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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영객잔] 줌이라는 기호놀이

홍상수의 <첩첩산중>과 그의 근작들을 숙고해보니

이것이 어떤 이정표인지, 아니면 짧은 휴식인지, 혹은 간주곡 같은 것인지, 이도 저도 아니면 새로운 시도인지는 분명치 않다. 점점 더 홍상수는 비탈길에 선 것처럼 속도를 내고 있다. 마치 그가 쓰러지지 않는 유일한 방법은 더 빨리 달려가기라도 하는 것처럼 ‘새로운’ 영화에 몸과 마음을 내주고 있다. 몸과 마음? 그렇다. 그는 어떤 것을 의도하기보다는 자신을 사로잡고 있는 그 무엇을 (그런데 그 무엇은 무엇일까?)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기라도 한 양 서둘러 존재의 증명을 해야 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서두르고 있다. 그러면서 홍상수는 점점 더 파악하기 어려워졌다. 홍상수는 매우 공을 들여 이미지란 헛것이라는 설명을 했다(<해변의 여인>). 나는 그가 그 다음 영화를 좀더 미룰 것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틀렸다. 심지어 다음 영화의 주인공은 ‘대마초를 피우고 파리로 도망 간’ 화가다(<밤과 낮>). 이미지, 영화, 회화. 소란스러운 허깨비들. 환각. 점과 선. 어떻게 그들 사이를 연결할 것인가의 문제. 어떻게 거기서 정신을 잃지 않을 것인가? 내가 홍상수에 대해서 마지막으로 쓴 글은 <밤과낮>에 대한 짧은 소개였다(시네마_디지털_서울 2008 카탈로그). 그런 다음 나는 그의 영화에 대해 생각할 시간이 필요하다고 여겼다. 왜냐하면 마치 시위를 떠난 화살처럼 멈추지 않고 계속 그것을 붙들려는 내 손을 벗어나고 있다는 느낌을 주었기 때문이다.

그 사이에 홍상수는 <잘 알지도 못하면서>, 중편영화 <첩첩산중>, 다음주에 프린트가 나온다는 <하하하>를 찍었고 이미 지금 <사친>(思親)이라는 가제로 알려진 열한 번째 영화를 촬영 중이다. <첩첩산중>은 <잘 알지도 못하면서>의 촬영을 끝낸 다음 두달 보름 뒤에, 그러니까 2008년 11월 둘쨋주에 전주에서 닷새 동안에 모두 찍었다. 그러나 <첩첩산중>이 <잘 알지도 못하면서>에 시간적으로 매우 가깝게 있긴 하지만 두 영화 사이에서 어떤 친화성이 느껴지거나 혹은 서로의 그림자가 어른거리지는 않는다. 두 영화는 거의 동일한 스탭들과 작업했고(김훈광 촬영, 정용진 음악, 함성원 편집) 동일한 디지털카메라인 소니 EX 1로 찍었으며 정유미가 연이어 나오긴 하지만 전혀 다른 도시에서 찍었고 (이전에는 제천에서 제주도로, 그러나 여기서는 전주) 전혀 다른 계절이다(여름, 그리고 여기서는 초겨울, 혹은 늦가을). 하지만 무엇보다 여기서 먼저 눈을 돌리게 되는 대상은 다시 한번 등장인물들의 세계가 소설가의 무리라는 점이다.

좀더 홍상수처럼 말하면 여기서는 소설의 효과로서 활동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로 돌아왔다. 영화감독은 영화 주변을 떠돌고(<극장전> <해변의 여인> <잘 알지도 못하면서>) 소설가들은 소설 주변을 떠돈다. 내 기억이 틀리지 않다면 <첩첩산중>은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 ‘이후’ 처음으로 다시 소설의 사교계 안으로 돌아온 영화이다. 철자로 이미지를 다루는 사람들의 세계. 간접적인 이미지. 말을 믿지 않는 홍상수가 언어를 다루는 자들 안으로 들어와 그들 사이의 사교에 관한 힘의 관계와 만남 그 사이의 행동들을 바라보고 거기서 서로가 어떻게 빠져드는지를 다룬다. 이때 이미지는 글자보다 더 나쁜 것일까, 덜 나쁜 것일까? 아니면 직접적 이미지와 간접적 이미지 중에서 어느 쪽이 더 위험한 것일까?

