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써 알고 지낸 지가 햇수로…, 그게 그러니까 몇년이더라? 아무튼 까마득한 사이인데 내가 왜 몰랐겠는가? 내가 6학년4반이고, 중혁이가 6반이었던 시절부터 나는 그가 좀 예술가 스타일이라는 사실을 눈치챘다. 특히 심각한 질문을 던질 때마다 6반 친구는 예술가적인 답변을 내게 들려준다. 예술가적인 답변이 어떤 것이냐면, 음, 그러니까 우리 정겨운 ‘시오이엔’ 코언 형제를 예로 들면 좋겠다. 다음은 <위대한 레보스키>를 찍고 난 뒤에 가진 인터뷰. Q: 뉴요커를 주인공으로 마리화나 상용자 영화를 만들 순 없으셨나요? A: 아마 다른 영화가 나오겠죠…. 네, 아주 다를 거예요. 아마도 좀더 폭력적인…. 아니, 그렇지 않을 수도 있고요! Q: 버니 레보스키와 독일 갱들 사이의 관계는 정확히 무엇인가요? A: 그저 포르노영화를 함께 만들었다는 것뿐이죠…. 네, 그저 포르노영화. Q: 그럼 그들은 납치를 공모한 게 아니죠? A: 음, 한 건가? … 음, 아니, 난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 어쩌면?… 아니야, 그렇지 않아.
요컨대 폭력적일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으며, 납치를 공모한 것이기도 하고 그렇지 않기도 하다는 대답이다. 무릇 예술가처럼 보이려면 모든 진지한 질문에 대해서 이렇게 대답해야만 한다. “세상은 점점 나아지는 것인가? 여긴 조금 더 살 만한 가치가 있는 곳인가?” 이런 질문에 대한 예술가스러운 대답은 다음과 같다. “답은 없습니다. 이것은 질문으로만 존재가 가능한 질문입니다.” 어떤 질문을 던져도 이런 답이 돌아올 것이다(지금 심각하게 의문이 드는 것은, 어쩌면 ‘시오이엔’ 코언 형제도 ‘진짜’ 몰랐던 게 아닐까? 그렇다면 이 6반 친구도 혹시?). 어쨌거나 예술가처럼 말하려면 “이번 소설은 좀 대중적이라고 볼 수 있나요?”라고 누가 물을 때, “음, 아무래도 대중적이겠지만, 어떤 점에서는 상당히 비대중적이랄 수도 있어요”라고 대답하는 게 포인트다(나는 이런 거 연습하는 사람이고, 6반 친구는 이런 게 그냥 되는 사람이다. 억울하다).
날 사로잡은 아녜스 자우이 감독의 말
하지만 다음과 같이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착하다고 해야 할까, 순진하다고 해야 할까. “우리가 만드는 모든 영화의 주제는 ‘사람이 바뀔 수 있을까?’이다. 거기에 대한 답은 아주 드물고 어렵긴 하지만 그렇다는 것이다.” 나는 이 문장에서 ‘아주 드물고 어렵긴 하지만’이라는 전제가 무척 마음에 든다. 기나긴 친교의 역사적 경험에 비춰 6반 친구에게 내 의문에 대한 해답을 구하기는 글렀다고 비관하던 어느 날, 나는 관련문헌(이라기보다는 그냥 책상 위에서 뒹굴던 <씨네21>)을 열심히 뒤적이다가 위의 문장을 발견했다. 영화 <레인>을 찍은 아녜스 자우이 감독의 말이었다. 예술가처럼 말하려면 “사람은 절대 바뀌지 않아요. 아니, 하긴 바뀌는 사람들도 있긴 하지만”이라고 대답해야만 할 텐데, 이 감독은 ‘아주 드물고 어렵긴 하지만’이라는 말을 방패 삼긴 했어도 순진하게도 “그렇다는 것이다”라고 말해준 것이다. 심각한 질문에 대한 답을 구하기가 이토록 어려운 시대에 이렇게 대답해주니 얼마나 고마운가. 내가 6반 친구의 대답은 기다릴 생각조차 하지 않고 <레인>을 보러 간 건 이 문장 때문이었다.
