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가 시즌의 시작과 동시에 제13회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가 열린다. 부천을 찾아 시원한 극장에서 온갖 장르영화를 즐겨보자. 무서운 것도 있다. 웃긴 것도 있다. 심지어 야한 것도 있다. <씨네21>이 뽑은 강추작 10편을 소개한다.
비스트 스토커> The Beast Stalker
단테람 | 홍콩 | 2008년 | 109분 | 부천 초이스 장편
‘냉혈한’으로 불리는 형사 통은 용의자와의 추격전 도중 검사 앤의 큰딸을 죽인다. 통은 죄책감에 시달리고, 앤은 검사로서 통이 잡으려던 용의자의 죄를 물으려 한다. 이때 용의자 조직은 앤의 둘째딸을 납치한다. 유죄를 확정지을 결정적인 증거를 없애는 게 조건이다. 한편, 사주를 받아 앤의 딸을 납치한 남자는 사고로 식물인간이 된 아내를 보살핀다. 통은 속죄를 위해, 앤은 딸을 지키기 위해, 납치범은 병든 아내를 위해 사건에 뛰어든다.
<비스트 스토커>는 촉각을 다투는 범죄극이지만, 쫓는 자와 쫓기는 자의 추격전으로만 채워진 건 아니다. 영화는 인물 개개인의 절절한 사연을 심도있게 묘사하는 한편, 이들을 엮은 기이한 인연의 끈을 보여준다. <Option Zero> <야수형경> 등을 연출한 단테람 감독의 신작. <흑사회>에서 미워할 수 없는 악역을 맡았던 장가휘가 이번에도 뜨거운 사랑을 지닌 납치범을 연기한다.
<속주패왕전> Battle of Guitar
이혜영 | 한국 | 2009년 | 17분 | 부천 초이스 단편
원작은 골 때리는 만화였다. <속주패왕전>은 만화가 이경석의 동명 만화를 애니메이션으로 만든 작품이다. 삼거리 기타교습소 원장 마태풍은 어느 날 사거리 기타교습소 원장 빠박과 속주대결을 벌인다. 결과는 빠박의 승리. 마태풍은 그 대가로 한쪽 팔을 잘린다. 이 광경을 지켜본 마태풍의 제자 승룡은 스승의 복수를 다짐한다.
이후의 이야기는 무협소설 몇권 읽은 이라면 충분히 예상할 수 있다. 빠박에게 원한을 가진 한 남자가 나타나고 그는 승룡에게 전설의 속주비법인 ‘소림십팔괴도권’을 전수한다. 자신의 배설물을 이용하는 더러운 훈련 끝에 비법을 전수받은 승룡은 기타를 든 일지매로 불리며 무림에 파장을 일으키기 시작한다. <속주패왕전>은 속주 기타리스트들의 대결을 무협소설인 이야기로 풀어냈다는 점보다 거칠고, 더럽고, 뻔뻔한 묘사들이 더 눈길을 끄는 애니메이션이다. 피가 난무하고, 똥이 배설되는 모습들이 기가 차지만, 막 나간다 싶은 결말을 막 나가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 와중에 음악을 향한 열정의 울림을 채워넣는 기예도 있다.
<초콜렛> Chocolate
프라차야 핀카엡 | 타이 | 2008년 | 89분 | 월드 판타스틱 시네마
무에타이를 하는 아오이 유우의 영화다(진짜 아오이 유우가 출연하는 건 아니다). 토니 자를 데리고 <옹박: 무에타이의 후예>를 만들었던 프라차야 핀카엡이 이번에는 어린 소녀를 데리고 4번째 <옹박>을 찍었다. 일본 남자와 타이 여자 사이에서 태어난 소녀 젠은 자폐아다. 그녀는 귀로 듣고 눈으로 보고 따라하면서 무술을 연마한다(젠이 즐겨 보고 따라하는 영화가 <옹박>이다). 어느 날, 엄마가 암에 걸리고 젠은 엄마의 노트를 발견한다. 엄마의 돈을 빌렸으나 갚지 않은 사람들의 명단이다. 젠은 그들을 찾아가 말한다. “우리 엄마 돈 내놔!” 물론 누구도 돈을 쉽게 내주지 않는다. 레이어드 보브 스타일의 머리를 하고 파자마를 입은 젠은 갈고리를 든 얼음공장 아저씨, 도끼칼을 든 정육점 오빠들과 1 대 다수의 대결을 벌인다. <옹박>이 곧 토니 자였던 것처럼 <초콜렛>도 젠을 연기한 지자 야닌의 영화다. 이케와키 지즈루를 닮은 얼굴과 가냘픈 체구로 ‘속 탓’, ‘카오치엥’ 등의 기술을 구사하는 모습은 놀라울 수밖에 없다. 대역 없이 진짜 무술을 한 야닌의 모습은 영화의 마지막 NG장면 모듬에서 확인할 수 있다.