첩첩산중, 말하자면 미로

우선 <첩첩산중>의 무대. 전주는 홍상수의 영화 안에서 나쁜 기억이다. 보경의 남편 동우는 전주에 출장 갔다가 여관에서 커피 배달하는 아가씨와 섹스를 한 다음 성병에 걸려서 돌아온다(<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 그런 다음 홍상수의 등장인물이 다시 전주에 간 적은 없다. 물론 그의 다른 등장인물들도 같은 도시를 다시 방문하지는 않았다. <첩첩산중>은 처음으로 같은 도시를 다시 방문한다. 하지만 소설을 쓰는 사람은 동우가 아니라 보경의 불륜 상대인 효섭이었다. 그러므로 정수기를 팔러 다니는 동우와 소설가 지망생인 미숙은 만날 일이 없다. 게다가 <첩첩산중>은 전주라는 도시를 보여주는 그 어떤 지표도 없기 때문에 이 영화를 보고 전주를 찾아간다면 길을 잃기 십상이다. 말하자면 미로. 첩첩산중.

이야기는 간단하다. 아파트가 ‘疊疊山中’처럼 보인다(이 한자를 유심히 보아주기 바란다. 마치 아파트처럼 생긴 글자). 영화는 아파트에서 시작한다. 말하자면 아무 데서나 시작한다는 뜻이다. 미숙(정유미)이 서울말을 쓰기는 하지만 거기가 서울이라는 어떤 보장도 없다. 마찬가지로 전주에 갔지만 아무도 호남 말을 쓰지는 않는다. 말하자면 산에서 산으로 이어지는 동선. 미숙은 선배 진영(김진경)을 만나러 차를 끌고 전주에 내려간다. 그런데 진영은 마침 “엄마와 싸워서” 미숙을 자기 집에 재워주지 못한다. 미숙은 알고 지내던 소설가 전 선생(문성근)에게 전화를 해서 만난다. 둘은 낮술을 마시면서 최근에 상을 받은 소설가 명우(이선균)를 성토한다. 함께 수만모텔에 가지만 “안 하던 짓을 자꾸 하려고 해서 뛰쳐나왔다” (그런데 안 하던 짓이 무엇인지는 끝내 알 수 없다). 진영의 집에서 잔 미숙은 그녀의 방에서 전 선생의 시계를 발견하고 “오전 내내 꼬치꼬치 캐물은 다음 둘 사이의 관계를” 알게 된다. 전주에 내려온 김에 미숙은 “진짜 존경하는” 은희경 작가의 집을 찾아간다. 우연히 집 앞에서 존경하는 작가와 마주치지만 은희경 작가는 “엄마와 싸워서 들어가 봐야” 한다. 미숙은 그녀 앞에서 “좋은 글을 쓰겠다”고 다짐한다. 그런 다음 서울에 사는 명우에게 전화를 해서 내려오라고 한다. 그리고 저녁에 미숙과 명우, 진영 셋이서 술을 마신다. 미숙과 명우는 취해서 함께 모텔에 가고, 그들이 떠나는 것을 본 진영은 전 선생에게 전화해서 “모텔을 잡아놓고 기다리겠”다고 말한다. 다음날 정오쯤 밥을 먹으러 나온 네 사람은 동해횟집에서 마주친다. 밥만 먹고 그냥 가려던 명우와 미숙에게 전 선생은 불러서 왜 인사를 하고 가지 않느냐고 야단을 친다. 명우는 죄송하다고 사과를 한다. 진영은 괜찮다고 대답한다. 쳐다보던 미숙은 “챙피한 줄도 모르고”라고 한 다음 커피를 집어던지고 그 자리를 떠난다. 이 영화의 마지막 대사는 떠나가는 미숙의 등에 들리는 전 선생의 한마디다. “저 싸가지.” 모텔이 ‘疊疊山中’처럼 보이면서 끝난다. 이박삼일.

<극장전> ‘이전’과 ‘이후’

<첩첩산중>은 홍상수의 유일한 중편영화다. 그 자신의 말에 의하면 다시 중편영화를 만들게 될 것 같지는 않다고 대답했다. 물론 앞으로의 일은 알 수 없다. 이 중편영화는 좀 이상한 자리에 놓여 있는데 <극장전> ‘이후’ 홍상수의 영화는 점점 길어지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해변의 여인>은 2시간7분이다. 그 바로 앞에 있는 <극장전>이 1시간29분, 좀더 앞의 <여자는 남자의 미래다>가 1시간27분이라는 걸 생각하면 이건 갑작스러운 길이다. 물론 세 번째 영화 <오! 수정>이 2시간6분이긴 하지만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이 1시간54분, <강원도의 힘>이 1시간48분, 그리고 네 번째 영화 <생활의 발견>이 1시간55분이라는 걸 생각한다면 홍상수에게 2시간은 어떤 물리적 한계선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런 다음 <밤과낮>은 2시간24분에 이른다(그의 영화 중에서 이제까지는 제일 길다). 그리고 <잘 알지도 못하면서>는 2시간6분이다. 그는 <해변의 여인> ‘이후’ 2시간의 시간을 넘겨서만 이야기의 리듬을 이어갔다. 영화가 시간의 예술이라는 식상한 표현의 배후에는 매우 중요한 진실이 있다. 무엇보다 상영시간은 영화에서 가장 물리적인 결정이라는 사실이다. 일단 상영시간이 결정되면 관객은 그 시간을 도리없이 체험해야 한다. 차라리 나는 영화란 스펙터클이 아니라 시간의 체험이라고 말하고 싶다.

