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0년대 초반 미국 중서부와 남부는 존 딜린저, 보니와 클라이드, 프리티 보이 플로이드 같은 갱들의 손아귀에 있었지만, 서부의 할리우드는 다른 갱들이 장악하고 있었다. 공포와 충격의 총소리와 무시무시한 표정, 건방진 자세로 할리우드 스크린을 삽시간에 평정한 이는 제임스 캐그니와 에드워드 G. 로빈슨이었다. 갱스터영화의 기념비에 해당하는 두편의 영화 <공공의 적>(1931)과 <리틀 시저>(1930)에서 각각 주인공 갱 역할로 출연한 두 사람은 단숨에 시대의 아이콘으로 떠올랐다. 현실에서 펼쳐지는 갱들의 활약상을 바라보며 대리만족을 체험했던 당대 대중은 스크린 안에서 이들의 삶을 생생하게 재현해낸 이 ‘터프 가이’들 또한 사랑했다. 캐그니와 로빈슨이 스크린 안에서 보여준 야망과 결단과 비참한 최후는 당시 신문 지상을 수놓던 갱들의 운명과 기묘하게 디졸브된 탓에 이들은 실제 갱만큼이나 폭넓은 지지를 받았던 셈이다.
<리틀 시저>와 <공공의 적>의 대히트
루마니아에서 태어난 에드워드 G. 로빈슨(1893~1973)은 랍비와 법률가라는 미래를 놓고 고민하다 연기의 매력에 빠져 ‘아메리칸 아카데미 오브 드라마틱 아츠’의 장학생이 된다. 그는 1915년 브로드웨이 무대에 올라 주연급 연기자로 성장했고 <리틀 시저>를 통해 일약 영화계 스타로 부상했다. 일설에 따르면 그가 이 영화에 주연으로 캐스팅된 건 알 카포네와 흡사한 외모 때문이었다. 작은 키와 짧은 목, 낮은 코를 가진 그는 실제로 카포네와 비슷해 보였다. 게다가 이 영화가 알 카포네를 모델로 만들어졌다는 소문(실제로는 살바토레 카르디넬라) 또한 한때 나돌았기에 그 주장은 정설로 받아들여졌다. 다만 그의 전작인 <시카고에서 온 미망인>(1930)에서 악당 연기를 본 워너브러더스의 카리스마 넘치는 보스 잭 워너가 그를 캐스팅하라고 주문했다는 주장이 더 설득력있어 보인다.
제임스 캐그니(1899~1986) 또한 어렵게 출세작의 주연을 맡았다. 어릴 적 탭댄스를 배웠고 타고난 싸움꾼이기도 했던 그는 컬럼비아대학에 진학했다가 뮤지컬계에 뛰어든다. 뮤지컬계에서 주연급 배우로 자리잡은 그는 자신이 출연했던 뮤지컬 <위대한 매기>의 영화 버전인 <죄인의 휴일>(1930)로 데뷔했지만 이후 출연한 작품에서는 조연에 머물고 있었다. <공공의 적>(1931)에서 애초 그가 맡았던 역할 또한 조연이었다. 주인공 톰 파워스는 에드워드 우즈가 맡았고, 그는 파워스의 친구 맷 도일 역할을 부여받았다. 하지만 윌리엄 웰먼 감독은 1주일간 촬영해본 뒤 스튜디오에 두 사람의 역할을 바꾸자고 제안했다. 우즈가 갱답지 않게 곱상하게 생겼다는 점도 문제였지만, 무엇보다 캐그니의 파워풀한 연기가 톰 파워스라는 캐릭터에 걸맞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두 영화는 폭발적인 반응을 얻었다. 포문을 연 건 1년 먼저 개봉한 <리틀 시저>였다. 성공에 대한 욕망에 불타는 리코라는 갱의 상승과 부침을 그린 이 영화는 머빈 르로이 감독의 표현주의적 양식과 획기적인 사운드(특히 총소리)로 관객에게 충격을 안겼다. 그중에서도 에드워드 G. 로빈슨이 보여준 리코의 모습은 관객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그의 기관총 같은 말투, 구부정한 자세, 조변석개로 바뀌는 표정, 그리고 시가를 씹어대듯 피우는 모습은 이후 갱스터영화 주인공 캐릭터의 전형이 됐다. 당시 <뉴욕타임스>는 “<리틀 시저>는 로빈슨을 통해서 그리스 비극이 됐다. 채워지지 않는 권력에 대한 욕망에 이끌리는 차갑고 무심하며 잔인한 킬러는 그 자신보다 위대하다”면서 그를 극찬했다. 그리고 마지막 장면에서 죽어가는 리코가 부르짖는 “신이시여, 이것이 리코의 마지막이란 말입니까?”라는 구절은 할리우드 역사상 가장 인상적인 대사 중 하나로 기록되고 있다.