<소년 메리켄사쿠> The Shonen Merikensa
구도 간쿠로 | 일본 | 2009년 | 125분 | 오프 더 판타스틱
펑크(PUNK)는 ‘괄호’ 안의 열정이다. 누군가는 펑크에 열광했던 시절의 모습을 액자 뒤에 숨긴다. 또 누군가는 펑크의 열정을 숨기고 손으로 하트를 그리는 아이돌 그룹의 멤버가 된다. <소년 메리켄사쿠>는 괄호 속의 펑크가 괄호 밖으로 나오기까지의 이야기다. 음반기획사 직원인 칸나는 어느 날, 펑크밴드 소년 메리켄사쿠의 동영상을 보고 대박을 직감한다. 한때 펑크밴드의 일원이었던 사장도 오케이다. 그런데 그 동영상은 25년 전에 촬영된 거였고, 그때의 멤버들은 치질, 언어장애, 알코올중독, 노안에 시달리는 아저씨가 됐다. 칸나의 속도 모른 채 회사는 소년 메리켄사쿠의 사이트를 런칭하고, 일본 전역의 펑크팬들이 그들의 콘서트를 요구한다. 결국 전국 콘서트에 나서게 된 이들이 바라는 것은 오로지 ‘기적’뿐이다. <고> <핑퐁> 등의 각본을 쓴 구도 간쿠로가 연출한다. 만화적인 캐릭터들의 소동, 멤버들 사이의 반목 등을 유쾌하게 그려냈다.
<빌루> Billu
프리야다샨 | 인도| 2009년 | 132분 | 패밀리 판타
빌루는 가난한 이발사다. 빚 독촉에 시달리는 것 외엔 특별한 사건이랄 게 없던 빌루의 삶은, 그러나 영화배우 사히르 칸의 등장으로 일대 폭풍에 휩싸인다. 이 영화의 코믹한 딜레마는 가진 건 없지만 선량한 주인공 빌루의 처지에서 비롯된다. 사히르 칸이 신작 영화를 찍기 위해 부두다를 찾자 그곳 주민들은 그와 만나고 싶어 안달하는데, 그 와중에 빌루가 칸의 어릴 적 친구라는 소문이 급격히 퍼져나간다. 마을 사람들은 물론 가족들의 지속적인 강압과 협박에 못 이겨 빌루는 사히르 칸에게 연락을 취하려 애쓰는데, 상대가 워낙 슈퍼스타인 탓에 쉽지가 않다. 빌루는 과연 칸과 재회할 것인가. 칸은 그를 기억할 것인가. 가족애와 우정을 감동적으로 설파하는 이 인도영화는 자신의 태생을 증명하듯 뮤직비디오를 연상케 하는 화려한 댄스신을 군데군데 배치했다. 사히르 칸의 출연작 또한 극중극 형식으로 곁들여지는데, SF와 액션, 멜로를 버무린 이들 장면은 기대 이상의 재미를 선사한다. 인도에서 실제로 대단한 인기를 구가 중인 샤룩 칸이 옛 친구의 정을 잊지 않는 발리우드의 별로 출연한다.