홍상수는 마치 <극장전> ‘이전’과 ‘이후’가 있는 것처럼 영화의 시간을 늘렸다. 물론 그것이 영화 안의 리듬과 동일하다고 말할 수는 없다. 하지만 홍상수는 어느 순간 갑자기 리듬이 빨라지거나 혹은 느려지는 것을 원치 않는다. 그래서 홍상수의 영화에서 리듬은 일종의 간격이다. 둘 사이의 거리. 둘 사이의 공존. 세워진 면. 홍상수는 자꾸만 볼록하거나 오목한 면을 “다림질을 하고 싶다”고 말한다. 지각으로 이루어진 면적들. 그 사이에 일정한 간격을 두고 영화가 진행되기 시작한다. 이것과 저것 사이에서, 이 사람과 저 사람 사이에서, 이 숏과 저 숏 사이를, 혹은 이 사건과 저 사건을, 어느 정도의 간격으로 세워놓을 것인가, 라는 문제. 홍상수라면 이것을 짝짓기라고 불렀을 것이다. 만사형통? 천만의 말씀. 홍상수는 어느 정도의 간격으로 세워놓을 것인가를 결정하는 순간 거기서 이야기가 발생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그에게는 관계를 서술하는 대신 얼마만큼 정확한 간격으로 세워놓느냐가 중요한 문제가 되었다. 이것이 처음에는 분명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홍상수 영화 안에서 구조라는 문제가 너무 압도적이어서 그의 영화 안에서 활동하는 간격이 분명치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곧 구조는 와해되기 시작했다. 아니, 차라리 와해시키기 시작했다.

홍상수는 구조를 만드는 순간 곧장 원하건 원치 않건 고정적 지시자가 발생하며 의미의 소급이라는 방식으로 해명이 시작된다는 것을 알았다. 그가 싸우려는 욕망의 경제. 그러기 위해서 홍상수는 구조 대신 비일관성으로 이루어진 감각의 흐름에로 이끌린다. 세상의 표면에 대한 감각. 물론 그곳은 환상이 사라진 사막이다. 그 사막 위에 세워진 면들. 면들 사이로 때로는 끈적거리고 때로는 미끈거리면서 흘러(내리거나 흘러)가는 감각. 홍상수가 아무리 열심히 사랑을 다루어도 거기서 낭만적인 정서가 느껴지지 않는 것은 거기에 자기의 자리를 버리고 타자라고 가정된 대상을 껴안으려는 어떤 노력도 없기 때문이다. 무서울 정도로 그 자리에 머물고 있는 면들. 그 사이의 액체 같은 감각. 이때 종종 홍상수의 영화를 설명하면서 가장 자주 등장하는 말은 반복과 차이이다. 둘은 서로 자리를 바꾸어서 끈질기게 나타난다. 여기서 이 둘이 자리를 바꾸면서 우리에게 던지는 통찰은 대부분 희극적 웃음이다. 내 질문은 반복과 차이가 자리를 바꾸면서 나타날 때 어디서 멈출 것이냐는 것이다. 만일 이것을 중간에 중단시키지 않으면 사태가 끔찍해진다는 것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만일 홍상수의 영화에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어디 한번 끝까지 가보자고 밀어붙이면 어떻게 될 것인가? 기다리는 것은 반대로 비극적 파국이다. 그때 우리는 홍상수 영화에서 파국이 예언되는 것을 느껴보는 대신 그것을 고스란히 경험해야 한다는 사실을 환기해야 한다. 홍상수의 예술적 재능은 간격의 마지막 순간 더이상의 간격이 없다고 갑자기 텅 빈 공간을 제시함으로써 우리에게 안겨주는 거의 무아지경에 가까운 실재와의 대면이다. 말하자면 그 순간. 그 다음 간격의 순간을 기다리는데 문득 마주치는 텅 빈 자리. <첩첩산중>은 그 텅 빈 자리를 가장 작게 보여준다. 나는 여기서 짧다, 고 말하는 대신 작다, 고 말했다. 왜 그런 인상을 받았을까? 나는 영화를 볼 때는 단지 몇개의 면을 빼놓고 진행되고 있기 때문에 짧다고 생각했는데 다 본 다음의 인상은 작다는 것이었다. 길이로부터 면적에로 바뀐 인상. 이것이 <첩첩산중>을 본 다음 가장 먼저 든 궁금증이었다.

