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저 나는 랩가수들이 그렇게 하듯 이 칼럼을 내 영국인 친구 스티븐 크레민과 데릭 엘리에게 특별히 바친다. 내 나라 프랑스에 좀 미안하긴 하지만, 사실 프랑스의 시네필 세계에선 영국을 경멸하는 경향이 있다. 장 뤽 고다르는 <영화사>에서 “미국 사람들은 영화예술로 광고를 만들었는데 영국 사람들은 늘 그렇듯 영화예술에서 한 게 아무것도 없다”는 어리석은 말을 한다. 또 트뤼포는 히치콕에게 감히 “영국이라는 단어와 영화라는 단어 사이에는 뭔가 불일치한 점이 있는 게 아닌가 싶다”고까지 말했다.
세대가 바뀌면서 새로운 세대가 옛 세대를 꼭 닮지는 않는다는 것이 천만다행이다. 1980년대에 태어난 프랑스 세대들은 블러와 오아시스 같은 영국 브릿팝 밴드의 음악을 들으며 첫 여자친구를 사귀었고, 그녀가 떠나갔을 땐 라디오헤드를 들으며 울었다. 그리고 그녀와 한창 좋았던 시절엔 <트레인스포팅> <쉘로우 그레이브> <레이닝 스톤> 혹은 <네번의 결혼식과 한번의 장례식> 같은 영국영화들을 함께 봤다.
프랑스와 영국이 가까워진 것이 유로스타 덕분인 것도 분명한 사실이지만, 두 나라 관계 호전의 열쇠는 그보다는 요즘 젊은 세대의 성장 배경에 있다. 현재 20~30대 프랑스 젊은이들은 경제위기를 겪으며 자랐다. 하지만 사회문제를 다루는 프랑스나 벨기에영화(혹은 한국영화)는 영국영화에서처럼 유머, 펀치 혹은 열정적 분노를 가지고 문제에 접근할 줄 모른다. 영국영화에 나오는 주인공들은 항상 우리보다 더 심각한 파탄 지경에 있다. 일년 열두달 중 여덟달을 궁핍 속에서 허덕이며 살지만, 그들은 늘 밝고 웃기며 용기가 충천하다. 실업자가 구직사무소 앞에 줄을 서서 기다리면서 도나 서머의 <핫 스터프>를 들으며 스트립댄스를 추는 모습은 영국영화에서만 볼 수 있는 장면이다. <풀 몬티>가 나온 지 10년, 경기침체가 혹독하게 우리를 내리치는 지금 <굿모닝 잉글랜드>라는 영화가 세계 여러 나라 중 유독 프랑스에서 인기를 누리는 건 논리상 너무나 당연하다. 이 영화는 1960년대 한 해적방송에서 경직된 영국사회 내부에 킹크스, 롤링 스톤스, 터틀스 같은 록밴드의 사운드를 마구 퍼뜨린다는 내용으로, 이는 펑크와 중산모자, 맥주와 다섯시 티타임, 시드 비셔스와 엘리자베스 2세 사이의 영원한 대립이랄 수 있다.
시나리오는 겨우 쓰는 둥 마는 둥 한 이 작품은 배우들의 연기와 웃기는 개그장면을 그냥 죽 겹쳐놓았을 뿐이다. 하지만 <굿모닝 잉글랜드>를 보는 건 영화감상의 기막힌 한순간이 되는데, 이런 유의 작품이 흥행에 성공하는 데에는 일종의 미스터리가 숨겨져 있다. 사실 영국영화라는 이유 하나만으로도 이 영화는 정말 대단한 작품이다. 예를 들자면, 처녀성 빼앗기에 관한 온갖 잡소리와 외설방자한 우스갯소리들이 작품에 가득하다. 그렇다고 <아메리칸 파이>에서와 같은 천박함이 화면에서 흘러나오지는 않는다. <굿모닝 잉글랜드>는 영국식 에너지가 똘똘 뭉친 하나의 덩어리다. 그런 영국을 그토록 필요로 하는 프랑스 사람들로선 그것만으로도 이미 충분하다.
<풀 몬티>에서 그랬듯, 우리 프랑스인들은 우리의 분노를 영국인들이 록음악 속에서 대신 외쳐주기를, 그들이 우리 대신 ‘fuck!’이라고 말해주기를, 우리를 위해 옷까지 훌렁 벗어던져주기를 내심 바란다. 그건 바로 다른 어떤 나라의 영화도 썩어빠진 시대에 사는 우리네 삶의 기쁨을 영국영화처럼 제대로 축원해주지 않으리라는 걸 잘 알기 때문이다. 25살의 비평가 고티에 쥐르겐센은 최근 저서에서 자신과 동세대 프랑스 젊은이들이 영불해협 건너편 나라의 영화에 대해 가진 정열에 대해 다음과 같이 한마디로 요약한다. “영국인들이 자기들 사회를 싫어하면 싫어할수록 나는 그 사회를 더욱 알고 싶고 더욱 사랑하게 된다”고. 신이여, 영국인과 그들의 ‘피끓는’ 영화에 축복을 내리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