<이웃집 좀비> The Neighbor Zombie
오영두, 류훈, 홍영근, 장윤정 | 한국 | 2009년 | 85분 | 부천 초이스 장편
좀비 바이러스가 만연한 세상, 우리에겐 어떤 일들이 닥칠까. <이웃집 좀비>는 여섯개의 에피소드로 이뤄진 옴니버스 좀비영화다. 눈에 띄는 특색이라면 동일한 세계관을 공유하되 거기서 완전히 다른 장르를 뽑아냈다는 것. <틈 사이>가 좀비 바이러스의 진행 과정에 집중하는 모노드라마에 가깝다면 <도망가자>는 좀비 애인마저 사랑한 한 여인의 결단을 그린 비극적인 멜로드라마고, <백신의 시대>가 특수 부대원 3인과 좀비들의 대결을 다룬 액션스릴러라면 <그 이후… 미안해요>는 총잡이를 등장시켜 서부극의 느낌을 자아낸다.
<뼈를 깎는 사랑>은 효도, <그 이후… 미안해요>는 복수와 회개, 용서의 문제를 각각 다룬다. 고유한 스토리 아래 각 에피소드의 크레딧을 감각적으로 소개하는 마지막 편 <폐인킬러> 역시 신선한 시도가 돋보인다. 전반적으로 2천만원가량의 제작비로 완성됐다곤 믿기 힘들 정도인데, 이는 무엇보다 기획 당시의 아이디어가 뛰어나기 때문일 것이다. 오영두, 류훈, 홍영근, 장윤정 등 네명의 감독이 힘을 합친 결과물. 장르를 마음껏 가지고 놀겠다는 포부가 돋보인다.
<어둠의 딸들> Daughters of Darkness
해리 쿠멜 | 벨기에, 프랑스, 독일 | 1971년 | 100분 | 판타스틱 감독백서: 그들만의 뱀파이어
영화 사상 가장 섹시하고 아름다운 뱀파이어물을 꼽는다면 토니 스콧의 <악마의 키스>, 프랜시스 포드 코폴라의 <드라큐라>, 그리고 해리 쿠멜의 <어둠의 딸들>이다. <어둠의 딸들>에선 무엇보다 영원한 젊음을 유지하려는 뱀파이어 엘리자베스 바토리를 연기한 델핀 세이릭의 느긋한 관능적 매력이 일품이다. 눈부신 금발에 가느다랗게 눈썹을 그리고 핏빛 립스틱으로 무장한 그녀는, 전작 <지난해 마리앵바드에서>의 화려한 정지숏들을 혹은 30년대 마를렌 디트리히나 그레타 가르보의 얼음장 같은 아름다움을 되살리며, 벨라 루고시와 크리스토퍼 리 같은 ‘아저씨’ 뱀파이어들의 느끼함을 표백시킨다.
영화의 내용 자체도 묘하다. 비밀 결혼식을 올린 스테판과 발레리, 그리고 몇 백년 동안 유럽을 유람하며 피를 찾아헤맨 바토리 백작 부인과 그녀의 비서 겸 하녀 겸 동료 뱀파이어 일로나가 텅 빈 특급 호텔에서 마주친다. 4명의 시선이 끈적하게 뒤얽히면서, 스테판과 발레리 두 이성애자들의 끈적한 러브 스토리처럼 시작하던 사랑의 작대기가 마구 복잡해진다. 여기에 느닷없이 끼어드는 복장도착과 시체애호, SM 취향은 다소 황당할지언정 놀랄 만큼 자극적이고 우아하게 처리된다. 두서없고 불균질하더라도 ‘분위기’를 중시하는 관객이라면 놓칠 수 없다.
<피쉬 스토리> Fish Story
나카무라 요시히로 | 일본 | 2009년 | 112분 | 오프 더 판타스틱
<피쉬 스토리>라는 노래 한곡이 1953년, 1975년, 1982년, 1999년, 2009년, 2012년을 오가며 나비효과를 불러일으킨다. 섹스 피스톨스가 등장하기도 무려 1년 전 일본에 등장했던 선구자적 펑크 밴드 ‘게키린’의 <피쉬 스토리> 가사에는 어떤 비밀이 있다. “내 고독이 물고기였다면, 너무나도 거대하고 맹렬하기 때문에 고래마저도 달아날 거야. 틀림없이 그럴 거야.”