시각적 감각의 회복을 노리다

약간의 우회. 영화를 말하면서 음악을 끌어들이는 것은 위험한 일이다. 음악은 영화와 존재방식이 다르기 때문이다. 다만 여기서는 태도에 한해서만 말할 것이다. 홍상수는 점점 더 재즈에서의 임프로비제이션에 가까운 영화를 만들고 있다. 이 방법을 어디까지 더 밀고 나아갈지 알 수 없지만 그는 마치 세션을 하는 것처럼 영화를 만들고 있다. 물론 영화는 재즈가 아니다. 이 말은 비유가 아니다. 그날의 공연. 알 수 없는 감흥. 그저 선율의 윤곽만을 정해놓은 상태. 누가 누구를 만나느냐는 문제. 세션으로서의 영화. 이때 홍상수에게 함께 연주할 상대는 배우들이다. 재즈의 대가들처럼 홍상수는 배우들을 자유롭게 자기 영화에 초대한 다음 그 배우들을 건드린다. 그때 홍상수는 먼저 대사로 건드리고, 그런 다음 서로 다른 배우들끼리 서로를 건드리게 한 다음, 카메라로 건드린다. 말하자면 그에게 카메라는 가장 마지막에 건드리는 공명현상이다. 서 있는 면들 사이의 진동. 영화적 기호들 사이의 시청각적 긴장. 이때 홍상수는 약간 수줍게 사람을 바라본다. 나는 세상이 아니라 사람이라고 썼다. 홍상수 영화의 핵심은 결국 사람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프레임은 대부분 초상화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것이 전부가 아니다. 그의 사람은 세잔이 바라본 사과와 마찬가지, 라는 사실을 덧붙여야 할 것이다. 다만 다른 점이 있다면 홍상수의 사과는 걸어다니고 거짓말을 아주 잘할 뿐만 아니라 유혹하고 버림받으면서 키스도 하고 섹스도 한다는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그 정도의? 그렇다. 그저 그 정도이다. 이 차이를 과장하려 드는 것은 자꾸만 홍상수 영화를 텔레비전 드라마처럼 보려는 비평들의 특징이다. 홍상수의 영화가 다른 영화들과 가지는 결정적 차이점. 홍상수는 그 사람들을 그렇게 쳐다보는 대신 그렇게 느껴보려고 한다. 홍상수는 그 사람이 누구냐고 물어보는 대신 어떻게 느껴볼 것인지를 생각하면서 계속 건드린다. 그가 현장에서 배우들을 자유롭게 놓아둔다는 것은 그의 현장을 보지 못한 사람들이 하는 말이다. 홍상수는 매우 엄격하게 배우들을 다룬다. 무엇보다도 그의 엄격함은 대사에 종속된 신체의 관리에서 오는 것이다. 등장인물들은 대사의 증인처럼 말을 하고 그 말에 자기의 행동을 복종시킨다. 이때 인물들의 리듬은 절대적으로 대사에서 오는 것이다. 아니, 차라리 대사하는 면들이라고 나는 말하고 싶어진다. 이때 이 면들을 무엇으로 건드려야 할까?

나는 홍상수의 줌이 여기서 출발했다고 생각한다. 홍상수는 <극장전>에서부터 갑자기 줌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모두들 이 갑작스러운 줌에 대해서 당황했다. 그런 다음 영화 안에서의 줌의 일관성, 혹은 의미, 어쩌면 의도를 설명하기 위해 노력했다. 혹은 그에게 직접 물어보았다. 홍상수는 일관되게 대답했다. “아니에요, 그냥 거기서 그래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그런 다음 약간 귀찮다는 듯이 덧붙였다. “저는 게을러서 그런지 화면을 나누어야 하는데 나누는 대신 그렇게 줌을 통해서 다르게 했어요.” 이상하게도 그 다음부터 모두들 마치 줌을 보지 못한 것처럼 다루기 시작했다. 아니 거기서 줌이 있지도 않았다는 듯이 설명하기 시작했다. 귀차니즘의 만연. 나는 그런 태도에 동의할 수 없다. 줌은 아무렇게나 거기서 할 수 있는 선택이 아니다. 줌이 활동하는 순간 숏은 갑자기 자기의 성질을 바꾸어야 한다. 단지 화면의 크기가 변하거나 대상에 다가갔다는 것이 아니라 줌이 활동하는 순간이 문제가 되기 때문이다. 줌은 이제까지 보고 있던 화면에서 영화라는 기계의 양태를 드러내면서 카메라라는 존재를 말 그대로 ‘보여준다’. 좀더 정확하게 카메라가 건드리는 것은 대상과 프레임 그 사이이다. 말하자면 간격.

