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동안 시시껄렁한 이야기로 칼럼을 도배하는 바람에 국내 최고의 잡지 <씨네21>의 품위를 손상시키던 김연수와 내가 이제는 매회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세상은 점점 나아지는 것인가?’와 같은 심하게 철학적인 주제에 대해 토론하는 걸 보면, 아녜스 자우이가 영화를 만들면서 던졌던 질문 ‘사람이 바뀔 수 있는가?’는 이미 답이 나온 셈이다. 사람은, 칼럼은, 바뀔 수 있다. 아녜스 자우이는 ‘아주 드물고 어렵긴 하지만 사람은 바뀔 수 있다’고 했지만 우리는 뭐, 별로 어렵지 않던데…. 그게 문제이긴 하다. 나는 바뀌었다고 생각하는데, 사람들은 전혀 모를 수도 있고, 사람들은 날더러 바뀌었다고 하는데, 나는 아니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나는 하나도 바뀌지 않았는데, 사람들이 날더러 변했다고 하는 바람에 내가 화를 내며 딴사람처럼 행동하자, 사람들이 “어라 이 자식 뭐야 하나도 안 변했네”라고 말하면, 다른 사람으로 변해버리는 내가 실은 바뀌지 않은 내 모습이라는 것이고…, 워워, 그만하자.
10점 만점 ‘인간측정기준표’를 만든다면…
객관적 기준이 없는데 바뀌었는지 아닌지를 어떻게 평가하나. 예전부터 ‘인간측정기준표’ 같은 게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인간을 숫자로 측정하는 거다. 이거 은근 재미있을 것 같지 않나. 우선 김중혁을 기계에 넣어보자. 만점은 10점이다. 외모지수 7, 대인관계지수 8, 소설 쓰는 능력 6, 목소리 7, 뒤끝지수 9, 배려심 3…. 아무렇게나 막 적어놓은 것 같지만 모든 지수에는 객관적 근거가 있다. 외모지수는 눈썹, 눈, 코, 입, 귀의 이상적인 비율과 눈꼬리의 각도, 주름의 개수, 콧날의 각도 등을 기준으로 한 것이며 대인관계지수는 1분당 상대방에게 말한 단어의 개수, 상대방의 이야기를 들을 때의 표정 변화, 발신전화와 수신전화의 통화시간 비교, 발신전화 횟수와 수신전화 횟수의 비교분석, 수신전화 거부 횟수 등의 과학적인 자료를 토대로 한 것이며 소설 쓰는 능력은 한쪽당 쓰인 부사와 형용사의 개수를 확인한 다음… 워워, 그만하자.
이렇게 다각적인 분석 자료로 점수를 매긴다면 10점 만점에 10점을 받는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며, 박진영씨도 그걸 알았는지 오직 외모만을 평가하여 <10점 만점에 10점>이라는 노래를 작사하게 된 것이다. 이렇게 인간을 측정하다보면 <씨네21>의 20자평처럼 별점을 매길 수도 있을 것 같다. 말 나온 김에 김연수의 별점을 한번 매겨보자.
<인간 김연수> 김중혁 술자리에서 잠드는 후반부만 빼면 유쾌하다. 40대가 더욱 기대되는 인간 ★★★★
주위 사람들에게 인간 김연수의 별점을 매겨달라는 부탁을 할까 하다가 별점이 적게 나오면 흥행에 성공하는 인간이 될 거라는 착각을 할지도 몰라서 (혹은 별 다섯개가 많이 나오면 내가 샘낼지도 모르니까) 관두기로 했다.