예술가들이 어떤 질문에 애매한 답변으로 말끝을 흐리는 건 시시껄렁한 질문에는 불성실한 태도로 일관해야만 한다는 업계의 규약 같은 게 있기 때문은 절대로 아니다. 아녜스 자우이의 말을 빌리자면, 내가 쓰는 모든 소설의 주제는 ‘우리는 왜 당장 죽지 않고 그토록 오래 살아가는가?’라는 것이다. 그 질문에 대해서 답을 구하기 위해 사람들이 살아가는 방식을 자세히 살펴보면 살펴볼수록 해답은 오리무중이다. 6반 친구의 말처럼 해답은 애당초 없는 것처럼 보인다. 이렇게 해서 애당초 원대한 포부와는 달리 이도 저도 아닌, 상당히 어정쩡하고 어물쩡하게 끝나리라는 걱정이 들 즈음에 예술가가 수습이라고 하는 일이 대충 괜찮은 그림 하나를 보여주는 것이다. 도저히 해석할 수 없는 멋진 풍경 같은 것이라면 제일 좋겠다. 하늘에 턱 하니 걸린 보름달을 묘사한다든지, 그게 아니라면 노을을 보여준다든지. 믿기지 않겠지만, 내 경험에 비춰보면 그런 ‘본격예술’적인 이미지들은 대개 그런 식으로 만들어진다.
올여름 비 참 많이 내렸는데, 요즘 내게는 비라는 게 꼭 그런 것이더라. ‘사람은 바뀔 수 있는가?’라는 궁금증을 해결하기 위해서 찍었다는 <레인>을 보면 인간이라는 게 얼마나 바뀌기 힘든 것인지 여실하게 느껴진다. 성공한 페미니스트 작가처럼 보이지만 아가테는 사실 여전히 독불장군 같은 언니로 살고 있다. 20년째 입으로만 걸작 다큐멘터리를 만드는 미셸은 또 어떤가? 엄마 때문에 화가 난 카림의 얼굴을 보노라면 어린 시절의 표정도 고스란히 보이는 것 같다. 시간이 지나면 모든 게 달라질 것이라고는 말하지만, 아무리 봐도 달라지는 건 하나도 없는 것 같다. 어쩌면 이게 바로 아녜스 자우이 감독이 말한 ‘아주 드물고 어렵긴 하지만’의 의미일 것이다. 프랑스의 풍경을 찍어야 한다는 미셸의 주장에 산꼭대기까지 올라갔다가 비에 쫄딱 젖어버린 아가테의 꼴이 그녀의 변치 않은 모습이라고 감독은 말하는 것 같다.
비를 보면서 외치다 “이건 반칙이야!”
마찬가지로 나는 세상이란 살면 살수록 힘들어지는 곳이라는 사실을 최근에야 알게 됐다. 이렇게 오래 살지 않았더라면 절대로 몰랐을 진리다. 하지만 이런 세상에 비라는 게 내린다. 시간당 30mm씩, 잘도 내린다. 영화에서, 또 현실에서 내리는 비를 보면서 나는 속으로 “이건 반칙이야!”라고 외쳤다. 바뀌는 것은 하나도 없는, 찌질하기만 한 우리의 모습을 시종일관 비춰주다가 갑자기 내리는 비를 보여주면서 모든 걸 무마시키다니. 그래놓고서는 ‘아주 드물고 어렵기는 하지만’ 사람은 바뀌는 것이라고 결론내리다니. 역시 아녜스 자우이도 예술가였단 말인가? 이런 식으로 얼렁뚱땅, 그런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한 상황으로 넘어가려고 하다니. 그런 게 예술가의 일이라면 우리의 인생은 또 누구의 작품이기에 이 모양일까? 역시 이런 질문에도 메아리는 없고, 다만 비만이, 그런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한 빗줄기만이, 예술영화의 마지막 장면처럼, 애매하게, 모호하게, 잘도 내린다. 그 비만 보는데도 나는 대답을 들은 것처럼 마음이 흡족해지니 이건 또 무슨 조화인지 모르겠다(이른바 예술관객? 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