원에서의 체력을 말하는 거다. 예전에는 토요일이면 꼭 극장에 나가서 들어오는 관객 수를 체크하고 모여서 점심도 먹고 했다. 극장이 미어터지면 정말 맛난 점심을 먹는 거고 썰렁하면 다음주 월요일에 출근하는 게 끔찍하다. 다 그 시절의 추억이고 낭만인 것 같다.
-아무래도 그 정도의 경력과 경험이 있으면 ‘딱 보면 견적 나오는’ 눈을 갖게 될 것 같다. 그동안 예상과 다른 흥행 결과가 나온 영화들은 뭔가. =심한 경우는 아닌데 <아홉살 인생>이 좀 아쉬웠다. 일반시사회가 있던 날 눈이 엄청 많이 왔는데도 객석을 100% 채웠다. 날씨가 그런 날은 그러기가 쉽지 않은데 객석도 꽉 차고 분위기도 너무 좋아서 기대가 컸다. 광고비도 늘리자고 건의했고. 그런데 흥행은 생각보다 잘 안됐다. 올댓시네마 차리기 전에는 이명세 감독님의 <첫사랑>(1993)이 그런 영화였다. 데뷔작 <나의 사랑 나의 신부>(1990)로 엄청난 기대를 한몸에 받았었는데 거의 참패 수준의 흥행 기록이었다. 명보극장에서 개봉했는데 주말에 사람이 너무 없어서 월요일에 출근해서 제대로 숨쉬기도 힘들었다. (웃음) 감독님도 거의 술집에 계셨고. 요즘에는 인터넷으로 영화를 재평가하기도 하고 ‘와라나고’ 운동(<와이키키브라더스> <라이방> <나비> <고양이를 부탁해> 재개봉운동)도 하고 그러지만 그땐 토요일 하루 흥행으로 모든 게 결정나던 때였다. 반면, 잘됐는데 눈에 안 띄는 영화가 있다. <친절한 금자씨>는 성인관람가로 300만 관객을 넘었으니 흥행에 성공한 거나 다름없는데, 박찬욱 감독님에 대한 기대치가 높아졌을 때라 그런지 나름 500만 관객 정도를 기준으로 세워두고 ‘그 영화 잘 안됐잖아’ 그렇게 말하기도 한다. 그럴 때는 또 상처받는다. (웃음)
-직업을 떠나 좋아하는 영화들은 뭔가. =드라마가 강하고 감동적인 영화를 좋아한다. 그러면서도 평범하지 않은 영화들. 예를 들어 올댓시네마 초창기에 홍보했던 <데드맨 워킹>(1995) 같은 작품 말이다. 마케터로서 클라이언트 앞에서 냉정해야 하는데 그런 영화들을 만나면 아무래도 감정적으로 된다. 관계자 시사회에서 혼자 펑펑 울기도 하고. (웃음) 지금도 늘 어떤 영화를 만나게 될까, 하는 기대감으로 일한다. 그런 게 없으면 이 생활을 견뎌내기 힘들 거다.
-그럼 요즘 또 그런 기대감을 주는 영화는 뭔가. =내년 1월 개봉예정인 <꼬마 니콜라>라는 영화다. 사실 내가 사회생활 시작하면서 첫 직장은 영화일이 아니라 출판사 편집자였는데, 그때 책임편집을 맡았던 작품이 바로 장 자크 상페가 그림을 그린 <꼬마 니콜라> 시리즈다. 당시 정말 크게 인기를 끌었던 책이다. 그러다 최근 그 영화가 수입됐다는 얘기를 듣고 바로 연락했는데 이미 홍보사가 정해진 다음이더라. 그래서 아쉽지만 포기하고 있었는데 어떻게 다시 사정상 우리 회사로 오게 됐다. 그 뒤 다른 출판사에서 새로 나오긴 했지만 예전 내가 편집했던 버전을 헌책으로 천원 주고 샀다. (웃음) 편집 크레딧에 내 이름이 있는 걸 보고 어찌나 반갑던지. 내가 거의 30년 전에 냈던 책을 이제 다시 영화로 만나게 되는 경험이 어디 흔한 일이겠나. 그럴 때 참 운명 같다는 느낌을 받는다.
-영화홍보사의 대표로서, 여성영화인모임의 수장으로서 앞으로의 바람 같은 게 있다면. =영화홍보일이 영화로부터 선택받아야 한다는 점에서 배우와 같다는 생각을 하곤 한다. 그러려면 안정적으로 작품 의뢰를 받아야 하는데 영업력이 뛰어난 사람이 아니다보니 그게 늘 어렵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걱정을 심하게 하지 않으면서 16년 동안 회사를 꾸려왔다. 그래서 난 운 좋은 사람이라고 늘 생각한다. 여성영화인모임도 그렇다. 충무로의 여성제작자나 감독들이 늘 대박이 나서 별탈없이 후원금 걱정을 안 하면 좋겠지만, 상황이 그렇지 못하니 어디 가서 손도 잘 내밀고 후원금도 탁탁 받아오고 해야 하는데 역시 그런 걸 잘 못한다. 그럼에도 빚없이 이끌어올 수 있었던 데는 이사들과 동료 여성영화인들의 도움이 컸다. 역시 운이 좋았다고 생각한다. (웃음) 그래도 이제는 열심히 할 때까지 하고 물러나서 자원봉사라도 시켜주면 조용히 백의종군하는 심정으로 돕고 싶다. 이젠 도저히 가능한 일이 아니지만, 영화계 맏언니가 아닌 막내 같은 마음으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