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란한 CG는 없다. 탄탄한 시나리오는 있다. 우주는 전자파로 번뜩이는 대전(大戰)의 배경이 아니요, 자연스럽게 걷고 뛰는 것 외엔 그 어떤 특별한 액션도 없다. 격리된 인간의 내면을 설득력있게 조망하려는 패기만은 선연하다. <더 문>은 비범한 SF영화다. 주요 인물은 사실상 같은 배우가 연기하는 두명의 인물과 인공지능 컴퓨터 로봇뿐. 우주인의 개척정신을 배반하듯 인류가 발자국까지 남긴 지구의 위성 달에서 거의 벗어나지 않는다. 행성 하나는 우습게 날려버리는 트렌디한 SF영화를 기대한 관객이라면 당황할 만하다. “70년대 초반부터 80년대 후반까지의 고전 SF영화를 사랑한다”는 CF감독 출신의 신예 던컨 존스 감독은 말한다. “현대 SF영화와는 다른 작품을 만들고 싶었다.” 오랜만에 발견한 야심가의 데뷔작 <더 문>을 소개한다.
머지않은 미래. 샘 벨(샘 록웰)은 달 기지 사랑의 유일한 거주자이자 승무원이다. 인공지능 컴퓨터 로봇 거티(목소리 연기 케빈 스페이시)의 조력을 받아 달 표면에서 헬륨3를 채굴해 지구로 보내는 게 그의 주요 임무다. 헬륨3는 에너지난에 부닥친 지구인에게 더없이 소중한 무공해 자원이다. 3년이라는 계약기간도 2주 뒤면 끝날 테고, 지난한 시간을 인내한 대가로 그는 지구로 돌아가 아내 테스와 세살배기 딸 이브를 품에 안을 것이다. 통신위성이 고장나 지구와 실시간으로 교류할 수 없는 상황. 목성 위성으로 간간이 전달되는 테스의 영상 메시지만이 그에겐 드문 기쁨이다. 귀환 시기가 다가올수록 마음은 기대로 벅차오르는데, 그의 건강이 예전 같지 않다. 두통이 격해진다. 낯선 여인의 환영을 보는가 하면, 미심쩍은 영상이 스크린에 떴다 사라지는 걸 목격하기도 한다. 수상한 기운이 피어오른다. 월면 작업차를 타고 순찰나간 그는 설상가상 충돌사고로 정신을 잃는다. 눈을 떠보니 회복실. 거티는 건강을 빌미로 샘을 사랑 안에 가둬놓으려 하지만 그는 기지를 발휘해 끝끝내 밖으로 걸음하고 사고를 일으킨 월면 작업차에서 또 다른 샘을 발견한다. 회복실에서 깨어난 샘은 누구고, 원래의 샘은 누구인가.
샘 록웰과 정말 작업하고 싶었기에…
외모는 물론 기억까지 똑같이 공유한 샘과 또 하나의 샘. 샘들은 상대방, 나아가 자신의 정체를 알고 싶어 하고, 그 과정에서 그들을 고용한 기업 루나 인더스트리의 비밀이 드러난다. 캐릭터와 이름까지 동일한 배우 샘 록웰의 일인극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이 영화를 논하면서 먼저 짚고 넘어가야 할 요소 역시 캐스팅이다. <더 문>은 특정 배우와의 협업, 아니, 그 배우 자체가 영감의 원천으로 떠오른 이례적인 사례다. 다시 말해, 던컨 존스 감독은 샘 록웰과 작업하길 갈망해 처음부터 그의 마음을 끌 만한 영화를 만들고자 했고, <더 문>은 그 결과물이다. 던컨 존스 감독은 말한다. “다른 시나리오가 있었다. 역시 SF로 <뮤트>라는 작품이다. 그 영화에 대해 상의하려고 샘 록웰을 만났는데, 그는 내가 제의한 역할에 관심이 없더라. 나는 그와 정말 작업하고 싶었기 때문에 그렇다면 다른 영화를 만들자고 설득했다. 우리가 사랑하는 종류의 영화 말이다. 시기적으론 70년대 초반부터 80년대 후반 사이의 SF영화. 예컨대 <아웃랜드>와 <에이리언>, <사일런트 러닝>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같이 우주에서 일하는 블루칼라 노동자가 나오는 영화. 샘 록웰 역시 그런 캐릭터를 연기하고 싶어 했다.”