그 다음. 홍상수의 설명에 대해서도 동의할 수 없다. 만일 그가 줌을 사용하는 것이 단지 투숏에서 더 들어가는 것에 지나지 않다면 그럴 수도 있다. 그러나 홍상수는 단지 한 사람을 찍을 때도 종종 그렇게 했다. 혹은 그렇게 구태여 할 필요가 없다고 느낄 때도 그렇게 했다. 이를테면 <첩첩산중>에서 진영의 집에 있는 철창 안의 두 마리의 개를 향해 갑자기 줌이 들어가는 이유가 그 두 마리의 강아지 투숏을 “나누어 찍기 귀찮어”서라고 말할 수 있을까? 홍상수는 줌의 사용에 대해서 설명하고 싶어 하지 않는다. 하지만 분명히 홍상수는 줌에서 어떤 자유를 찾은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이제는 점점 더 많아져서 거의 줌의 과잉에서 오는 화면의 일시적인 무너짐을 느낄 정도다. 마치 인상주의 다음에 도착한 어떤 야만성에의 매혹. 쳐다보던 카메라가 갑자기 대상과 갖고 있던 거리의 한계를 넘어서 다가갈 때 홍상수는 몬드리안이나 말레비치, 혹은 칸딘스키 같은 효과가 일어나길 기대한 것인지도 모른다. 물론 지나치게 다가갈 때 잭슨 폴록이나 에드 라인하르트, 루치오 폰타나가 될지도 모른다. 마치 회화가 왜 우리는 물질이 전자와 양자, 중성자 덩어리라는 것을 그리지 못하는가, 라는 질문을 안고 갑자기 형상을 버린 것처럼 홍상수는 왜 사람을 찍는 것뿐만 아니라 그 사람의 몸과 마음을 느껴보지 못하는가, 라면서 건드린다. 홍상수의 영화에서 줌은 언제나 눈에 잘 보일 뿐만 아니라 일종의 기습처럼 보인다. 예기치 않은 순간에 두들기는 노크와도 같은 효과. 면의 진동. 홍상수가 여기서 노리는 것은 우리의 시각적 감각의 회복이다.

올 한국영화에서 가장 아름다운 장면

퀴즈를 한번 해보자. <첩첩산중>에서 첫 번째 줌은 언제 등장하는가? 대답은 미숙이나 진영, 혹은 진영 집 앞의 나무에 매달린 감이 아니라 미숙의 전화를 받으면서 “이빨이 아프다”고 대답하는 전 선생의 담배를 피워 무는 모습이다. 영화 안의 리듬적인 인물의 등장. 보이스 오버를 장악한 화자 미숙이 먼 길을 찾아온 대상 진영, 그런데 갑자기 이야기가 곁길로 새면서 전 선생이 등장할 때 줌은 그의 몫이다. 하나의 능동에서 다른 능동으로. 힘의 분산. 감각의 흐름은 갑자기 다른 쪽으로 방향을 돌린다. 다음 장면. 이때 줌을 둘러싼 맹렬한 권리투쟁이 벌어진다. 왼쪽에 전 선생이 앉았고 오른쪽에 미숙이 앉아서 낮술을 마신다. 그때 미숙이 말한다. “선생님이 (제가 써야 할 글을) 다 써버렸어요.” 갑자기 줌은 두 사람의 내밀한 관계 사이로 스며들기라도 하듯이 화면을 가득 채울 것처럼 다가간다. 하지만 여기가 끝이 아니다. 그런 다음 다시 한번 줌으로 전 선생을 밀쳐내고 미숙에게로 다가간다. 두번의 줌. 그러나 전 선생은 “그 개새끼”라고 명우를 욕하면서 미숙에게 다가간 카메라를 팬으로 다시 자기에게 끌어당긴다. 말하자면 힘의 밀고 당기기. 그때 힘은 느낌에서 나온다. 줌과 팬. 영화에서 두개의 운동. 그러나 이 운동은 얼마나 웃기는가. 세 번째(혹은 네 번째) 줌은 다음날 아침에 뜬금없이 진영 집의 강아지 두 마리를 보여준 다음 갑자기 그 두 마리에게 줌인한다. 두 마리의 개. 나는 이 두개의 신을 서로 결합해서 의미를 만들 생각은 없다. 그러나 미숙과 전 선생을 보여준 다음 두 마리의 개를 우리 앞에 같은 방법으로 전시할 때 그것은 줌이라는 기호의 외설적 누설처럼 느껴진다.

아마도 미숙이 숲길을 걸으면서 전 선생과 통화하는 장면은 <첩첩산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장면일 뿐만 아니라 올해 한국영화에서 가장 아름다운 장면의 하나이기도 할 것이다. 이 영화의 유일한 풍경이기도 할 장면에서 줌은 거의 무너져내리는 미숙을 따라 들어간다. 숲길은 비스듬하게 프레임을 가로지르고 있으며 미숙은 그 길을 따라 걸으면서 전 선생과 통화를 한다. 서 있는 나무들. 미숙은 소리를 지르다가 땅바닥에 거의 쓰러지다시피 한다. 세개의 운동. 수직으로 서 있는 나무(진영을 만났을 때 집 앞의 감나무를 따라 올라가던 카메라의 팬의 기억. 이전에도 이후에도 다시 등장하지 않는 나무). 전 선생과 통화를 하는 미숙에게 수평으로 다가가는 줌(전 선생을 영화에서 처음 보았을 때의 줌인, 반복하는 미숙과의 전화). 두개의 흔적의 힘. 지금 전 선생의 목소리를 들으면서 수직으로 하강하듯이 쓰러지는 미숙. 세개의 면이 겹쳐진 흔적과 운동. 팬과 줌.

