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병헌이 <아이리스>에 출연한다는 설명은 부족하다. <아이리스>는 이병헌이란 드라마 자체를 포괄한다. <아이리스> 1회에서 캠퍼스를 활보하는 이병헌의 모습은 가장 직접적인 향수다. 교수 앞에서 유창한 지식을 뽐내거나, 차 유리를 보며 머리를 매만지거나, 식판을 들고 관심있는 여자에게 다가가는 이병헌이라니. “<내일은 사랑>을 말하는 거죠? 나도 다시 옛날로 돌아간 기분이었어요. 그때는 함께 출연한 배우들이 촬영 전날 밤새워서 아이디어를 짰는데, 그때 습관이 살아나는 거예요. 방금 이야기한 장면이 다 예전과 똑같은 기분으로 만든 거였어요. (웃음)”
<내일은 사랑>의 신범수뿐일까. 극중 김현준은 이병헌의 또 다른 이름들을 품은 남자다. <백야 3.98>의 민경빈도 남북의 대치상황에서 활동하는 비밀첩보요원이었다. 자신의 능력을 밉지 않게 과시하는 능력은 <폴리스>의 오혜성도 갖고 있었다. 난데없는 키스 뒤 당황하는 여자를 개의치 않는 듯 미소 짓는 남자는 분명 <누구나 비밀은 있다>의 수현이 가진 여유다. 게다가 김현준은 <달콤한 인생>의 선우처럼 조직에서 버림받는다(하필 상대가 배우 김영철이다). 이병헌에 대한 작가의 애정(작가 이름이 김현준이다) 때문이 아니라면, 이병헌에 대한 수많은 기억 때문일 것이다. “글쎄요, 민경빈과 비교한다면 현준은 훨씬 더 자유로운 남자인 것 같아요. <달콤한 인생>과는 상황이 비슷할 뿐이죠. 다른 역할들을 떠올리게 한다는 부담은 없었어요. 이제 현준의 본질마저 변질시킬 만큼 엄청난 재난이 닥칠 거예요. 한 인물이 상황에 따라 어디까지 변하는지를 보여주는 점이 매력적이었죠. 괴물, 괴물이란 말이 맞을 것 같네요.”
영화가 아닌 드라마로만 놓고 볼 때, 이병헌은 1990년대 후반 이후 한국 드라마의 크기를 키워온 배우였다. <아스팔트 사나이> <백야 3.98> <올인>에 이르는 로케이션 대작이 한축이고, <아름다운 그녀> <해피투게더> <아름다운 날들> 등의 멜로드라마가 또 다른 축이다. 거의 모든 작품이 성공했다. 연이은 성공으로 이병헌은 확고한 스타가 됐다. 그런데 정작 본인은 “드라마를 볼 줄 아는 식견이 없었던 시절”이라고 말한다. “운이 좋았던 거예요. 시나리오는 좋으면 좋다는 느낌이 오는데, 드라마는 안 생겨요. 솔직히 그동안의 드라마는 계약문제 때문에 했어요. 신인 때는 신인이니까 캐스팅 자체가 감사했고요. <아이리스>는 비로소 제가 제 손으로 선택한 드라마예요.”
함께 만드는 사람들에게 가진 신뢰, 제대로 해볼 수 있을 것 같은 제작여건, 무엇보다 한류를 의식해 최루성 멜로드라마를 만들려 하는 게 아니라 새로운 걸 시도해보자는 자신감이 마음에 들었다. 다만, 남북의 대치상황을 배경으로 한 이 드라마가 민족주의적 색깔을 가지는 건 거부했다. 극중에서 김현준이 최승희를 낚는 결정적 대사는 다음과 같다. “나 요원으로서의 충성심이나 애국심이나 그런 건 없어도 내가 정한 건 끝까지 물고 넘어지는 놈입니다.” 이병헌은 이 장면의 대사를 직접 썼다. “투철한 사명감이나 애국심 때문이 아니라 그저 좋아서 뛰어든 사람이 더 매력적이었어요. 한국에서 볼 수 없었던 스파이물을 만들자는 의도와도 부합하고요. 제이슨 본 시리즈나 <24>를 따라했다는 말들이 있는데, 맞아요. 따라한 거예요. 다만 한국적인 정서와 상황에 맞춘 거죠. 제대로 따라할 수만 있어도 성공적이라고 생각했어요.”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부터 <나는 비와 함께 간다> <지.아이.조: 전쟁의 서막>이 개봉했고, <아이리스>는 방영을 시작했다. 숨가쁘게 달렸던 이병헌에게 지난 2년은 첫 경험이 많았던 시기였다. 처음으로 악역을 연기했고, 할리우드 진출도 했고, 말 그대로의 예술영화도 처음 찍었다. 어쩌면 <아이리스>의 김현준은 지난 2년의 새로운 도전에 대한 반대급부로 찾아온 얼굴일지도 모른다. 첩보부대의 특등요원이자 가공할 기억력을 가졌으며 가는 곳마다 어린 소녀들을 미소 짓게 만드는 남자. <내일은 사랑>의 신범수 이후 그에게 따라붙은 완벽한 남자의 기질이 고스란히 전해진 김현준은 익숙한 남자인 한편, 반가운 이병헌이다. 언제나 정의의 편에 섰던, 완벽한 남자를 연기하면서도 거북함을 지웠던 그는 여전히 화려한 총격전이나 눈부신 멜로보다 눈길이 가는 드라마다. 역시 이병헌은 멋있어야 이병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