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나먼 쏭바강>은 박중훈이 연기 인생에서 겪은 그 모든 고통의 마침표라 보면 된다. <바이오맨> 촬영 당시 악어 사건에 맞먹을 정도의 불기둥 사건도 겪었고, 매일 사우나 안에서 빠져나오지 못하는 것 같은 더위와의 싸움도 지옥 같았다. 미국 유학 뒤 멋진 복귀를 꿈꿨고, 5편의 영화가 엎어지면서 전화위복의 기회로 삼았던 TV드라마 출연이 생각지도 못한 체험으로 다가온 것이다. 당시 붕따우에서는 <하얀 전쟁>(1992) 스탭들이 머물 때 귀신이 나왔다고 해서 화제가 됐던 숙소에서도 잤다. 박중훈이 직접 보지는 못했지만 귀신 봤다는 스탭들도 꽤 됐단다. 그만큼 <머나먼 쏭바강>의 고통에 대해 말하자면 정말 끝이 없다. 더불어 생명의 위협을 느낄 정도로 위험천만한 촬영이 수시로 이어졌다. “대역 없이 다 했어요”, “위험을 무릅쓰고 제가 했어요”라는 후배들의 얘기를 들어도 어딘가 개운하지 않은 것은 그런 경험에서다. 진정 프로페셔널한 배우라면 자신의 안전을 가장 먼저 챙겨야 한다는 것이다. <머나먼 쏭바강>은 좋지 않은 기억들을 더 많이 안겨둔 채 장장 1년여의 촬영을 끝냈지만 그렇게 배우로서 자신을 되돌아보게 하는 계기가 됐다. 편집자 주
촬영은 매일 고난의 연속이었다. 가령 새벽에 일어나 숙소에서 촬영장까지 가는 데 버스로 3시간 걸린다. 그 버스라고 해서 괜찮냐면 절대 아니다. 버스 바닥판이 다 헐어서 버스 안으로 황토 흙먼지가 다 올라온다. 그래서 마스크를 쓰고 버스를 타야 했다. 버스에서 내리면 얼굴 전체가 황토를 다 뒤집어쓴 상태인 거다. 그래서 도착하면 동이 트기 시작하는데, 이미 그 버스를 타면 온몸은 마치 촬영이 다 끝났을 때처럼 녹초가 된다. 그리고 하루 촬영 다 끝내고 돌아오는 데 또 3시간이 걸린다. 그렇게 숙소에 도착하면 밤 11시쯤 된다. 물도 잘 안 나와서 그냥 졸졸졸 나오는 정도다. 그 물로 세수도 하고 샤워도 해야 했다.
다리 쏘지 말랬는데, 다리만 쏜 사연
촬영은 베트남 이곳저곳을 돌며 이뤄졌지만 기온 자체는 어디나 다 괴로운 수준이었다. 좀 과장해서 얘기하자면 거 왜 사우나에서 모래시계 올려놓고 있다가 ‘더이상 못 견디겠다. 나가야지’라고 생각하는 그 순간으로 하루 종일 있는 거다. 그래서 쉴 때 마시던 베트남 냉커피의 맛을 잊을 수 없다. 게다가 화장실은 따로 없으니 적당한 곳을 골라 자리를 잡은 다음 구덩이를 파고 일을 보고 덮고 그랬다. 여기저기 전갈들이 다니고 있는데 말이다.
그 고생을 하면서도 통신이 발달되지 않아서 한국으로 전화할 수도 없었다. 통역은 더 큰 문제였다. 과거 60년대에 북한 김일성대학으로 유학을 다녀온 베트남 사람이 통역을 했다. 북한으로 유학 다녀온 지 20년도 더 된 사람이 북한말 비슷하게 통역을 하는 거니 그 수준이 뻔하지 않나. 한국과 베트남 스탭 양쪽이 영어로 의사소통이 원활한 상태도 아니니 유일하게 기대는 사람이 그분이었다. 아주 급할 때면 한국쪽에서 영어로 좀 하고 베트남 스탭 중에서 영어 좀 하는 사람이 적당히 알아듣고 하면서 그렇게 몇번을 거쳐 통역이 이뤄졌다. 그러니 당연히 문제도 많았다. 한번은 다리에만 총을 쏘지 말라는 말이 잘못 전해져서 다리에 총을 쏜 적이 있다. 쏘지 말라는 걸 쏘라는 걸로 잘못 들은 건데 가짜 총이었으니 천만다행이었다. 그렇게 촬영 자체가 매일 시행착오의 나날들이었다. 한번은 프로덕션 문제 때문에 내일 촬영한다 하면서도 못한 채 3개월 내내 스탠바이 상태로 있었던 적도 있다.
총격전은 물론 폭발신들이 꽤 있었으니 위험한 촬영 자체가 많았다. <말아톤>으로 유명해진 배우 이기영씨도 그때 있었는데 폭약 터지는 장면에서 날카로운 돌이 갑자기 얼굴로 날아들면서 안면이 10cm 정도 찢어지기도 했다. 지금도 얼굴에 살짝 남아 있는 상처가 그때 생긴 것이지 싶다. 나도 트럭에서 뛰어내리는 것 찍다가 팔목이 꺾여 한동안 똘이장군처럼 ‘왕손’으로 지낸 적도 있다. (웃음) 지금 생각하면 정말 너무 원시적인 방법으로, 육체적인 고통을 등한시한 채 찍었던 거다.