<더 문>의 야심은 확실히 반항아보다 모범생의 그것에 가깝다. 혁신을 꾀하기보다 고전 SF걸작의 캐논 안에서 이를 착실하게 모방하고 적절하게 발전시키는 쪽이다. 특히, 던컨 존스 감독이 직접 언급한 영화들의 흔적은 뚜렷하다. 우주 노동자를 둘러싼 거대 기업의 음모는 <아웃랜드>에서, 인공지능 컴퓨터의 존재는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에서, 고립이라는 테마와 로봇 조력자는 <사일런트 러닝>에서, 우주선 안에서 긴장을 자아내는 방식은 <에이리언>에서 의식적으로 차용했다. <블레이드 러너>의 영향력도 무시할 수 없다. 목표는 명확했다. “<트랜스포머>나 <2012> 같은 영화는 스펙터클하지만 캐릭터나 서사는 부족하다.” 특수효과가 지금처럼 발달하기 이전에 완성된, 그러나 질적인 면에서 CG 범벅의 최신작을 가뿐히 넘어서는 고전영화에서 던컨 존스 감독이 배운 것은 정면승부였다. 제작비는 500만달러가량. 한편으로 배우의 수를 줄이고, 배경을 밀실로 한정짓고, 캐릭터와 서사, 아이디어 자체에 집중한 것은 극도로 적은 예산으로, 다른 장르도 아니요, 기술적인 부분에 상당한 자본을 투여해야 하는 SF영화를 가능케 한 처방이기도 했다.
여기서 한국 관객이라면 묻고 싶어 견딜 수 없을 질문 하나. 영국 감독의 영화에 등장하는 달 기지의 이름이 러브(Love)가 아닌 사랑(Sarang)인 까닭은 뭘까. “영화의 스토리를 쓸 즈음 박찬욱 감독의 <올드보이>를 봤다. 루나 인더스트리가 어떤 회사인지 결정해야 했던 때인데, 문득 한국과 미국의 합작 기업으로 설정하는 게 설득력있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한국은 새로운 테크놀로지의 개척자 아닌가. 당시 클로닝(유전자 조작)에 얽힌 이슈가 많았는데, 한국에서 클로닝에 성공했다는 소식도 있었고. 영어권 관객은 그 의미가 무엇인지 절대 알 수 없다는 이점도 있다. (웃음) 정말 아름다운 발성의 단어다.” 또 다른 이유. 하드SF의 외피를 두르고 있지만 <더 문>은 본질적으로 지고한 멜로드라마다. 샘은 홀로된 시간에 아내와 딸을 그리고 또 그리면서 인내한다. 그는 사랑, 좁게는 가족애라는 가치를 맹신하는 소박한 남자다. 테스와 이브는 명백한 문학적 레퍼런스를 떠올리게 하고, 마태(Matthew) 등 헬륨3 채굴기의 이름 역시 성경의 12사도에서 빌린 것이다. “샘은 아마도 그런 캐릭터다. 미국 중서부 태생의 기독교적인 가치관을 따르는 블루칼라 노동자 계층. 더 많은 갈등을 자아내기 위한 설정이다.”
“멸종 위기의 하드 SF를 구하다”
달. 저 멀리 지구가 엿보이는, 그래서 더욱 우울한 바윗덩어리 지평선. 아폴로 11호의 미션을 찍은 마이클 라이트의 사진집 <풀 문>을 주요한 레퍼런스로 창조한 달의 풍광은 아름답지만 또 숨막히게 냉혹하다. 던컨 존스 감독은 달이라는 공간이 함축하는 신화적 의미를 영리하게 끌어온다. 고립이라는 테마는 이를 빌려 주인공의 끝없는 고독으로 효과적으로 변주한다. 미니멀한 프로덕션디자인과 건조한 대사, 제한된 공간과 캐릭터라는 악조건에서도 <더 문>은 감정으로 요동친다. 아내의 육체를 쓰다듬는 꿈을 꾸던 샘은 기상 알람에 놀라 깨어난다. 그는 여전히 혼자다. 그에게 지구는 볼 수는 있으되 갈 수는 없는 잔인한 꿈의 공간이다. 진실을 깨달은 뒤에도 샘은, 특히, 3년간의 임무를 마치기 직전인 샘은 거짓에 저항할 힘조차 잃었다. 고립은 인간의 내면을 얼마나 극적으로 변화시키는가. 이 가엾은 남자는 날조된 희망임을 알면서도 이를 고수할 수밖에 없다. 1인2역을, 무엇보다 샘들 사이의 미묘한 차이를 예민하게 체화한 샘 록웰의 연기는 탁월하다. 데이비드 크로넨버그 감독의 <데드 링거>에서 제레미 아이언스가 선보인 것과 다른 차원의 열연이다.
