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래 극영화를 만들 생각은 없었다. 시카고 아트 인스티튜트에서 미술을 전공했고, 스토리가 없는 실험영화와 몇몇 단편을 만드는 게 전부였다. 같은 학교에서 조각을 전공했던 남편 브래들리 러스트 그레이와 6년 연애 끝에 10년의 결혼 생활을 이어오면서 감독인 남편의 현장을 지켜보았고, 든든한 조언자 역할도 했다. 그리고 ‘나도 할 수 있겠는데’라는 자신감에서 시작, 뒤늦게 영화감독의 길에 들어섰다. 연출은, 힘들었지만 ‘견딜 만한’ 고생이었다. 12살, 부모의 이혼으로 엄마 따라 간 미국 생활을 토대로 첫 장편 <방황의 날들>을 만들었고, 유년 시절의 고향인 한국에 와서 엄마의 부재로 고통받는 아이들의 이야기를 그린 두 번째 장편 <나무없는 산>을 만들었다. 한국 개봉을 앞두고 브루클린에서 온 김소영 감독의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나무없는 산>은 지난 4월24일 미국 전역 개봉했다. 현지 반응은 어땠나. =어린이들 이야기라 그런지 한국어 대사임에도 이민자들을 그린 <방황의 날들>보다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졌다. 결말 때문에도 더 그런 것 같다. <방황의 날들>은 마지막 장면이 갑갑하고 날카롭게 결론지어지지만, <나무없는 산>은 마지막에 희망을 발견한다. 그걸 관객이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더라.
-<방황의 날들>은 자전적인 이야기라 접근이 용이했을 것 같다. 그러나 12살 때 떠난 한국의 이야기를 지금 꺼낸 건 어떤 이유에서인가. =<방황의 날들>이 ‘하자!’해서 멋도 모르고 구성해서 만든 영화라면 <나무없는 산>은 오랫동안 하고 싶었던, 철저한 준비와 계획이 필요한 영화였다. 영화 만드는 지식이 전무하니 <방황의 날들>을 먼저 하면서 좀 배우자 싶었다. 영화를 하기로 결정한 순간부터 꼭 한국에서 촬영해야겠다고 마음먹었고, 그걸 토대로 시나리오를 썼다.
-실제 어머니가 보낸 편지에서 영감을 얻기도 했다던데. =어릴 때 우리 자매는 한국에 있고 엄마가 먼저 미국으로 이민을 가셨다. 그때 어머니께서 우리에게 편지를 보냈다. 그때의 느낌을 캡처한 건 맞지만 그렇다고 다큐멘터리나 자전적인 이야기는 아니다. 영화에서 고모가 엄마의 편지를 읽어주는 장면은 그때의 내 경험과도 연결된다. 2007년에 편지로 소통하는 게 말이 되느냐 싶었지만 꼭 넣고 싶었던 장면이다.
-아이들의 슬픔에 동요하지 않는 냉정한 시선이 인상적이다. ‘버림받은 아이’는 감정이 가장 동하기 쉬운 소재 아닌가. =성격이 그래서인지 모르겠다. (웃음) 특별한 사건이 있는 영화가 아니라 아이들이 하루하루 어떻게 시간을 갖는지 보여주고 싶은 영화니, 리얼리즘을 끌어내려면 이렇게 잔인하게 될 수밖에 없다.
-전문연기자가 아닌 아이들에게서 끌어내기 힘든 감정선이다. =아이들에게 설명하지 않았다. 설명을 하면 아이들이 이해해야 하는데, 아이들이 어른의 말을 이해하는 건 불가능하다. 대신 한 장면을 주고 해라, 또다시 해봐라, 또다시 해봐라, 계속 반복시켰다. 그 결과 원래 계획된 장면과 다른 장면을 찍을 때도 많았다. 아침에 일어나면 제일 먼저 아이들의 감정을 살피고 그날 촬영 스케줄을 조절했다.
-클로즈업숏이 지배적이다가 후반에는 앵글이 점점 넓어진다. =클로즈업숏을 정말 사랑한다. 촬영감독에게 ‘클로즈업숏 먼저 찍고 다음에 와이드숏’ 이렇게 주문했다. 그런데 편집할 때 보니 너무 아이들에게 공격적으로 다가서는 것 같아 그때부터 거리를 두는 편집을 했다. 할머니집에 가면서부터는 세상을 이해하고 주변 환경과 동화되다보니 넓은 앵글에 아이들이 어우러지더라.
-그렇게 카메라가 가까이 간다는 건 노련한 연기의 배우에게나 통하는 방식 아닌가. =영화를 만들 때 아주 연기를 잘하는 배우를 캐스팅하지 않을 바에는 아예 경험이 전무한 사람을 택하려는 고집이 있다. 그 두 부류는 클로즈업이 가능하다. 물론 그 중간은 안된다. 그러면 가식적인 장면이 나오게 된다.
-이번에도 일반적인 방식의 해피엔딩과는 거리가 멀다. =원래는 할머니가 아이들의 저금통을 받아들면서 끝나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렇게 되면 너무 할리우드 스튜디오처럼 깨끗하게 끝나버리는 거다. 그래서 좀 불편한 엔딩으로 가고 싶었다.
-독립영화라 제작비 조달도 힘들겠다. 한국의 제작사나 할리우드 스튜디오의 제안도 고려해볼 만하지 않나. =(한국 제작사의 제안에 대해) 그런 일이 있나. 있으면 좀 소개해 달라. (웃음) <나무없는 산>은 다행히 칸 제작지원을 받아 수월하게 된 경우다. <방황의 날들>보다 제작규모가 무려 20배였으니까. 할리우드 제작사와는 미팅도 몇번 해봤는데 솔직히 내가 만드는 영화에 투자는 힘들 거다. 그쪽에선 로맨틱코미디, 액션무비 같은 것들을 원하니 솔직히 서로 대화가 잘 안되고 할 필요도 없는거다.
-준비 중인 다음 작품은 무엇인가. =30대 남자에 관한 이야기다. 농가가 있는 위스콘신에서 딸과 함께 사는 아빠인데 영 철이 없다. 남자를 이해해보고 싶다는 생각으로 시작한 영화다. 지금 시나리오 끝나고 배우 캐스팅과 제작비 마련을 앞두고 있다. 겨울에 찍고 싶어서 마음이 급하다.
-그, 남자에 대한 이해는 어떻게 하고 있나. =브래드(남편)를 보면서 도움을 얻는다. 우린 서로의 영화에 제작자로 참여하고, 싸우게 되더라도 냉정한 조언까지도 아끼지 않는다. 스케줄 때문에 힘들지만 늘 함께 작업하고 싶다.
-또 다른 이야기도 좀 풀어달라. =오랫동안 하고 싶은 건 호러영화다. 똑바로 만들려면 공부가 많이 필요하다. 머리가 좀 나빠서 언제 될지 모르겠다. 만들게 되면 관객은 몰라도, 나는 참 재미있을 거 같다. (웃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