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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읽기] 역사적 콤플렉스에 대한 정직한 재현

서독 적군파 다룬 다큐드라마 <바더 마인호프>

<바더 마인호프>는 서독 ‘적군파’(RAF: Rode Armee Fraktion)를 다룬 역사영화다. 서독 ‘적군파’는 흔히 ‘스튜던트 파워’라 불리는 1960, 70년대 학생운동에서 지하무장투쟁 노선을 제시하고 실천에 옮겼던 한 분파의 이름이며, 경찰과 언론은 그 집단의 제1세대 지도자인 안드레아스 바더와 울리케 마인호프의 이름을 따서 ‘바더·마인호프그룹’이라 불렀다. 영화는 적군파를 출범시켰던 이 제1세대 지도자들의 삶과 투쟁과 죽음을 영화적으로 재현하고 있다(서독 적군파는 그들의 죽음 뒤에도 존속했으며, 1998년 4월 해체 선언과 함께 스스로 해산했다). 영화는 1967년에 시작해서 1977년에 끝이 난다. ‘바더·마인호프그룹’의 활동을 중심에 놓을 때, 이 10년은 대략 세 시기로 구분될 수 있을 것이다. 첫 번째 시기는 1967에서 1970년에 이르는 3년간으로, 이 그룹의 태동기라 할 수 있다(바더그룹의 시위성 테러와 진보적 저널리스트 마인호프의 결합). 두 번째 시기는 1970년에서 1972년에 이르는 2년간으로, 이 그룹의 본격적인 활동기라 할 수 있다(요르단에서의 군사훈련과 은행 습격, 그리고 연방법원판사 차량, 우익언론 슈프링어, 미군 유럽지부 사령본부 등에 대한 폭탄 테러 등). 세 번째 시기는 1972년에서 1977년까지의 5년간으로, 이 그룹의 감옥투쟁기라 할 수 있다(감옥 내에서의 단식투쟁과 재판투쟁, 그리고 외부 단원들에 의한 보복성 요인 납치 및 암살 등).

스타일의 차이, 심리적 거리의 차이

역사영화로서 <바더 마인호프>의 두드러진 특징은 스타일 측면에서의 ‘불균질성’이다(이 영화에 부여된 ‘다큐드라마’라는 장르 명칭은, 그 불균질성을 가리키는 다른 이름일 것이다). 영화에는 공들여 재연(再演)된(또는 극적으로 연출된) 장면들과 다양한 당대의 기록영상이 공존한다. 하지만 이러한 불균질성은 현대사를 다루는 역사영화에서 흔히 나타나며, 따라서 새롭지도, 큰 의미를 지니지도 않았다(주로 TV뉴스에서 가져온 그 기록영상들은 시대 배경에 대해 압축적으로 설명하는 기능을 할 뿐이다). 이 영화가 지닌 좀더 흥미롭고 의미있는 불균질성은, 영화 전체의 리듬과 톤에서 나타나는 어떤 비일관성이다. 영화는 1967년에서 1972년까지(위의 구분에 따르자면 첫 번째와 두 번째 시기)를 다루는 전반부와 1972년에서 1977년까지(세 번째 시기)를 다루는 후반부로 나눌 수 있으며, 양자 사이에는 스타일 측면에서의 현저한 차이가 있다. 영화의 전반부가 좀더 극적으로 다듬어져 있다면 영화의 후반부는 거의 화면으로 재구성된 주요 사건일지에 가깝다고 할 정도로 빠르고 건조하게 전개된다. 가령, 영화에서 다루는 첫 번째 주요 사건(1967년 6월2일 이란 국왕 팔레비의 서독 방문에 대한 항의 집회 도중 발생한 대학생 사망사건)은 매우 극적으로 클로즈업되지만, 영화에서 다루는 마지막 주요 사건(1977년 10월19일, 적군파 단원들에 의해 납치된 서독 기업연합회장 총살 사건)은 화면상으로 제대로 재현되지 않는다. 더욱이 그때 들리는 보이지 않는 총성과 함께 영화는 느닷없이 끝을 맺는다. 정말 단호한 마침표다.

