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회 서울국제가족영상축제의 테마는 ‘아름다운 변화’다. 올해 국제경쟁부문을 신설하는 등 프로그램 면에서도 국제영화제로서 정체성과 위상을 확고히 하려는 변화의 조짐이 뚜렷하다. 국제경쟁부문에 초청된 8편의 영화들은 아시아, 북미, 유럽, 남미 등 배경이 제각각일 뿐 아니라 소재를 다루는 방식 역시 다채로워 전세계 가족영화의 포괄적인 경향을 살피는 데 모자람이 없어 보인다. 야심차게 준비한 고전SF걸작선에선 로버트 와이즈의 <지구가 멈추는 날>, 랜달 크레이저의 <날아라 UFO>를 선두로 오락적이면서도 미래 가족에 대해 시사하는 바가 큰 고전영화 6편을 만날 수 있다.
가족영화여행이라는 제목 아래 미셸 공드리의 <마음의 가시>, 마르쿠스 로젠뮐러의 <거짓말 소동>, 야마다 요지의 <엄마>를 비롯해 최신 가족영화들을 모은 패밀리필름, 닛카쓰어린이영화특별전, 추억의 가족영화, 3D 입체단편영화 모음전 등 알찬 기획전도 준비돼 있다. 덴마크의 거장 닐스 맘므로스 특별전과 뉴질랜드, 독일에 이은 호주가족영화 특별전, 전편을 애니메이션으로 구성한 시네자키를 포함해 아이의 연령대에 맞게 사려깊게 영화를 추천하는 가족영화놀이, 한국 가족영화의 현재를 가늠할 한국 가족단편영화 경쟁부문, 심야상영인 청춘의 밤 부문 역시 기대를 모은다. SF영화광이라면 10월29일 <지구가 멈추는 날> 상영 이후 마련될 SF 스페셜 토크를, 가족과 가을 극장 나들이를 계획 중인 관객이라면 영국 레드스타 스튜디오와 함께하는 3D 입체애니메이션 워크숍에 주목하도록. 그 밖에도 닐스 맘므로스 마스터클래스와 가족영화 국제세미나, 힐링시네마 관람 뒤 진행되는 영상 치유 세션 등 기타 부대행사의 일정과 상영시간표가 궁금하다면 영화제 홈페이지(www.sifff.org)를 참고하시길. 이번 영화제는 10월28일부터 11월3일까지 CGV용산 및 용산 아이파크몰 일대에서 열린다.
우당탕 마을 A Town Called Panic
감독 슈테판 오비에, 뱅상 파타 | 2009년 | 벨기에 | 75분 | 패밀리필름
이거 참 희한한 마을이다. 말은 인간과 꼭같이 말하고 행동하는가 하면, 받침대로 짐작건대 책상 위에 세워두는 장난감임이 분명한 인디언과 카우보이는 갖은 사고를 치면서 성실한 그를 못살게 군다. 동물들은 이까지 닦고 침대로 기어들어가 잠을 청하고, 연못으로 풍덩 뛰어드니 청새치를 집어던지면서 지상의 존재를 공격하는 수중 생명체들의 세계가 펼쳐진다. 영문 제목을 참고하자면 ‘패닉이라 불리는’, 아니 패닉 그 자체인 <우당탕 마을>은 스톱모션애니메이션이다. 플라스틱 인형을 일일이 움직여 만든 이미지들은 획기적으로 발전 중인 컴퓨터그래픽 기술을 빌려서도 실현 불가능할 환상적인 입체 세계를 선사하는데, 더불어 눈길을 잡아끄는 건 독특한 비주얼과 대구를 이루는 재기발랄한 이야기다.