1년 뒤 선보인 <공공의 적>은 더 큰 파장을 일으켰다. 15만달러를 들여 제작한 이 영화는 순식간에 100만달러를 벌어들였다. 상영 초기, 뉴욕 타임스스퀘어의 극장에서는 이 영화가 24시간 상영될 정도였다. 관객의 열광 한가운데 캐그니가 자리했다는 사실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그가 연기한 톰 파워스는 <리틀 시저>의 리코만큼이나 무자비한 갱이다. 파워스는 금주법 시대의 술창고를 털고, 배신자를 처단하고, 친구를 쏜 라이벌 조직 보스에 총탄을 날린다. 부릅뜬 눈, 냉혹한 표정, 누구 앞에서나 당당한 몸짓, 그리고 힘이 넘치는 대사 톤까지, 캐그니의 파워스는 로빈슨의 리코와 함께 진정한 터프 가이 시대를 열어젖혔다. 특히 이 영화 속 ‘자몽장면’은 캐그니를 시대의 아이콘으로 격상시켰다. 파워스는 아침 식탁에서 잔소리를 퍼붓는 여자친구의 얼굴에 자몽으로 펀치를 날리는데, 이 장면은 당시 관객을 적잖게 당황하게 했다. 하지만 이 ‘나쁜 남자’ 이미지는 이후에도 캐그니를 상징하는 요소로 남게 된다. <뉴욕 헤럴드 트리뷴>은 캐그니의 연기를 일컬어 “아직까지 영화에서 볼 수 없었던, 작은 킬러의 비열함에 대한 가장 무자비하고 냉정한 표현”이라고 호평했다.
검열의 바람 덕분에 해방되다?
<스마트 머니>는 로빈슨과 캐그니가 유일하게 함께 출연한 영화였다.
일약 갱스터영화의 상징으로 떠오른 두 사람의 행보는 비슷했다. 대공황으로 절망에 빠진 관객에게 멜로드라마와 뮤지컬 같은 영화로 판타지를 심어주려던 다른 스튜디오와 달리 주로 노동자 출신 관객을 대상으로 거친 남자와 갱들의 세계라는 판타지를 보여주려던 워너브러더스는 두 배우를 계속 그저 그런 갱스터영화에 출연시켰다. 1930년대 초 이들이 감당해야 했던 일련의 갱스터영화 중에는 둘이 동시에 출연한 유일한 영화 <스마트 머니>(1931)도 있었다. 하지만 미술애호가였던 로빈슨이나 뮤지컬에 대한 열정을 숨길 수 없었던 캐그니는 갱 역할만 하면서 스튜디오에 소비되고 싶지 않았다. 두 사람이 해방된 건 엉뚱하게도 그때 불어온 검열의 바람이었다. 보수주의자들은 가뜩이나 갱들이 세상을 휘젓고 다니는 판에 폭력적인 갱스터영화가 득세하는 꼴을 참지 못했고, 헤이즈 위원회를 통해 스튜디오에 압력을 넣었다. 덕분에 로빈슨은 이후 <에리히 박사의 마술총탄>(1940), <시 울프>(1942), <이중배상>(1944), <진홍의 거리>(1945) 등에서 다채로운 재능을 보여줬고, 캐그니 또한 아카데미 남우주연상 수상작인 <양키 두들 댄디>(1942)를 비롯해 <한여름밤의 꿈>(1935), <오클라호마 키드>(1939) 등 여러 장르영화에서 뛰어난 연기를 보여줬다(늘 갱으로 등장하던 그가 갑자기 <G-멘>(1935)에서 FBI 요원으로 출연한 건 정부의 코드를 따르려던 스튜디오의 해프닝으로 받아들이자).
그럼에도 두 사람이 여전히 갱스터영화의 화신으로 우선 기억되는 건 단지 출세작 때문은 아니다. 로빈슨은 이후 <키 라르고>(1948)에서의 인상적인 악당 보스 등 선굵은 연기로 깊은 인상을 남겼고, 캐그니는 <더럽혀진 얼굴의 천사들>(1939), <포효하는 20년대>(1939), <화이트 히트>(1949) 같은 2기 갱스터영화에서도 진가를 마음껏 드러냈다. <더럽혀진 얼굴의 천사들>에서 사형대로 향하는 그의 복잡한 표정이나 <화이트 히트>의 마지막 장면에서 화염과 함께 등장하는 광기어린 표정은 캐그니가 ‘갱스터 배우 중 최고 갱스터’라는 사실을 확실하게 입증해준다. 아무리 <퍼블릭 에너미>에서 조니 뎁의 딜린저가 멋지다 해도 로빈슨과 캐그니만한 포스가 느껴지지 않는 건 단지 시대가 바뀐 탓만은 아닐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