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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읽기] 봉준호에 히치콕이 겹쳐지네

<찢겨진 커튼>을 돌이켜 생각하며 <마더>의 죽음을 읽으면

*스포일러 많습니다. <찢겨진 커튼>에서 그로멕을 살해하는 장면은 아주 긴 시퀀스인데, 이에 대해 히치콕은 한 인간을 죽인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우며 또 고통스러운지를 보여주고 싶었다고 했다. 플롯의 측면에서 죽음이 가지는 의미는 대개 ‘전개의 모티브’가 되는 경우가 많은데, 히치콕의 경우 죽음은 손쉽게 발견되는 반면(과정이 다를 뿐 무게는 동일하다), 홍상수처럼 좀처럼 죽음이 등장할 것 같지 않은 (데뷔작 혹은 꿈-시퀀스 제외) 영화도 존재한다. 감독의 입장에서 ‘죽음’이란 꾸준히 변치 않는 자신만의 색을 가진 독특한 영역이다. 그러니 우리가 어떤 작가를 떠올려 그가 죽음을 다루는 방식을 생각한다면, 이는 의외로 작품해석에 큰 도움이 될지 모른다. 봉준호의 필모그래피에서 죽음은 대개 플롯을 위해 이용당한 경향이 있다. <플란다스의 개>에서의 개의 죽음, <살인의 추억>의 일련의 죽음, 그리고 <괴물> 속 현서의 죽음까지. 그런데 <마더>에 이르러 그는 오직 하나의 죽음만을 등장시키는데 그 방식이 지금까지와 다르기에 살필 필요가 있다. 이번에 봉준호는 조금씩 미묘히 바뀌었다. 어떤 이들은 이를 ‘스토리를 위한 비약적 반전’이라 부르지만, <마더>에서 죽음은 단지 플롯을 이끄는 동력에서 멈추지 않기에 이를 서프라이즈라 단정하긴 이르다. 대신 이 장면은 뭔가를 감춘다. 커다란 돌이 갑자기 어두운 터널에서 ‘툭’ 튀어나와 도준의 앞에 놓이는 전반부의 당혹감, 그리고 후반에 드러나는 살인 과정에서 아정은 단번에 ‘퍽’ 죽어버린다. 그리고 아정과 도준의 사이를 날아다닌 돌을 생각할 때, 플롯의 계단 뛰기보다 그들 사이의 간격, 그 노골적 그림은 그래서 더 중요하게 느껴진다. 노인의 시점에서 진행되는 이 장면에서 도준은 확연히 구분된 벽을 사이에 두고 절대 골목으로 들어가지 않는데, 기억력 장애가 발동된 뒤 그가 아정을 발견할 때도 단지 “학생, 왜 이런 데서 자?” 묻고 만다.

의식적으로 여성의 음부를 상기시키는 장면들

그러고 보면 ‘골목 속 아정’의 이미지는 ‘어둡고 긴 가게 속 혜자’를 떠오르게 한다. 가게의 끝엔 작두질하는 혜자가 있고, 골목의 구석엔 코피 흘리는 아정이 있다. 이 영화가 특이하게 긴 화면(2.35:1 비율)에다 아나모픽 렌즈를 선택한 이유는 여기 있다. 옆으로 늘어진 화면은 다르덴 형제식의 접사를 통해 인물 감정을 강조하지만, 이보다 더, 익스트림 롱숏은 영상의 가로를 강조해 보여준다. 렌즈 덕에 멀리서도 도드라져 보이는 혜자의 걸음, 따라서 오른쪽으로 길게 쭈욱 들어가는 이 장면은 영화 전체에서 총 2번 반복되고 또 상당히 의미심장하다. 진태의 집을 향한 첫 번째가 ‘피로 오인된’ 립스틱을 묻혀오는 ‘성공으로 착각된’ 실패였다면(게다가 골프채는 비닐까지 뒤집어썼다), 후반의 경우는 더 처참하다. 당당하게 고물상으로 들어간 혜자는 결국 원치 않게 ‘피범벅이 된 채’ 산으로 도피하는데, 이런 그녀의 앞을 켜켜이 쌓인 나무 둥치가 방해한다. 그러니 다음날 들판에 이르러 추는 자위의 춤은 ‘그녀는 정녕 여자가 아니고 어머니인가? 그렇담 이 해소되지 못한 페드라 콤플렉스를 어찌한단 말인가?’ 상념하게 만든다.

이외에도 공간을 의식적으로 질벽처럼 보이게 한 감독의 의도는 사방으로 뻗친다. 아정이 죽는 날 밤엔 비가 내렸고, 이 컴컴하고 축축한 통로의 이미지는 이내 영화를 잠식한다. 예를 들어 90도로 마주보고 식사하는 장면의 깊은 곳엔 혜자가 앉아 있다. 그리고 화면의 오른쪽 끝에 도준이 있는데, 이 둘의 위치는 가게나 골목에서의 공간 배치와 같은 맥락이다. 이후 등장하는 미선, 어머니가 되고 싶은 그녀는 남편은 어디 두고 오직 혜자의 침에만 의존하는데, 마치 성불구가 여자에게 정(丁)을 꽂는 영화가 생각나는 이 물리적 행동은 침의 효능을 추스르기에 유용하다. 그러고 보면 미선의 허리, 혹은 동네 부인들 몸에 꽂히는 침은 (생김새로 보나 스킬로 보나 돌보다 우월하겠지만) 도준이 던진 돌과 같은 기능이다. 그러니 (한국영화 사상 가장 아름다운) 이 마지막 장면에서 혜자가 위안을 받는 순간의 해소는 두 가지로 나뉘어야 한다. 이른바 장치와 공간, 버스에서 혜자는 여전히 좁은 통로의 구석에 혼자 있는데, 그녀가 춤을 추러 일어난 것은 허벅지에 침을 놓고 나서이다. 그러고 도준이 풀려나기 전 마치 신윤복의 <단오풍정>처럼 직접적 미장센 하나가 등장하는데, 아들의 석방을 알게 된 혜자의 시퀀스가 그것이다. 제문이 가게로 들어오는 장면, 거기서 제문은 유리문에 손을 대고 안을 들여다보다 끝내 좁은 문을 비집고 와 혜자에게 말한다. 진범을 잡았다고. 이 장면은 명백히 여성의 음부를 시각화했다. 그리고 혜자의 작두질은 처음과 달리 피 흘리지 않고 끝난다.

