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Skip to contents]
HOME > Magazine > 스페셜 > 스페셜1
비열한 거리에 잠들다

광란의 시대에 태어나 영웅성을 훼손당하며 변주된 갱스터 무비의 계보학

1920년대 미국사회는 사상 유례없는 경제적 번영을 누렸지만, 그 그늘에서는 커다란 독버섯이 자랐다. (시대적 배경은 차이가 나지만) 마치 어둠과 밝음의 교차로 이루어진 <대부>(1972)의 오프닝처럼. 재즈와 찰스턴, 자동차, 그리고 금주법으로 상징되는 시대, 미국 대중이 은밀한 쾌락을 채운 술잔을 목구멍에 넘길수록 누군가의 주머니는 두둑해졌다. 밀주와 도박, 매춘 등의 향락산업을 기반으로 한 갱스터 조직의 성장은 금주법 시대(1920~1933)의 필연적 산물이었다.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아메리카>(1984)의 소년기와 청년기는 현대판 바빌론이라 불려도 좋을 이 시대가 어떻게 갱스터를 키워냈는지에 대한 이야기며, 금주법하의 장례식이 거행되던 날 그들의 우정도, 사업도, 조직도 일거에 안녕을 고한다.

정서적 뒤틀림, 파멸하는 거물

갱스터영화를 하나의 장르로 정착시킨 기념비적인 3편의 영화 <리틀 시저>(1930), <공공의 적>(1931), <스카페이스>(1932)는 모두 이 시기의 실제 갱스터의 삶을 기초로 한다. 서부영화와 필름누아르가 대중문학에서 스크린으로 옮겨왔다면, 갱스터 장르는 신문 헤드라인을 장식했던 갱스터의 삶이 할리우드 내러티브 공식과 접목된 것이었다. 실제로 알 카포네, 벅시 시겔, 하이미 웨이스 같은 이들은 할리우드의 자양분이 되기 이전부터 신문 사회면을 살찌웠다. 이들 갱스터영화에서 주인공의 흥망성쇠가 신문기사로 전환되는 장면이 반복된 것은 이러한 장르적 뿌리의 자기반영이었다.

<포효하는 20년대>

<대부>

갱스터영화가 할리우드의 주요 장르로 정착했던 결정적 계기는 1929년 주식시장 붕괴 이후 대공황의 어둠에 미국사회가 갇혀버린 사건이었다. <리틀 시저>의 등장 이전 선배 격의 몇몇 갱스터영화가 존재하긴 했지만, <리틀 시저>로 시작된 고전 갱스터영화는 대공황기의 대중의 욕망과 조우하는 무언가가 있었다. 대공황은 민주적이고 계급 없는 사회에서 누구나 성공에 이른다는 아메리칸 드림의 허구성을 폭로했다. 계급 상승의 길이 막혀버린 사회에서 자본과 권력의 성취를 위해 필요한 것은 경쟁자를 짓밟는 야만적 폭력성과 탐욕, 무정부주의적인 권력의지이지, 근면과 성실 따위가 아니지 않은가. 빈자가 부자가 될 확률이 낙타가 바늘구멍을 통과할 확률보다 낮다는 사실이 만천하에 드러난 이상, 갱스터영화의 관습 중 하나인 하층민 출신의 인물이 온갖 범죄를 통해 권력의 정점에 이른다는 설정은 ‘가장 현실적인 성공담’이었다. 수전 헤이워드가 갱스터영화가 관객에게 영웅의 무법성과 동일시하는 데서 오는 (대리만족적) 쾌감을 제공했다고 말하는 것은 이러한 이유에서였다.

갱스터 장르의 시작을 알린 <리틀 시저>가 갱스터영화의 원형, 즉 야심으로 똘똘 뭉친 하찮은 놈(little guy)이 범죄를 통해 법과 질서를 경멸하며 거물(big guy)로 성장하지만, 그 성공의 정점에서 파멸로 치닫는다는 내러티브적 공식을 정식화했다면, <스카페이스>는 이러한 내러티브 공식을 극대화했을 뿐 아니라, 토미건의 총성과 커브를 빠르게 도는 자동차의 굉음 같은 도시의 히스테리적 비명이 어떻게 범죄영화의 사실성을 극대화하는지를 보여준 갱스터 장르 최고의 걸작이다.

