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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읽기] 모든 것은 즐거움을 향한다
송경원 2009-10-29

할리우드 SF영화의 새로운 가능성 <디스트릭트9>

장르영화가 기억에 남는 걸작이 되기 위해서는 몇 가지 필요한 조건이 있다. 우선 어떤 형태든 장르역사에서 새로운 시도나 방향을 제시해야 하고, 너무 말초적이고 가볍지 않도록 철학적 메시지도 담아야 한다. 물론 장르영화다운 재미에 충실하기는 기본이다. 그런 점에서 <디스트릭트9>은 올해 가장 의미있는 SF영화가 될 자질을 갖췄다. 이 영화의 탁월함은 각종 외신과 평론가들 사이에서 쏟아지는 찬사에 굳이 말을 더 보태지 않더라도 이미 충분히 증명되었다. 한동안 아이디어 고갈로 만화나 게임에서 이야기를 빌려오던 할리우드 SF영화가 이제 그것조차 한계에 부딪혀 자기 복제의 범작들을 줄줄이 양산해내는 지금, <디스트릭트9>이 시도한 참신한 변화는 신선한 충격이자 장르의 매너리즘에 대한 하나의 돌파구다. 나 역시 <디스트릭트9>이 ‘새롭다’는 점에는 이견이 없다. 단지 내가 알고 싶은 것은 왜 이 영화의 새로움이 우리에게 낯섦이 아닌 참신함으로 다가왔는가 하는 점이다.

‘우리’라는 괴물을 바라보는 방식

<디스트릭트9>은 닐 블롬캠프 감독의 단편에서 출발한 오리지널 스토리와 세계관을 가지고 만든 영화다. 할리우드의 여타 SF대작과 비교했을 때 상대적으로 적은 3천만달러의 예산으로 제작된 이 영화는 제목에서부터 정치적 알레고리를 숨기지 않고 드러낸다. 1960년 남아프리카공화국 요하네스버그에 실제로 존재했던 백인전용거주지 디스트릭스6의 변주임이 분명한 제목과 외계인의 단골 방문지인 뉴욕이나 맨해튼이 아닌 요하네스버그라는 이질적인 장소에 표류한 외계인들을 통해 남아공에서 자행되었던 인종격리정책의 거울과 같은 이야기를 만들어낸다. SF장르의 특성을 십분 살려 만들어진 대체역사의 시공간 속에서 변화한 것은 흑인과 백인에서 인간과 외계인으로 치환된 갈등의 주체뿐이다.

영화 전반에 모큐멘터리(가짜 다큐멘터리)의 형식을 차용한 것 또한 이와 무관하지 않다. 도입부부터 등장하는 요하네스버그 시민들- 특히 과거 인종격리정책을 이미 겪은 흑인들- 이 외계인에 대한 혐오감 섞인 인터뷰를 날리는 것은 실로 의미심장하다. 여기에 영화 중간중간 삽입되는 남아공방송공사나 <로이터>의 실제 뉴스 화면, 그리고 핸드헬드로 촬영된 거친 화면을 통해 전달되는 생생함은 전형적인 극영화로는 전달하지 못할 현실감을 부여해 <디스트릭트9>이라는 가상세계와 현실의 경계를 무너뜨린다. 외계인의 유동체에 노출되어 점점 외계인으로 변해가는 비커스의 변이와 같이 영화는 창의적인 형식과 장르의 결합을 통해 시각적 쾌감과 참신한 설정, 정치적 함의까지 유기적으로 엮어 새로운 영역으로 나아간다.

이 재기발랄한 SF영화를 이끌어가는 참신함의 원동력은 바로 외계인과 인간의 역전된 관계에 있다. <디스트릭트9>에서는 외계인에 대해 ‘왜’를 묻기보다 ‘어떻게’에 주목한다. 그들이 지구에 머무르게 된 까닭이나 떠나간 이후에 대해서는 알 수도 없고 알려고도 하지 않는다. 대신 영화는 그들이 지구에 머무르는 동안 벌어질 만한 문제에 대해 현실적으로 (혹은 우화적으로) 접근한다. 외계인은 ‘외계의 존재’라는 말 그대로 ‘우리’의 규칙에 속해 있지 않음에도 인간들은 이를 이해하려 하기보다 외계인을 규칙을 위반하는 난폭하고 미개한 존재로 치부한 채 그들을 기만하고 생체실험까지 서슴지 않는다. 이름이란 때로 대상의 본질을 왜곡하기도 하는데 외계인에게 비하의 의미로 이름 붙인 ‘프런’이라는 명칭은 우리와 그들을 구분 짓고 차별하는 인간의 폭력 행위에 던져준 면죄부에 다름 아니다. 필요에 따라 민족, 역사, 국가와 같은 ‘우리’라는 범주를 설정하는 자의적인 방식이야말로 그동안 인류의 역사에서 숱하게 자행되어왔던 배척과 학살의 역사이며, <디스트릭트9>의 참신함은 바로 이러한 인간의 괴물성을 인간이 아닌 존재를 통해 발현시킨다는 점에 있다.