극장을 빠져나오는 어느 관객이 소리쳤다. “그래도 쌀은 너무 남성적 판타지 아냐?” 물론 봉준호도 이를 의식한 듯 보인다. 아정의 휴대폰이 발견되는 쌀독에 손을 집어넣는 할머니의 움직임이 단정치가 않은 것이 그 첫째 증거라면, 중학생들 사이에 도는 쌀 소문의 주인공은 종팔이가 아니고 할아버지란 추론은 그 뒤를 잇는다. 이 두 가지를 염두에 둘 때 <마더>는 아무리 미장센이 의식화되었어도 표면의 스토리가 전혀 손상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큰 미덕을 얻는다. 오직 한 부분, 줄거리와 상관없이 벌어지는 사건은 그래서 더 의도적일 텐데, 그것이 바로 도준의 교통사고다. 영화 초반 도준이 체포되는 과정에서 발생한 사고, 아들이 탄 차는 왜 갑자기 그리 허망하게 (혹은 우연히) 부딪히나? 그리고 그렇게 심하게 부딪혔는데 (그는 이전에 뺑소니도 당했다!) 왜 (알고 보면 진범인) 도준은 피 한 방울 흘리지 않나? 따지고 보면 아정과 혜자 외에 피 흘리는 인물은 오직 하나, 고물상 할아버지뿐이다. 그는 또래 남학생의 무릎에서 장난치던 아정을 진짜 슬픔으로 빠트린 장본인인 동시에 녹슨 철통에 몸을 넣고 다리를 벌린 채 혜자를 맞이해 불쾌하게 만든다. 아무래도 감독은 도준에게 조금이나마 구원의 여지를 주려 했던 것 같다. 혜자가 살해한 인물이 실은 내면적 진범이 아닐까? 하는, 아주 약간의 의식적 속죄. 그리고 그 피가 쏙 빠지는 살해 뒤 도준은 약간 성장한다. 어머니를 떠나 비로소 어른이 되는 순간의 모호함. 그는 아마 다시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공포나 섹스, 죽음은 형이상학적 주제인가?

조금의 변주가 있지만 봉준호는 꾸준히 몇 가지 주제를 반복해왔다. 그리고 그 반복의 도식성이 오히려 흡입을 방해하는 부분이 있더라도 작가주의적 영역이 아니라 연출적 자세에서 그는 여전히 우위에 있다. 그러니 오직 한명의 중간자적 인물 진태가 경찰학교 운운할 때, 지금까지와 다른 아이러니가 맴도는 것을 일종의 진보라 보아도 틀리진 않을 것 같다. 하긴, 이번 경찰은 처음부터 진범을 잡았다. 그리고 변호사 말을 들었담 종팔이 억울하게 끌려가지 않았을 수도 있다. 미묘하게 다르고 또 조금씩 엇나간다. 이를 감히 토착적 알레고리의 상투적 발현이라 할 수 있을까? 덧붙여 해외 언론의 지적처럼 봉준호가 히치콕적인 것은 단순한 표면이 아니라 내면에서 비롯됨을 인지하자. 서스펜스를 옹호하는 것 외에도 오리지널 시나리오가 아닐 경우, 봉준호와 히치콕은 거의 동일한 자세로 사건에 접근한다. 일례로 <찢겨진 커튼> 당시 히치콕은 실제 사건에 기초하지만 전개와 끝을 임의로 조절했고, <마더> 속 김혜자의 이미지 차용과 반대는 따라서 지극히 히치콕적 발상에서 출발한다. 스토리가 상승곡선을 그려야 할지 혹은 느슨해지더라도 실험적으로 만들어야 할지를 고민하던 히치콕의 모습에 봉준호가 겹쳐진다. 그렇다고 어머니의 자궁을 오이디푸스적 공포로 그려낸 이 영화를 마냥 옹호할 수 있을까? 분명 봉준호는 최고의 테크니션이지만, 시나리오 선택과 구성 그리고 모든 내용이 테크닉과 밀접할 때 내용과 형식이 분리되는 것을 좋다 나쁘다 평가하는 대목에서 여전히 망설이게 만든다. 트뤼포의 말마따나 ‘공포나 섹스, 그리고 죽음이 정말 형이상학적 주제인가?’ 하는 문제, 다만 히치콕이 단순한 이야기꾼이 아니었듯 봉준호 역시 예술을 위한 예술의 유미주의자가 아님을 기억하자. 아무튼 이것이 지금은 가장 중요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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