<첩첩산중>에서 맨 첫 장면의 아파트 ‘疊疊山中’과 맨 마지막 장면 모텔 ‘疊疊山中’ 사이에 있는 세 번째 ‘疊疊山中’은 은희경 작가의 집 앞일 것이다. 이 장면은 이 영화에서 가장 이상하게 찍혔다. 차를 끌고 미숙은 “전 선생님보다 훨씬 좋아하는 작가”를 만나고 싶어서 집을 찾아간다. 이때 붉은 벽돌로 둘러싸인 막다른 골목 계단 집은 마치 산속에서 길이 사라진 것처럼 보일 정도이다. 그 집 앞에서 서성이는 미숙에게 줌으로 다가간다. 그런데 이상한 방식으로 미숙은 줌을 피하듯이 빠져나가서 계단을 올라간다. 철창 너머의 “전 선생님보다 훨씬 좋아하는 작가”의 집 안 풍경. 마치 영화 이야기 저편에 존재하는 현실 속의 소설가의 삶의 공간. 둘 사이를 가로막는 철창 대문. 이편과 저편. 그런데 갑자기 뒤에서 ‘진짜’ 은희경 작가가 나타난다. 이때 은희경 작가와 미숙을 보여주기 위해서 줌아웃을 한다. 여기서 줌아웃은 이 영화에서 유일하다는 것을 환기해주기 바란다. 영화 안에 찢고 들어온 실재. 미숙이 서 있는 영화와 철창 저 너머에 있는 ‘진짜’ 소설가의 삶 사이의 경계가 갑자기 지워지고 뒤에서 은희경 작가가 나타날 때 줌아웃은 미숙에게 다가간 줌인을 무효화하면서 이 ‘이후’의 장면을 영화와 현실 둘 사이에서 오가는 메아리 같은 응답의 장소로 간격을 바꾼다. 미숙은 은희경 작가에게 “좋은 글을 쓰겠다”고 약속한다. 은희경 작가는 미숙에게 그냥 작가가 아니다. “선생님이 저에게 제일 중요한 작가입니다.” 이 갑작스러운 현실 속의 응답이 영화 바깥으로부터 안으로 들어올 때 미숙은 맹세한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 행동한다. 그러나 미숙의 행동은 “좋은 글을 쓰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속해 있는 이 이야기를 끝내는 것이다. 은희경 작가는 집으로 들어가고 미숙 혼자 계단에 남는다. 다시 남겨진 영화. “좋은 글을 쓸” 것이라는 맹세. 이야기를 잘 끝내야 한다.

“엄마와 싸우는” 중인 그녀들

물론 여기 은희경 작가의 난데없는 영화 안의 침입에 대한 방어가 있긴 하다. 은희경 작가는 미숙의 질문에 진영의 대답을 반복한다. “저는 지금 들어가봐야 해요, 엄마와 싸워서요.” 나는 이 반복을 단지 진영과 은희경 작가를 묶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을 것이다. <첩첩산중>은 여자가 주인공인 홍상수의 첫 번째 영화이다. 혹은 적어도 보이스 오버 화자가 여자인 첫 번째 영화이다. 물론 홍상수는 “여자랑 남자랑 다 사람이라고 생각해요”라고 대답할 것이다.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그러나 파란 사과와 빨간 사과는 그것의 내용을 물어서 사과라고 생각할 때는 같은 것이지만 그것이 우리의 신경지각에 주는 감각을 물을 때 그 둘은 서로 다른 것이다. 무엇을 무엇과 묶을 것인가, 라는 문제. 이를테면 주인공과 ‘엄마’의 관계를 생각해보면 그 둘의 차이는 좀더 분명해진다.

