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 건너에서 들려온 부고가 뜻밖의 추억을 불러일으킨 하루였다. 지난 9월14일, 패트릭 스웨이지가 사망했다. 80년대의 대표적인 댄서이자, 로맨티스트였던 그가 췌장암으로 투병 중이었다는 것, 그리고 환갑을 바라보고 있었다는 사실도 그제야 알았다. 포털 사이트의 블로그에서는 조니와 베이비의 춤곡이었던 <The Time of My Life>가 흘러나왔다. “난 내 생애 최고의 시간을 보내고 있어요. 한번도 이런 느낌을 가진 적이 없어요. 맹세해요. 그건 진실이에요. 이 모든 게 당신이 있어 가능한 거죠.” 물론 라디오에서 들은 <Unchained Melody> 또한 빼놓을 수 없는 추모곡일 것이다. 뉴스는 그가 가족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세상을 떠났다고 전했다.
1952년생인 패트릭 스웨이지는 풋볼을 즐기던 텍사스 소년이었다. 유명한 풋볼선수를 꿈꿨지만, 경기 도중 부상을 당한 그는 발레리나 출신인 어머니의 권유로 춤을 배웠다. 연기인생의 출발은 디즈니 온 퍼레이드의 단원으로 서게 된 브로드웨이 무대부터였다. 이후 영화 <스케이트 타운 U.S.A>, TV시리즈인 <M*A*S*H>와 <레니게이드>에 출연한 그는 <아웃사이더> <영블러드> 같은 청춘영화를 통해 주목받기 시작했다. 그를 진정한 스타로 등극시킨 작품은 댄서 조니를 연기한 <더티 댄싱>이다. <젊은 용사들>에서 함께 출연한 제니퍼 그레이와 다시 뭉친 이 영화는 전세계에서 3억달러 이상의 수익을 냈고 100만장 이상의 비디오테이프가 팔린 첫 번째 영화로 기록됐으며, TV시리즈에서 무대 공연으로도 재탄생했다. 그가 직접 부른 사운드 트랙도 4200만장의 판매고를 올렸다. 춤을 추는 매끈한 근육이 탄성을 지르게 했고, “누구도 베이비를 벌줄 수는 없다”는 대사가 여성 관객의 비명을 이끌었다.
<더티 댄싱> 이후 패트릭 스웨이지는 한동안 조니와 같은 섹시한 남자의 얼굴로 승승장구했다. 고독한 클럽 경비원인 <로드하우스>의 달톤으로 지위를 다졌고, <사랑과 영혼>의 샘으로 정점에 섰던 그는 <폭풍 속으로>의 보디로 전성기를 마감했다. 이 시기에 피플매거진은 그를 ‘현존하는 가장 섹시한 남자’로 선정하기도 했다.
영화 속 남자들의 영향이었을까? 패트릭 스웨이지는 현실에서도 열정으로 가득한 남자였다. 그의 열정은 종종 무모한 도전으로 나타났고 그 때문에 다치는 일도 많았다. 비행기를 몰다 추락했는가 하면, 말을 타다 낙마사고를 겪었다. 그는 한 인터뷰에서 몸을 아끼지 않은 과거를 후회한다고 고백했다. “나는 내 몸이 무엇이든 할 수 있다고 믿었다. 풋볼을 하거나 직접 스턴트를 연기하다 뼈가 부러져도, 뼈가 붙으면 다시 몸을 가만두지 않았다. 지금 생각하면 정말 어리석은 일이다.” 췌장암 판정을 받은 이후 후회는 더 컸을 것이다. 투병 중에도 그는 TV시리즈 <더 비스트>에서 FBI 요원을 연기하면서 병을 잊었고 각종 암 퇴치 행사와 방송프로그램에 출연하며 병을 이겨내려 했다. 과거 온몸으로 스크린을 누비던 자신에게 죽음이 다가온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만약 패트릭 스웨이지가 조니의 얼굴을 좀더 욕심냈다면 어땠을까? 그랬다면 그의 전성기도 더 길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패트릭 스웨이지는 “숀 코너리나 클린트 이스트우드처럼 성숙한 남자가 되기 위해서는 다양하고 흥미로운 인물을 연기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드랙퀸을 연기한 <투 웡 푸>를 선택한 이유도 그 때문이 아니었을지. 외모를 향한 칭송은 허다했지만, 연기력 면에서는 평가받지 못했다는 점이 그에게 남은 아쉬움이었다.
그의 팬들이 가진 생각은 분명 달랐을 것이다. <더티 댄싱>의 호텔사장은 축제 분위기를 돋우기 위해 고용한 춤선생 조니에게 이렇게 말한다. “여자들과 춤추고 맘보나 차차차를 가르쳐 주는 게 자네 일이야. 그 이상은 안돼.” 그럼에도 조니의 춤은 베이비에게 춤 이상의 매력으로 다가온다. 패트릭 스웨이지의 몸과 얼굴 또한 그의 팬들에게는 언제나 그 이상의 감동과 기쁨을 선사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