“알다시피 CF에선 CG를 무척 많이 사용한다. 나는 CG를 사용하더라도 라이브 액션과 결합해야만 효과적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디스트릭트9>이 아주 좋은 예다. 우리는 모델을 사용해 많은 부분을 촬영했고, 그걸 CG로 강화했다. 배경에 산이나 먼지를 그려넣는 식으로.” 던컨 존스 감독은 테크니션으로서 주특기인 CG의 영역을 축소하는 대신, <에이리언> <아웃랜드> 등에서 슈퍼바이징 모델 메이커로 활약했던 빌 피어슨을 초대했다. “70∼80년대엔 모델 메이킹 분야의 전문가가 여럿 있었다. 그들은 실용적인 면에서 상당히 높은 수준까지 도달했다. 그리고 CG혁명이 일어났다. 지금 세대는 그들의 기술에 대해 잘 모른다. 더이상 배우려 하지 않는다. 빌 피어슨은 늙은 남자들과 팀으로 일했고, 그들을 도로 데리고 나타났다.” <더 문>의 비주얼과 프로덕션디자인은 명백히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 <아웃랜드> <사일런트 러닝> 등 빌 피어슨 시대 영화의 자장 아래 있고, 특히 로저 에버트는 인공지능 컴퓨터이자 일종의 로봇인 거티를 두고 ‘스케일이 작아진 할’(<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에 나오는 컴퓨터 이름-편집자)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이렇게 덧붙였다. “케빈 스페이시의 목소리는 할을 위해 사용했던 것과 같은 전자 합성 장치로 프로그램된 것으로 보인다.”
로튼토마토에서 89%의 신선도
영화는, 무엇보다 SF라는 장르는 던컨 존스 감독에게 일찍부터 애착과 동경의 대상이었다. 셀레브리티 부모 아래 태어난 재능있으되 고집스러운 남자들이 그러하듯 그 역시 열여덟 무렵 데이비드 보위를 연상시키는 ‘조이 보위’라는 이름을 버렸다. “아버지의 출연작이 강력한 레퍼런스는 아니”라고 강조했던 그는 그러나 “SF에 향한 사랑만은 명백히 그에게서 물려받은 어떤 것”임을 인정했다. “아버지는 내가 아는 한 가장 책을 제대로 읽는 사람이다. 유년 시절 내가 읽은 책의 대부분은 그가 권한 것이었다. 조지 오웰의 <동물농장>이나 <트리피드의 날>을 쓴 존 윈덤 같은 영국 SF작가의 소설이라든지. 이후 흥미를 끈 작가들은 J. G. 발라드, 영화 <블레이드 러너>의 원작을 쓴 필립 K. 딕 등이다.”
독서 취향을 놓고 볼 때 그가 철학을 전공하고 박사 과정까지 밟은 건 자연스러운 귀결로 보인다. 인생에서 가장 큰 소망을 이루기로 결심한 연출자 지망생은 이후 런던필름스쿨로 행로를 수정한다. 그럼에도 인간의 본연을 고민하는 철학자의 기질은 데뷔작이라기엔 더없이 우아하고 원숙한 <더 문>의 심장이다. 이론적인 면에서 주브린 로버트의 저서 <엔터링 스페이스>에서 해답을 얻은 이 영화는 신인감독의 패기와 더불어 견실한 논리와 소크라테스적인 사고가 균형을 이룬 드문 하드SF다.
로저 에버트는 이렇게 썼다. “<더 문>은 멸종 위기에 처한 하드SF의 우월한 예다. 종종 디지털을 비롯한 외계의 지적 존재 혹은 그 비슷한 것들과 인류 사이의 교류를 다루는. 존 W. 캠벨 주니어는 이 장르의 대부였다. 이 영화는 진정으로 아이디어에 전부를 건다. 그건 오로지 감정을 위한 것이다. 결국, 우리의 감정은 얼마나 리얼한가. 우리는 얼마나 리얼한가. 어느 날 나는 죽을 것이다. 내가 사용하는 랩탑은 인내하면서 기다릴 수 있다.” <더 타임스>는 “훌륭한 모델과 레트로적이지만 놀라울 정도로 사실적인 월면 풍경”을 거론하면서 다음과 같은 문장을 추가했다. “인간으로 사는 게 무슨 의미고 무엇을 필요로 하는지에 대한 영화다.” <할리우드 리포터>는 게리 쇼의 촬영과 클린트 만셀의 음악이 드라마를 더욱 강렬하게 만들었다고 평했다. <더 문>은 미국 영화정보 사이트인 로튼토마토에서 89%의 신선도를 획득했고, 아테네국제영화제, 디나드영화제, 에든버러국제영화제, 시애틀국제영화제 등에서 연거푸 상을 거머쥐었다. “나 자신만의 재능으로 성공하고 싶다”는 던컨 존스 감독의 온전한 첫 번째 승리다. 이젠 “제이크 질렌홀이 출연”하고 “할리우드 예산의 기준에 더 가깝다”는 차기작 <소스 코드>(Source Code)를 애타게 기다릴 시간이다.