<극장전>에서 자살을 하려다가 집에 돌아온 상원은 ‘엄마’에게 야단을 맞은 다음 아파트에 올라가 저무는 해를 보면서 “엄마”를 부르며 통곡한다. 상원은 의붓아들이 아니다. 말하자면 아들과 어머니의 관계. 반면 <첩첩산중>에서 ‘엄마’는 모두 세번 등장하는데 세번 모두 여자들과의 관계 안에서만 존재를 드러낸다. 첫 번째는 미숙이 집을 떠날 때다. 미숙은 집을 나서면서 혼자 자동차를 끌고 전주로 떠나기 위해서 “엄마를 안심시키느라 호들갑을 떨었다”고 (보이스 오버 내레이션으로) 말한다. 두 번째는 미숙이 진영의 집에 도착을 했더니 진영이 집 앞에서 “엄마와 싸워서” 지금은 들어갈 수 없다고 말한다. 세 번째는 은희경 작가의 집 앞에서 그렇게 만나고 싶어 했는데 만났음에도 불구하고 은희경 작가는 “엄마와 싸워서” 지금 들어가 봐야 한다고 말한 다음 미숙을 바깥에 남겨두고 집 안으로 들어가버린다.

<첩첩산중>에서 ‘엄마’는 여자들과 묶인다. 딸과 어머니의 관계. 공통점. 홍상수의 주인공들은 누구도 어머니라고 부르지 않고 ‘엄마’라고 부른다. 이때 그(녀들)에게 어머니를 부르는 자리는 아직도 자아가 부모로부터 분리에 성공하지 못한 소외의 자리이다. 차이점. 딸들은 어머니와 인정투쟁을 벌이는 중이다. 이때 서로 완전히 떨어진 진영과 은희경 작가는 “엄마와 싸우는” 중이다(하지만 진영은 ‘아마도’ 다음날 아침 엄마와 화해했다. 미숙이 보기에 “진영언니는 복 받은 줄 모른다”). 그리고 매번 집 앞에서 미숙은 따돌림당한다(하지만 그날 밤 미숙은 진영의 집에서 잠을 잘 수 있다). 이 이상한 묶음의 셈에서 미숙은 영화 안에서도 진영에 대한 미숙이지만 영화 바깥에서도 은희경 작가에 대한 미숙이다. 같은 말이지만 은희경 작가와 겹치는 자리는 미숙이 아니라 진영이다. 이때 핵심은 양쪽으로부터 미숙이 버림을 받았다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하나가 둘로 분리된 것처럼 보이는 양쪽 모두에게 미숙은 둘 사이의 거리를 좁힐 수 있는 화해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화해? 그렇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미숙은 영화와 현실 사이에서 완전히 찢어질 것이다. 미숙이라는 면을 영화 안쪽에서 한번 건드렸고 그런 다음 바깥에서 같은 방법으로 건드렸기 때문이다. 휘청거리는 간격. 말하자면 이 영화 안에서 지금 진동하는 면.

<첩첩산중>이 작게 느껴진 이유는

은희경 작가가 계단으로 올라가는 장면을 찍은 다음 바로 이어서 (장소를 고속버스터미널로 바꾸어서) 계단에서 명우가 내려오는 것은 현실 저편으로 사라진 은희경 작가에 대한 영화 안의 대답이다. 미숙은 명우를 만나서 함께 차를 탄다. 그러면서 (보이스 오버로) “남잔 다 똑같애”라고 말한다. 남자가 다 똑같다면 사실 명우와 전 선생도 아무 차이가 없다는 뜻이다. 하지만 명우가 영화 안에 처음 나타났을 때 그를 줌으로 당겨서 다가가지는 않는다. 그 둘은 진영을 불러서 셋이서 술을 마신다. 미숙은 술을 마시면서 “난 망했어”라고 푸념한다. 그제야 미숙을 줌인한다. 그때 명우는 술집 바깥으로 나와서 전 선생에게 전주에 내려왔다고 전화한다. 그런 다음 미숙과 명우는 화장실 앞에서 키스한다. 전 선생과 통화한 명우의 그 혀. 말을 다루는 소설가의 혀. 그러나 카메라는 이상할 정도로 이 키스를 무관심하게 쳐다본다. 다음 장면은 이번에는 미숙이 술집 바깥에서 전 선생에게 전화를 한다. 이때 이 장면은 이상할 정도로 숲길 장면의 반복처럼 찍혔다. 명우가 전화할 때는 그저 쳐다보던 카메라가 미숙이 전화할 때는 줌으로 다가간다. 그리고 숲길에서와 마찬가지로 미숙은 주저앉고 만다. 다음 장면은 다시 술집으로 돌아왔고 두 사람은 진영 앞에서 전 선생과 통화했던 그 혀를 가지고 서로 키스한다. 진영의 시선. 전 선생의 혀. 미숙과 명우의 입. 거의 뒤엉킨 관계. 하지만 아직 더 남았다. 미숙과 명우가 떠나간 다음 진영은 전 선생에게 두 사람이 떠났다고 전화한다. 그때 마치 진영을 감싸안듯이 줌인한다. 진영은 “방을 잡아놓고 기다리겠다”고 말한다. 동일한 장소. 술집 앞 주차장. 주저앉듯이 전화에 매달려 쓰러지던 가련한 미숙에게 다가가던 무거운 줌. 날아갈듯이 가볍게 전화에 매달려 “그러면 저는 좋지요”라면서 기대감에 들뜬 진영을 따라가는 줌. 두개의 줌의 운동.