정신없이 넘어지고 부딪히고 미끄러지는 등 기본적으로 슬랩스틱 코미디의 공식을 따르지만 실소를 지아내는 와중에도 따끔한 풍자와 깜찍한 로맨스, 조화와 화합의 메시지를 곁들이는 걸 잊지 않았다. 특히, 경찰관이 무고한 이웃집 가장을 도둑으로 몰아 다짜고짜 감옥으로 밀어넣는 장면이 압권이다. 슈테판 오비에와 뱅상 파타 감독은 브뤼셀 캄브르 시각예술 학교에서 만난 이후 지속적으로 협업했는데, 이번 영화는 2003년 <카날플러스>를 통해 알려진 TV애니메이션 시리즈 <우당탕 마을>의 극장용 장편영화 버전이다. 개막작으로 안성맞춤인 유쾌한 영화다. (장미)
소녀 The Girl
감독 프레드릭 에드펠트 | 2009년 | 스웨덴 | 98분 | 국제경쟁부문
어릴 적 누구나 한번쯤 겪었을 것이다. 나 홀로 집에 남는 것 말이다. 하루 이틀 정도는 이 집의 주인이 나인 것 같아 즐거웠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혼자 있는 것이 그렇게 외롭고 무서울 수가 없었다. 특히, 어두컴컴한 밤의 침실은 더욱 그렇다. 열살도 채 안된 <소녀>의 여주인공 플리칸은 긴 여름휴가 내내 혼자 집을 지키게 됐다. 부모가 일 때문에 아프리카로 떠나게 돼서다. 물론 부모님이 이모에게 부탁해놓긴 했지만, 책임감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없는 이모 역시 남자친구와 함께 바다로 떠난다. 그때부터 모든 것이 쉬워 보였던 플리칸의 일상이 하루하루 살아남기 위한 생존의 장으로 변한다.
그렇다고 <소녀>에는 매컬리 컬킨의 <나홀로 집에>처럼 악당들이 호시탐탐 노리는, 좌충우돌 소동은 없다. 그저 시내의 대형마트에 가서 장을 보고, 요리를 하는 소녀의 일상을 보여줄 뿐이다. 이웃집 부부의 성적인 대화, 질 나쁜 친구들의 기행 등 위험천만해 보이는 일들도 소녀의 일상에 침범한다. 무방비 상태로 세상에 노출됐지만 꿋꿋이 감당해내는 플리칸을 통해 감독은 한 소녀의 성장담을 강인하고 긍정적인 시선으로 그려낸다. 무엇보다 플리칸의 표정을 정면에서 바라봄으로써 소녀의 내면을 있는 그대로 생생하게 담아낸, 호이트 반 호이테마 촬영감독의 촬영이 인상적이다. 역시 <렛미인>의 촬영감독답다. (김성훈 객원기자)
아린 마음 Aching Hearts
감독 닐스 맘므로스 | 2009년 | 덴마크| 125분| 닐스 맘므로스 특별전
1960년대 덴마크. 고교생인 조나스는 같은 학년의 아그네트와 사귀기 시작한다. 평범한 소년인 그는 아그네트를 좋아하지만 그녀의 섬세한 내면까지 읽어내지는 못한다. 시를 쓰고 철학을 이야기하는 아그네트는 2차 세계대전에 경도된 반항적인 문학소년 토케와 오히려 교집합을 느끼는 눈치다. 그 사이 아그네트는 다른 남학생과 잠시 가까워졌다 조나스의 질투로 헤어지고, 조나스의 단짝 비르거가 여자친구 레나를 임신시켜 학교에서 쫓겨날 위기에 처하는가 하면, 아그네트의 아버지가 정신적인 붕괴를 경험하면서 가정을 위기로 몰아넣는다.