<스카페이스>는 급속한 상승과 하강의 드라마였다. 특히 토니(폴 무니)는 <리틀 시저>의 리코(에드워드 로빈슨)나 <공공의 적>의 토미(제임스 캐그니)와 비교할 때 훨씬 유아적이고 야만적이다 못해 어떤 광기까지 묻어나는 인물이었다(초현실적인 면모까지 느껴진다). 자신을 되돌아보지 않는 순수한 욕망의 덩어리인 토니는 여동생에게 성적으로 집착하다, 이내 질투심에 눈이 멀어 자신의 심복이자 동생의 남편을 죽인 뒤 파멸의 길을 걷는다. 비록 그가 경찰에 의해 쓰러졌다 하더라도, 죽음의 궁극적 원인은 내면의 뒤틀림이었다. <리틀 시저>의 리코 역시 마찬가지다. 그는 자신을 배신하려는 옛 친구에게 총을 겨누지만, 방아쇠를 당기는 대신 뒤틀린 표정만 짓는다. 야만적이고 잔인한 정서를 유지하지 못한 대가는 가혹한 파멸과 죽음이다.

캐그니는 왜 마지막에 목숨을 구걸했을까

갱스터를 파멸로 이끄는 균열은 외부에서가 아니라 내면의 ‘정서적 뒤틀림’에서 기인한다. 즉, 그들은 외부의 누구에게도 무릎 꿇지 않는다. 그것이 비참한 최후에도 비장미 어린 영웅적 아우라가 사라지지 않는 이유다. 로버트 워쇼는 “실제 도시는 오직 범죄자를 생산하는 반면, 상상의 도시는 갱스터를 생산한다”며 두 세계를 구분한다. 갱스터영화의 갱스터는 단순한 범죄자가 아니라 영웅적 아우라로 충만한 범죄자라는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갱스터영화의 관객은 현실에서 피하고 싶은 대상을 스크린에서 만나기를 욕망하며, 갱스터 장르는 이러한 관객의 도착적 욕망에 의존한다.

<좋은 친구들>

<스카페이스>

고전 갱스터 장르를 대표하는 3편의 영화는 모두 자신의 거친 세계관이 지닌 반사회적 성향을 의식했고, 그것을 경계한다는 표식을 극 속에 남겨두었다. 갱스터의 처참한 죽음이나 영화의 오프닝에 삽입된 계몽적인 자막은 그 예다. 그것으로 갱스터에게서 영웅적 면모를 엿보는 대중의 쾌감을 막기란 힘든 일이었다. 특히 갱스터 장르의 사회적 악영향에 대한 우려를 고조시켰던 <스카페이스>의 성공은 명목상 규제에 불과했던 헤이스 오피스(Hays Office·1922년에 발족된 영화산업 검열 기관)를 더욱 강력한 규정으로 변화시킨 결정적 계기였다. 성과 폭력의 반사회적 묘사에 알레르기 반응을 보였던 헤이스 오피스 앞에서 갱스터 장르는 ‘짧은 전성기’를 마감하고 장르적 변주의 시기로 접어든다. 1930년대 후반에서 1940년대까지 이어진 갱스터 장르의 변주는 크게 세 가지 경향으로, 즉 갱스터의 폭력성을 법과 질서의 수호자(경찰이나 탐정)에게 대체하는 작품들(<G-man> <총알 혹은 투표>, 그리고 필름누아르), 카인과 아벨 구도 속에 친사회적 인물을 갱스터와 대칭을 이루도록 하는 작품들(<맨하탄 멜로드라마> <데드 엔드> <더럽혀진 얼굴의 천사들> 등), 끝으로 농촌을 배경으로 갱스터영화들(<하이 시에라> <그들은 밤에 산다> <키 라르고> <화이트 히트> 등)로 요약된다.

이러한 변주가 이전 대표작과 무관한 것은 아니었다. 가령, 카인과 아벨 구도는 <리틀 시저>의 리코와 매서러, <공공의 적>의 토미와 형의 관계에 내재했던 것이었고, 변주는 이전 작품에서 부차적이었던 특징을 전면화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이러한 변주에서 흥미로운 부분은 갱스터의 영웅성을 훼손하려는 순간이다. 대공황 시절의 빈민촌 소년들에게 선(신부)과 악(갱스터)의 이분법적 모델을 제시하는 <더럽혀진 얼굴의 천사들>(1938)의 엔딩에서 사형장에 끌려가던 캐그니는 겁에 질린 목소리로 목숨을 구걸한다. 영화는 그것이 그의 진심인지, 어린 시절 친구인 신부의 부탁을 들어준 것인지 명확하게 보여주지 않는다. 흥미로운 것은 이때 캐그니의 변화가 갑작스러운 비약으로 나타나 영화의 이물질처럼 느껴진다는 점이다. 즉, 돌출된 비약의 ‘허구성’은 헤이스 오피스를 충족시키면서도 갱스터의 영웅성을 은밀히 즐길 수 있는 여지를 남긴다.