인간을 숫자로 파악하려는 시도는 아주 오래전부터 있어오긴 했다. 점수를 매기는 건 아니지만 이슬람교 수피파 신비주의자들은 에니어그램이라는 이론을 통해 인간을 9가지 유형(참고로 저는 4번 유형)으로 나누었다. 에니어그램을 신봉하지는 않지만 에니어그램 책을 읽다보면 주변의 인간을 이해하는 게 좀더 쉬워지며 때로는 나 자신을 이해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인간이란 게 아무리 복잡해 보여도 고작 9가지 유형이라는 사실에, 나는 묘한 쾌감을 느꼈다. 한때는 사람을 만날 때마다 속으로 ‘아, 저 사람은 5번, 저 사람은 7번 유형’ 이러면서 인간을 분류하기도 했다. 스스로의 사람 보는 눈에 감탄하기도 했다. 어릴 때 얘기다. 지금은 안 그런다. 살아가면서, 사는 게 그렇게 단순하지 않음을 점점 깨닫고 있다. 인간이란 게 역시, 힘든 텍스트구나, 새삼 느끼고 있다.
정말 잘 모르겠어… 나는 외계인?
인간을 지나치게 단순화시키지만 않았더라면 <킹콩을 들다>는 재미있는 영화일 수 있었다. 유니폼에서 학교 이름을 떼어내고 선생님 이름인 ‘이지봉’을 적어 넣는 장면에서는 손발이 오그라들었고 (난 자꾸만 ‘이거봉으로 잘못 쓰면 어쩌지’라는 생각이 들어 혼자 몰래 웃었다) 상여를 메고 가다가 번쩍 들어올리는 장면에서는 낯뜨거워 눈을 감고 말았지만 괜찮은 코미디가 의외의 장소에 매복해 있었고 연출의 호흡과 배우의 연기는 부드러워 자연스러웠다. 문제는 모든 등장인물이 너무 단순하다는 것이었다. 마치 등번호를 배정하듯 각 인물들에게 성격 하나씩을 부여한 다음 다른 성격으로의 이전은 불가능하도록 만들어두었으며 폭력교사는 폭력교사로서만 존재하고, 착한 교사는 착한 교사로만 존재하여 (아, 교장은 좀 웃겼다, 박준금의 놀라운 연기!) 사람은 절대 바뀔 수 없다는 진리를 알려주려는 듯했다. 한번 폭력을 행사한 사람은 영원히 폭력에서 벗어날 수 없으며, 악은 영원한 악으로 남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게 진리인지도 모르겠다. 사람은 쉽게 바뀌지 않으니까, 인간은 9가지 유형으로 나눌 수 있을 정도로 단순한 동물이니까. 과연 그런가. 정말로 그러한가.
올해 본 영화 중 가장 기억에 남는 장면은 <다우트>의 마지막 신이다. 인간이란 게 말도 못하게 단순한 동물이라는 생각이 들 때마다 나는 메릴 스트립의 마지막 대사를 떠올린다. 철의 여인이자 징벌의 힘을 믿는 메릴 스트립이 의자에 앉아 내뱉는 마지막 대사 한마디는 그 어떤 장면보다도 나를 생각하게 만든다. (여러 가지 버전으로 해석이 가능할 테지만) “의심이 들어요.” 사람이 만약 바뀔 수 있는 거라면, 마음속에 무수히 많은 ‘의심’들이 쌓이고 쌓여서 그 의심을 어떤 식으로든 풀지 않으면 안되는 처지에 놓였을 때에야 가능한 것이리라. 나는 그 의심이야말로 인간을 가장 복잡하게 만드는 것이 아닌가 싶다. 자신을 의심하지 않는다면 인간은 절대 바뀔 수 없다. 김연수가 ‘세상이란 살면 살수록 힘들어지는 곳이라는 사실을 최근에야 알게 됐다’고 했는데 나는 최근에야 ‘인간이란 알면 알수록 알기 힘든 동물’이라는 사실을 알게 됐다. 내가 예술가라면 ‘인간을 알 것 같기도 하고, 모를 것 같기도 해요’라고 말해야겠지만 난 인간을 잘 모르겠다. 김연수가 예술관객이라면, 나는 외계인? 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