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Skip to contents]
HOME > Magazine > 칼럼 > 아저씨의 맛
[아저씨의 맛] 오빠와 소주 딱 한잔만…

존 쿠색

오빠가 한국에 온다는 이야기를 듣고 살짝 흥분이 되면서 잠시 고민에 빠졌다. 만나러 나갈까? 너무 번잡할 텐데, 그래도 옛날 생각하면 한번 보러 가는 게 의리가 아닐까. 아 귀찮다. 신종플루도 걱정되고, 우물쭈물….

언제나 그렇듯 귀찮음이 모든 의지를 꺾었다. 얼마 뒤 인터넷을 통해서 안부를 확인했다. 피천득의 아사코가 생각났다. 가을바람이 춥게 느껴지는 훤한 이마에 과도한 웨이브 컬, 한때는 그 처진 각도 때문에 매혹됐던 처진 눈 밑 주름의 엄청나 보이는 무게감. 오빠가 돌아온 것이다. 아저씨로.

내 눈을 믿을 수 없어 영화를 찾아봤다. <2012>를 보면 그 옛날의 아름다운 추억들까지 훼손될 것 같아서 <굿바이 그레이스>를 봤다. 그런데 제대로 걸렸다. 이 영화의 메시지는- 적어도 나에게는- ‘오빠라고 별수 있냐’였던 것이다. 영화의 첫 장면부터 주제의식이 넘쳐나는데 두둑한 뱃살과 대비되는 부실해 보이는 하체, 그것을 감싼 코스트코에서 29.99달러 주고 샀을 면바지와 남방, 벗겨진 머리의 금테 안경(9.99달러쯤?)을 쓴 남자가 내 턱밑에 다가올 때까지 난 그 아저씨가 오빠인 줄 몰랐다.

온갖 할리우드 스타들의 굴욕 사진을 탐닉하면서도 흔들리지 않았던 나에게 오빠의 노화는 충격이었다. 그는 단순히 한때 열광했던 우상이 아니라 같은 세계- 다른 취향을 가진 사람을 함께 경멸하고, 겉으로는 자신만만한 척하지만 실상은 소심한데다 뒤에서 구시렁거리기만 좋아하는- 에 속하는 ‘아는 오빠’(아 물론 나만), 좋아하면서 아닌 척하는 짝사랑하는 오빠였기 때문이다.

이 영화의 반전 메시지와는 무관하게 나는 영화의 모든 과정도 나이듦에 대한 알레고리로 읽혔다. 고단하고 지리멸렬한 생계와 생계뿐 아니라 그 아이들이 감당해야 할 정서적 충격까지 책임져야 하는 가장의 자리. 혼자서도 받아들이기 힘든 아내의 죽음을 어쩌지 못해 아이들을 데리고 하릴없이 고속도로와 놀이공원을 배회하는 그를 보면서 숨이 턱 막혔다. 예측 가능한 책임들에 예측 불가능한 짐까지 켜켜이 덧씌워지는 나이에 접어들어서 젊게 산다는 것, 아저씨, 아줌마처럼 보이지 않는다는 게 무슨 의미가 있으며 위로가 될까 싶었다.

젊은 시절 불안하지만 재기가 반짝이는 눈빛과 섬세하고 소심한 입매는 도통 나이든다는 것이 겹쳐지지 않았지만 신기하게도 그 눈매와 입매 그대로 오빠는 아저씨가 됐다. 이제야 10년 만에 만나서 ‘하나도 변하지 않았다’는 친구의 말이 새빨간 거짓말이라는 걸 실감하겠다. 아무리 아이돌에게 열광하고 인터넷 용어들을 줄줄 꿰며 북유럽의 포크 밴드 따위에 심취해도 난 그저 이제 뒤치다꺼리의 종류와 개수를 분류해야 하는 아줌마인 것이다(게다가 영화에서 죽은 아내는 1971년생!). 이 쌀쌀한 날씨에 오빠랑 소주 딱 한잔만 하고 싶다. 진짜….

관련영화

관련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