이전 작품에 뿌리를 둔 변주는 세 번째 유형의 작품들도 마찬가지였다. <화이트 히트>(1949)는 <공공의 적>의 어머니에 대한 헌신을 도착적으로 전환시키고, <스카페이스>의 유아적인 광기를 더욱 노골화한다. 또한 <스카페이스>의 엔딩 자막이었던 “세상은 너의 것”이라는 문구를 “나는 해냈어 엄마. 이 세상의 꼭대기야”라는 외침으로 변주한다. 그는 자살의 몸짓을 견지함으로써 정복당하지 않는 갱스터 영웅의 죽음을 되살린다. 물론 가장 갱스터다운 죽음을 부활시킨 사례는 <포효하는 20년대>(1939)의 엔딩이다. 콜린 맥아더가 “갱스터는 길거리에 쓰러져 죽는다는 사실은 이 장르의 가장 견고한 관습”이라고 지적했듯이, 초기 갱스터들은 죽는 순간까지 ‘거리의 남자’로서의 정체성을 잃지 않았다. <포효하는 20년대>의 엔딩은 이러한 죽음의 백미다. 그 순간, 사라져버린 정통 갱스터 장르를 회고하는 듯한 “그는 한때 거물이었지”라는 대사는 갱스터 장르가 마땅히 묻혀야 할 자리에 세운 묘비명이었다.

향수와 해체 사이에서 길을 찾다

1950년대 이후 총성을 멈췄던 갱스터는 1960년대 미국사회의 혼란을 틈타 다시 할리우드에 출현한다. 금주법과 대공황의 혼란을 고향으로 하는 갱스터가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혼란기의 시대에 부활한 것은 당연한 일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우리에게 내일은 없다>(1967), <내일을 향해 쏴라>(1969), <스팅>(1973) 등은 갱스터영화이긴 하지만 좀 더 일반적인 범죄영화에 가까웠다. 고전기 이후 영화 중 갱스터 장르의 계보학은 <대부> 시리즈와 <원스 어폰 어 타임…>, 그리고 <비열한 거리>(1973)로 시작해 <좋은 친구들>(1990)로 정점에 이른 마틴 스코시즈의 ‘거리 영화’로 요약 가능할 것이다. 향수 어린 시선으로 갱스터(장르)의 역사를 바라보는 작품과 그 신화를 해체하는 작품이 현대 갱스터영화의 양극을 이루는 셈이다.

<공공의 적>

<보니 앤 클라이드>

<대부>가 1940년대를 배경으로 미국 역사를 범죄의 역사로 쓰려 했다면, <대부2>는 아버지와 아들로 이어지는 수직적 관점에서 역사의 순환, 혹은 반복을 이야기한다. 그리고 <대부3>는 그 순환을, 그리고 갱스터(장르)를 향한 향수를 종결시키고자 한다. <대부3>의 마이클 콜레오네(알 파치노)의 지난 삶에 대한 인식은 <원스 어폰 어 타임…>의 누들스(로버트 드 니로)에게서 피어났던 허망한 아편 연기와 다르지 않다. 이러한 면에서 금주법과 대공황의 시대를 향수의 정서로 바라보는 지금의 갱스터영화가 형식의 매너리즘을 통해서만 성립할 수 있음을 보여주는 사례는 <로드 투 퍼디션>(2002)이다. 영화의 1930년대는 실제적 의미를 상실한 채, 우아한 형식적 표면을 위한 알리바이의 기능을 다한다. 그 공허함을 채우는 것은 향수의 시선이다. 그것이 이 영화가 <대부>나 <원스 어폰 어 타임…>와 다른 이유다.

새로운 현대 갱스터영화는 마틴 스코세지에게서 시작되었다. 그에게 갱스터는 과거가 아닌 현재적 의미이다. 고전 갱스터 장르가 실제 갱스터와 영화 속 갱스터 영웅을 구별했던 것과 달리, 스코세지 영화는 전자가 후자를 압도하거나 흡수한다. 그의 영화에는 토미건의 총성이 아닌 당구장의 개싸움이 있을 뿐이며, 우리가 현실에서 만나고 싶지 않는 범죄자가 그 모습 그대로 내비친다. 어쩌면 헤이스 오피스가 꿈꿨던 영웅적 아우라가 삭제된 갱스터를 가장 완전하게 구현한 이가 있다면, 그는 아마도 마틴 스코시즈였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