이 현저한 처음과 끝의 차이, 이 두드러진 스타일상의 차이는 무엇을 의미할까? 여러 가지 대답이 가능하겠지만, 그 리듬과 톤의 차이는 각각의 사건에 대해 카메라가 지닌 심리적 거리의 차이를 표현한다는 것도 그 가능한 대답 중 하나일 것이다. 이 영화의 제작자이자 시나리오작가인 베른트 아이힝거와 감독인 울리 에델은 1970년 뮌헨영화아카데미를 함께 다녔다. 바더·마인호프그룹과 같은 시대의 분위기를 호흡했던 그들이 그 집단의 탄생과 활동에 대해 지닌 시선은 양가적이다(아이힝거가 이 영화에 대해 말했다는 ‘분열된 드라마투르기’란 그 양가적 태도의 표현이자 필연적 귀결일 것이다). 영화는 바더·마인호프그룹의 도시게릴라 투쟁 노선이 태동할 수밖에 없었던 배경과 시대의 분위기에 대해서는 최대한 가까이 다가가서 공감을 표하지만, 결국 ‘자기 목적에 반하는’ 극단적 폭력들에 대해서는 거리를 두고 바라본다. 전자는 1968년 6월2일의 시위 중 대학생 사망 사건과 1968년 10월14일 우익 과격분자에 의한 학생운동 지도자 루디 두치케 암살 미수 사건 등에 대한 극적인 재현을 통해서 표현되며(이 두 사건은 전후 냉전체제 속에서의 오랜 침묵에서 벗어나 기지개를 켜던 학생운동이 대중화, 급진화되면서 학생봉기 성격을 띠는 기폭제가 된다), 후자는 후반부에 나타나는 적군파에 의한 일련의 테러에 대한 건조한 나열로 표현된다. 거꾸로 전반부의 극적 재현은 일정한 대중적 지지(영화에 따르면 30살 이하 젊은 층의 25%의 지지) 속에서 투쟁하던 바더·마인호프그룹을, 후반부의 건조한 나열은 자기 파괴적인 폭력 속에서 고립되어가는 그들을 표현하는 것이기도 하다.

‘올바른 대답’을 찾을 수는 없었다

영화의 원제(그리고 원작인 소설의 제목)는 <The Badder Meinhof Complex>이다. ‘바더·마인호프그룹’의 탄생은 독일 현대사가 지닌 콤플렉스의 표현이었다. 독일의 전후세대에게 미국에 의해 저질러진 베트남에 대한 무차별 폭격은, 아우슈비츠(제국주의적이고 인종주의적인 대량살상이라는 점에서)와 드레스덴(2차대전 말, 영·미 연합군에 의해 무차별 폭격을 당했던 독일의 도시)에 대한 억압된 기억의 귀환이었다. 그들은 자신의 부모세대가 가해자이자 동시에 피해자인 그 무차별한 폭력의 반복에 분노를 느꼈고, 그것을 승인 또는 방관하는 부모세대를 용납할 수 없었다(서독은 미군의 주요 군사기지 중 하나였다). 바더그룹 최초의 행동인 백화점 폭탄테러는 ‘미국의 베트남 침공과 학살에 대한 저항’의 표현이었다. 그들은 ‘올바른 질문’을 제기했지만, ‘올바른 대답’을 찾을 수는 없었고, 그리하여 그 자신이 독일 현대사의 또 다른 콤플렉스가 되었다. 그 콤플렉스에 대한 영화적 재현을 시도하는 <바더 마인호프>의 시선은 결코 ‘객관적’이지 않으며, 그것에 대한 양가감정과 분열적 태도를 감추지 않는다. 걸작인지는 알 수 없지만, 매우 정직한 영화임에는 틀림없다.

그런데 전후 서구(또는 제1세계)의 저항운동에서 가장 과격한 형태의 무장투쟁집단이 발생했던 곳이 파시즘의 역사를 갖고 있던 국가들(서독과 일본의 ‘적군파’와 이탈리아의 ‘붉은 여단’)이었다는 것은 단지 우연이기만 한 것일까? 새삼 궁금해지는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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