그런 다음 기다리는 마지막 만남. “오전 열두시가 지나서” 엘리제 모텔에서 나오는 미숙과 명우는 점심을 먹기 위해 동해횟집에 들어간다. 같은 시간에 전 선생과 진영은 아테네 모텔에서 나와서 같은 집에 들어간다. 이 불편한 자리. 먼저 자리를 떠나는 미숙과 명우를 뒤따라나온 전 선생이 부른다. “야, 너희들 이리 와.” 옆에는 진영이 서 있다. 전 선생은 너희들 왜 인사 안 하냐고 따져 묻기 시작한다. 물론 말도 안되는 상황이다. 이때 이 장면은 미숙과 명우, 전 선생과 진영이 모두 한자리에 모인 유일한 숏이다. 미숙의 차 앞까지 간 미숙과 명우를 전 선생이 부를 때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미숙과 명우의 동선 방향을 따라 팬을 한 카메라는 네 사람을 보여준 다음 그냥 그 자리에 멈춰 선다. 이때 마치 카메라는 줌을 잊어버린 것처럼 그냥 서서 본다.

자, 이제 질문에 대답할 차례다. 왜 나는 <첩첩산중>이 작다고 느꼈을까? 이 이야기는 ‘하여튼’ 미숙의 보이스 오버로 진행되었으며, 미숙의 방문이며, 미숙을 중심으로 진행되었다(하지만 모든 장면에 미숙이 나오는 것은 아니며 미숙이 떠난 다음에 카메라가 그 장소에 잠시 동안 남아서 머물기도 하였다). 그런데 세워놓은 이 네 사람 가운데 가장 작게 서 있는 사람은 미숙이다. 줌으로 건드리거나 잡아당기던 카메라로부터 화자인 미숙이 가장 멀리 있을 때 화면의 원근감 안에서 가장 작게 보였다. 가장 작은 면. 너무 멀리 있는 간격. 마치 줌으로 잡아당길 수 없을 만큼 멀리 있다고 느껴지는 포기의 상태. 그때 미숙은 세워진 세개의 면들 사이에서 혼자 떨어져 나간 것처럼 보였다. 줌의 기호 바깥에 놓여질 때 그것은 홍상수에게 그 면을 느껴볼 수 있는 거리 바깥으로 나갔다는 것과 같은 의미일 것이다. 미숙은 네 사람으로 이루어진 사각형의 면을 부숴버리고 바깥으로 나간다. 그때 그 면을 부수기 위해서 미숙은 커피 잔을 집어던진 다음 사각형의 면을 벗어나서 자기 차가 놓여진 원래의 방향으로 다시 되돌아간다. 이때 카메라는 부서진 사각형의 면, 혹은 남겨진 삼각형의 면을 버리고 미숙을 따라서 이 숏의 시작을 거꾸로 되돌리기라도 하듯이 다시 오른쪽으로 팬을 한다. 그러면 영화는 첫 시작과 마찬가지로 ‘疊疊山中’을 보여주고 끝난다. 완전한 대구, 4개의 숏으로 시작한 첫 장면. 4개의 숏으로 이루어진 마지막 장면. 차이라면 첫 장소는 아파트이고 마지막 장소는 모텔이라는 것뿐이다.

그리고 남은, 어두은 근심

하지만 아직 끝난 것이 아니다. 아직 미숙은 차를 타지 않았다. 그런데 화면은 어두워졌고 음악이 흐른다. 이 피아노 선율은 영화가 막 시작했을 때, 그러니까 전주에 진영을 만나러 갈 때 제목이 떠오르면서 흐르던 음악이다. 나는 잊지 않았다. 미숙은 차를 몰고 가면서 (보이스 오버로) “고속도로를 타니까 하나도 겁이 안 난다”라고 말했다. 정말 그럴까? 그녀는 차를 몰면서 쉴새없이 중얼거렸다. “죽어두 돼, 죽어두 돼, 죽어두 돼.” 그때 미숙과 동승한 카메라는 이 영화에서 유일하게 불안하게도 경사지어진 프레임으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금방이라도 앞으로 들이받을 것 같은 자세. 전주는 고속버스로도 갈 수 있으며 기차를 타고 갈 수도 있다. 그러나 미숙은 지금 차를 끌고 필사적으로 목숨을 걸고 가는 중이다. 단지 “진영 언니를 만나는”데 그렇게 목숨을 걸 이유가 있을까? 아니, 정말 그렇다면 미숙은 “진영 언니도 잃어버리고 이제 누구하고” 이야기를 나누어야 할까? 어두운 근심. 미숙은 무사히 집에 돌아갈 수 있을까? 첩첩산중. 산에서는 길을 잃기 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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