1975년 발표 당시에는 엔카 발라드만 원하던 일본에선 전혀 인정받지 못했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이 노래는 불량배에게 시달리는 여성을 구하고, 여객선 하이재킹을 저지하고, 지구를 향해 돌진하는 혜성 앞에 맞설 용기를 제공한다. “이렇게 좋은 노래가 안 팔린다고? 당신에겐 닿지 않는가? 누구 듣고 있는 사람이 없는가?”라는 덤덤한 외침이 결국엔 “음악이 세계를 구원할 거야”라는 낙관론과 우주적 희망으로, “우린 안될 거야 아마”의 정서가 스리슬쩍 “언젠간 될지도 몰라”로 바뀌는 순간 전해지는 따뜻한 감동은 비할 바 없다. 우리가 사라진다고 해서, 우리가 실패했다고 해서 우리가 해온 모든 일들이 무의미해지는 건 아니다. 이사카 고타로의 동명 단편을 영화화한 작품이며, 감독 나카무로 요시히로는 <집오리와 들오리의 코인로커>에 이어 이사카 고타로와의 두 번째 인연을 맺었다.
<나쁜 놈이 더 잘 잔다>
권영철 | 한국 | 2009년 | 85분 | 월드 판타스틱 시네마
익숙한 장르의 전형적인 구도로 시작한 다음, 결말까지 보는 재미를 잃지 않기란 쉽지 않다. <나쁜 놈이 더 잘 잔다>는 90년대 중·후반을 휩쓸었던 ‘오합지졸 군상이 벌이는 경쾌하고 끔찍한 범죄물’의 연상선상에 있다. 그러나 ‘대충’ 정해둔 미래의 꿈에 모든 걸 걸고 질주하는 청춘의 무방비함이 생생한 디테일로 펄떡거리면서, 새롭게 눈여겨보게 되는 영화적 매력을 획득했다. 특히 욕망에 희번덕거리는 젊은 배우들, 김흥수와 오태경, 서장원, 조안의 실감나는 눈매가 인상적이다.
곧 출소를 앞둔 아버지는 철천지 원수, 연예인이 되겠다고 날뛰는 철없는 여동생도 하자투성이, 게임밖에 할 줄 모르는 뚱땡이 막내도 거추장스런 혹이다. 윤성은 주유소에서 아르바이트를 뛰지만, 남몰래 꿈꾸는 캐나다 취업 이민을 가기엔 턱도 없이 부족한 돈을 받을 뿐이다. 집에서나 밖에서나 얼굴을 찡그리고 살 수밖에 없는 이 우울한 청춘은, 포르노 업자와 그 밑의 똘마니로 일하는 동창 친구들, 불법 하우스 도박판과 얽히면서 점점 비루한 종말로 치닫는다. <아내의 애인을 만나다>의 조감독 출신인 권영철 감독의 장편 데뷔작이다.
<유리의 날> Yuri’s Day
키릴 세레브렌니코프 | 러시아, 독일 | 2008년 | 137분 | 오프 더 판타스틱
전세계 순회공연을 다니는 유명 오페라 가수 류바는 아들 안드레이와 함께 고향을 찾는다. 류바가 유년의 기억을 떠올리며 잠시 잠이 든 사이 안드레이는 어디론가 사라진다. <유리의 날>은 어둠의 기운을 잔뜩 머금은 미스터리영화다. 아들의 발자국을 찾아 헤매는 동안 류바는 굶주린 이들의 먹잇감이 되고, 자신이 지니고 있던 모든 것을 하나씩 내줘야만 한다. 연극연출가 출신인 감독은 단지 붕괴 직전의 사회의 고통을 들추는 데 그치지 않는다. 류바는 심지어 자신의 목소리까지 잃게 되지만, 그건 새로운 삶의 목소리를 얻기 위한 숭고한 시련임이 드러난다. 얻기 위해선 잃어야 한다는 것, <유리의 날>은 미(美)와 윤리 사이에도 변증법이 작동함을 증명하려 한다. 기괴한 배경음악이 드라마가 전개됨에 따라 어떻게 변하는지 주의 깊게 들어보라. 음산한 도시의 풍광과 류바의 내면을 번갈아 클로즈업하는 카메라 움직임도 눈여겨볼 요소다. 지난해 바르샤바국제영화제 대상 수상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