<아린 마음>은 조나스와 아그네트의 관계를 중심으로 당시 덴마크 청소년들의 고교 생활 3년을 스케치하는 청춘영화다. 아이들은 담배를 피우고 술을 마시고 춤을 추고 서로의 몸을 더듬고 니체와 히틀러에 대해 논하고 <햄릿>을 읽으면서 졸업을 향해 달려간다. 그 과정은 물 흐르듯이 자연스럽지만 간혹 그 시절에만 찾아드는 치기와 호기심, 열정이 일상의 수면 아래 날카롭게 번뜩인다. 연출자의 넉넉한 시선과 치밀한 연기지도가 없었다면 잡아낼 수 없었을 청춘들의 사랑과 방황, 성장, 그러니까 ‘아린 마음’의 생생한 기록이다. 라스 폰 트리에와 함께 덴마크의 대표 감독으로 꼽히는 닐스 맘므로스의 신작. 올해 상하이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을 거머쥐기도 했다. 잔잔하되 더없이 아름다운 청춘영화를 보고픈 이들에게 추천한다. (장미)
브로큰 힐 Broken Hill
감독 데이건 메릴 | 2009년 | 호주 | 102분 | Color | 호주가족영화 특별전
음악을 빌려 한 소년의 성장기를 그리는 <브로큰 힐>은 귀를 열고 만나야 하는 영화다. 토미는 양 목장을 운영하는 아버지와 함께 산다. 음악에 놀라운 재능을 지닌, 작곡가를 꿈꾸는 고등학생 토미는 음악 스승으로부터 작곡 콘테스트 오디션이 3주 남았다는 소식을 듣고 들뜬다. 그러나 좋아하는 여학생 캣의 부탁으로 한밤의 광란의 질주에 동참하다 그만 경찰에 붙잡히고 만다. 둘은 사회봉사활동 명령을 받고, 교도소 수감자들에게 음악을 가르쳐 밴드를 결성한다. 교도소 밴드는 예상대로 출발이 순조롭지 못하다. 도레미파솔라시도 모든 음을 하나의 음으로 소화하는 음치, 기타 실력만큼은 수준급이지만 캣에게 자꾸만 추파를 던지는 아저씨 등 음악과는 다소 동떨어져 보이는 사람들이 모인다.
음악을 끌어들인 영화인 만큼 <브로큰 힐>의 감동 대목은 교도소 밴드의 공연장면이다. 이들이 처음으로 한데 모여 <작은별>을 합주할 땐 꽤나 감동적인 잼 세션이 연출된다. 어설프지만 자유분방한 그들의 즉흥 연주는 토미에게 큰 영감을 준다. 또한 그들의 연주는 영화의 스타일과도 닮았다. <브로큰 힐>은 상업영화의 흐름을 충실히 따르면서도 영리하게 재주를 부린다. (이주현 객원기자)
소년 캄사 Khamsa
감독 카림 드리디 | 2008년 | 프랑스 | 110분 | 국제경쟁부문
밝고 긍정적인 기운 가득한 ‘가족’영화를 기대한다면 <소년 캄사>는 당신의 선택지에서 빠져야만 한다. <소년 캄사>는 11살 소년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어둡고 강렬한 영화다. 마르코는 계모의 집(이라고 해봐야 캐러밴)을 불 지르고 도망갔다가 다시 자신의 친척과 친구들이 있는 마을-집시촌으로 돌아온다. 난쟁이 토니 삼촌과 집시 친구 코요테와 어울리며 시간을 보낸다. 그들의 놀이터는 도박판이거나 닭싸움장이거나 바닷가 혹은 허허벌판이다.
아이들은 예사로 술을 마시고 어른들의 섹스도 예사로 훔쳐본다. 스쿠터를 훔치고 지갑을 훔치면서도 큰 죄책감이 없다. 신체 발육상 덜 성장했다 뿐이지 아이들이 처한 혹은 겪는 현실은 어른의 그것과 다를 바 없다. 누군가는 나면서부터 보장받는 행복한 어린아이로서의 삶을 마르코는 꿈도 꿀 수 없다. 그나마 믿었던 아버지마저 쓰레기 굴 같은 캐러밴을 한채 남긴 채 젊은 여자와 떠나고 마르코는 점점 폭력적으로 변해간다. 고슴도치를 막대로 쳐죽이는 등 죄없는 동물을 학대하는 모습은 무척 섬뜩하다. <소년 캄사>는 끝까지 희망을 보여주지 않는다. 아마도 마음 단단히 먹고 극장에 들어서야 할 것이다. (이주현 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