새롭게, 동시에 익숙하게

여기까지만 보자면 <디스트릭트9>은 가볍지 않은 문제의식에서부터 출발한 SF장르가 새로운 방식으로 개화하는 가능성을 보여준 패기 넘치는 데뷔작이다. 하지만 이것은 새로움에 대한 조건이지 위화감이 생기지 않는 원인은 아니다. 낯섦과 참신함 사이 종이 한장 두께의 아슬아슬한 경계는 새로움 속에 얼마만큼의 익숙함이 들었는지의 여부로 판가름난다. <디스트릭트9>은 여러 가지 새로운 시도에도 그 구성 요소는 지극히 관습적이고 익숙한 것을 차용했다. 외계인의 외형은 익숙한 벌레모티브에서 가져왔고 주인공 비커스의 신체변형은 데이비드 크로넨버그의 <플라이>를 연상시키며 절정의 액션 시퀀스에서 보여주는 로봇은 <트랜스포머>를 닮았다. 그중에서 가장 익숙하고 전형적인 것은 바로 영화의 갈등해결 방식이다. 절정의 액션 시퀀스에서 로봇을 입고 도망가던 비커스가 다시 돌아와 외계인 크리스토퍼를 구해주는 전형적 해결, 그 예측을 벗어나지 않는 행동을 통해 우리는 이 영화의 목적지가 어딘지 어렴풋이 감지한다.

중반 이후 영화를 끌고 가는 에너지는 다시 인간이 되어 사랑하는 아내의 곁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비커스의 일념이다. 이 시점부터 영화는 모큐멘터리의 형식을 버리고 비커스의 동선을 따르기 시작한다. 재미있는 것은 그가 점차 외계인으로 변해갈수록 배척되었던 외계인들이 ‘우리’의 영역으로 들어온다는 사실이다. 아내를 사랑하는 비커스의 마음과 아들을 생각하는 외계인 크리스토퍼의 행동은 어딘지 모르게 겹치고 비커스의 몸이 점점 외계인이 될수록 반대로 그의 마음은 점점 인간성을 회복해나간다.

이 모든 것을 가능하도록 만드는 열쇠는 결국 할리우드영화의 공식이 되어버린 가족코드, 그리고 사람만의 편의로 만들어진 현행법을 초월해 인간이 인간일 수 있게 해주는 어떤 것, 이른바 자연법이라 부를 수 있는 ‘인간다움’이다. 이러한 인간성에 대한 직접적인 물음은 자신의 이질적인 힘과 인간으로서의 정체성 사이에서 고뇌하는 슈퍼히어로 영화에서 흔히 찾아볼 수 있는 또 하나의 코드이며 인간으로 돌아가기 위한 비커스의 고난과 내적 갈등 또한 슈퍼히어로 영화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MNU와 테러리스트가 동시에 갈구하는 외계인의 유전자와 무기라는 힘을 가지게 되었지만 끝끝내 이를 부정하던 비커스가 로봇에 탑승하여 일체가 되는 순간이 슈퍼히어로의 각성과 닮은 것은 이 때문이다. 비커스 역시 외계인을 학대하고 무감각하게 대하던 비인간적인 인간이었지만 로봇을 타는 것을 통해 자신의 변화를 받아들이고 그것을 조종하여 크리스토퍼를 구해냄으로써 역설적으로 상실된 인간성을 회복하는 것이다. 여기에는 필연적으로 ‘그럼에도 불구하고’를 담보로 한 자기희생이 동반된다.

<디스트릭트9>은 참신한 설정에 깔린 논쟁적인 문제제기에도 더이상의 걸음을 멈춘 채, 자기희생을 전제로 한 고뇌에 찬 인간다움이 모든 갈등을 봉합하는 할리우드영화의 공식을 배반하지 않는다. 이렇듯 힘의 자각, 변화의 긍정을 계기로 주인공이 ‘옳은 것’에 대해 본질적인 물음을 던진다는 점은 이 영화를 둘러싼 수많은 찬사 중 유독 ‘<다크 나이트>에 비견되는 올해의 SF영화’라는 수식어에 눈이 가도록 만든다.

영리한 신예감독의 등장을 반긴다

이제 앞서 얘기했던 모든 참신함의 요건들은 흥행의 요소로 변모한다. 모큐멘터리 형식은 저예산영화로써 최대한의 몰입을 통해 관객이 영화를 체험하도록 해주는 장치이며, 정치적 알레고리는 생각할 거리를 제공함으로써 SF 고유의 시각적 쾌락에 더하여 오래도록 즐길 만한 잔향을 남긴다. SF영화를 사랑하는 한 사람으로서 쉽게 휘발되는 자극적 즐거움에 그치지 않고 그 재미가 오래가도록 하는 조향의 기술까지 확실히 익히고 나타난 이 영리한 신예감독의 화려한 등장이 그저 기쁠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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