<더 문>의 던컨 존스 감독
“불가능한 기술에 성공했다”
던컨 존스 감독의 관심사엔 경계가 없다. 남다른 성장 환경으로 어린 시절 호주와 일본에 머무르는가 하면 세계 곳곳을 여행한 덕분이 크다. 아시아, 나아가 한국 문화에 관심이 많고, 한글을 읽고 쓰는 법을 직접 배우기도 했다니 국내 관객 입장에선 더욱 반가울 일이다. 다음은 11월12일 프라자호텔에서 던컨 존스 감독과 직접 만나 나눈 이야기 중 일부다.
-데뷔작으로 상당히 도전적인 영화다. =캐스팅이 가장 중요했다. 한 영화에 배우를 한명밖에 기용할 수 없다면 당연히 카리스마있는 인물을 골라야 한다. 이 영화는 샘 록웰을 위해 쓰였고, 그는 매우 재능있는 배우다. 그런 면에서 캐스팅은 차라리 쉬웠고, 오히려 기술적으로 도전적인 부분이 많았다. 특히, 샘이 그 자신과 이야기하는 숏. 대화를 주고받는 타이밍이 맞아야 자연스럽게 보이는데, 이를 위해 새로운 기술을 발명해야 했다. 샘이 또 다른 버전의 샘을 건드리는 장면도 마찬가지다. 그건 우리가 처음 성공한 기술이다.
-완전히 새로운 기술이라는 뜻인가. =그렇다. 우리가 참고한 영화는 두편이다. 먼저 제레미 아이언스가 쌍둥이를 연기한 <데드 링거>. 기술의 표준으로 삼을 만큼 DVD가 훌륭했다. 두명의 제레미 아이언스가 나오는 장면을 어떻게 만들었는지, 그걸 우리가 어떻게 개선할 수 있을지 수차례 보면서 고민했다. 또 <어댑테이션>을 연출한 스파이크 존즈를 만나 그가 자신의 영화에서 성취한 부분에 대해 들었다. 그러다가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다른 버전의 두 사람이 서로에게 육체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장면은 누구도 시도하지 않았다는 것을. 우린 이번 영화에서 그걸 몇 차례 가능하게 만들었다.
-거티의 디자인은 어디서 착안한 건가. =어떤 리뷰어는 그를 ‘안티 할’이라고 부르던데. (웃음)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와 <사일런트 러닝>이 레퍼런스다. 극중 브루스 던을 따라다니는 작은 로봇 세개 말이다. 거티는 하나지만 세개의 섹션으로 이뤄진다. 즉, 두개의 팔이 따로 돌아다니니까 세개로 나눠지는 셈이다. 이모티콘이 뜨는 얼굴 부분은 텍스트 메시지에서 차용한 거다. 모든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는 단순한 형태의 커뮤니케이션을 이용하고 싶었다.
-단편 <휘슬>(Whistle)은 어떤 내용인가. =근미래를 담은 SF영화다. 개인적으로 뿌듯하게 여기는 작품이다. (웃음) 가족들과 함께 스위스 알프스에 사는 암살자가 주인공이다. 그는 컴퓨터로 위성을 조종해 사람들을 죽이는데, 실수로 한 소년을 살해하고 죄책감을 느낀다.
-차기작인 <소스 코드>는 SF스릴러라고 알려졌는데. =시간여행에 관한 영화다. <12 몽키즈>과 흡사한 면이 있다. 한 남자가 열차 폭발에 얽힌 미스터리를 찾아내려 한다는 내용이다. 내가 각본을 쓰지 않은 영화를 처음 연출하는 셈인데, 상당한 기회다. <소스 코드>가 잘 끝난다면 내가 정말로 만들고 싶은 영화인 <뮤트>를 시작할 수도 있을 거다.
-<뮤트>라면 샘 록웰에게 먼저 권한 작품 아닌가. =맞다. 미래 베를린을 배경으로 한 SF영화다. 말을 못하는 사람, 다시 말해 ‘뮤트’가 주인공으로, 그는 실종된 여자친구를 찾기 위해 온 도시를 헤맨다. <블레이드 러너>에서 많은 부분 영감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