또 한명 생각나는 배우는 이동진씨라고 있다. <병사와 아가씨들>(1977)에 안성기 선배랑 공동 주연으로 나오고, <고교결전 자! 지금부터야>(1977)에는 진유영 선배와 함께 출연했던 70년대 하이틴 영화 스타 중 한명이었는데 거의 하루에 맥주캔 50개까지 드신 적이 있을 정도로 술을 좋아하시던 분이었다. 한참 있다 간질환으로 돌아가셨는데, 당시 촬영 환경 자체가 워낙 열악하다보니 더 괴로워하셨고 술도 많이 드셔서 지금도 이상하게 그분 생각이 참 많이 난다. 그러고 보니 이제는 한국영화계를 대표하는 무술감독이 된 정두홍 감독도 당시에는 우리 스턴트 무술팀의 혈기왕성한 일원이었다. (웃음)
특수효과 스탭들에게 욕을 퍼붓다
<바이오맨> 촬영 당시 악어와의 사투가 압권이었다면 <머나먼 쏭바강> 촬영 때는 불기둥 사건이 있었다. 산 하나를 깎아서 전투신을 찍는 거였는데 50센트를 준다니까 주민들이 벌떼처럼 모여들어서 금방 산 하나를 정리하고 거기에 참호 등을 만들었다. 낮에는 여기 터지고 저기서 터지니까 그걸 피해 다니면서 계속 동선 연습을 하고 밤에 본격적인 촬영에 들어갔다. 특수효과 스탭들은 저기 뒤에 빠져 있고 나를 비롯한 다른 군인과 엑스트라 스턴트맨들이 바로 거기서 촬영을 하는 건데 전선이 뒤엉켜져 있었던 거다. 게다가 하필 또 비가 와서 이곳저곳이 진흙탕이 됐다. 그래서 원래대로 뛰려다 진탕에 미끄러져서 다른 쪽으로 가게 됐다. 그런데 그 앞에 내가 지나가야 했던 곳으로 지름 3m 정도 되는 불기둥이 5초 정도 솟아올랐다가 사라지는 거다. 만약 내가 미끄러지지 않고 거기로 지나갔다면 완전히 인간 통닭이 되는 거였다. 게다가 여기저기 막 터지는데 생각보다 너무하다 싶을 정도로 터져서 생명의 위협까지 느꼈다.
그래서 촬영이 끝난 다음 너무 화가 난 나머지 저기 멀리 떨어져 있는 특수효과 스탭들에게 “야 이 X새끼들아, 다 덤벼, 이 XX놈들아” 그러면서 완전히 미친놈처럼 욕하면서 외쳤다. <스카페이스>(1983)에서 알 파치노가 마지막 장면에서 계속 ‘fucking’을 연발하며 외치던 그 장면을 떠올리면 된다. 정두홍 무술감독은 당시 진탕에서 함께 굴렀던 스턴트팀의 일원이었으니 우리와 같은 편이었다. 특수효과팀에서도 처음에는 별말 못하다가 내가 너무 오랫동안 쌍욕을 하니까 공수부대 출신도 끼어 있는 몇몇 젊은 스탭들이 “저새끼 때려죽인다”고 달려왔다. 다른 배우들이 나를 말리고 숨겨줘서 더 큰 사건은 피했는데, 열악한 환경에서 스탭들 모두가 예민해져 있던 상태라 그대로 충돌했다면 정말 큰일이 났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고백건대 진심으로 난 명백한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 상황에서도 막연히 도전정신만으로 위험한 촬영에 나서는 게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고 본다. 세상 사람 누구나 그렇겠지만 배우로서 안전에 대한 감각은 필수다. 필요할 때는 무리하지 않고 대역을 쓰는 게 오히려 프로다. 물론 전문가적인 입장에서 직접 연기하는 것이 필요할 때도 있다. <식객>을 찍기 위해 직접 요리를 배우거나, 음악영화를 위해 직접 악기를 배우거나 하는 것 말이다. 나 역시 <우묵배미의 사랑>을 찍기 위해 오랫동안 미싱일을 배웠던 것처럼 배우로서 주어진 캐릭터의 전문성을 체득하기 위해 시간과 노력을 투자하는 것은 영화의 현실감을 위해 당연하다. 하지만 그런 유의 위험한 장면을 직접 촬영했다고 자랑하는 것은 전혀 다른 차원의 문제다. 그러다 만약 다치기라도 하면 촬영에 지장을 줘서 그게 더 큰 피해를 불러올 수 있다. 위험이 상존함에도 불구하고 ‘복불복’이라고 그냥 무턱대고 위험한 촬영을 감행하는 게 배우로서의 투지나 열성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젊은 배우 중 누군가가 영화를 촬영하면서 뭘 직접 다 했고 그런 얘기를 하면 그 열의에 박수를 쳐줄 수는 있으나 그건 결코 연기자로서 무조건 뿌듯해야 할 대목은 아니라고 적극 말리고 싶다.
홍콩에서 만난 너무 보고 싶은 애인
더불어 나로서는 결혼을 약속한 신부와 떨어져 있다는 것 자체가 엄청난 스트레스였다. 당시 와이프는 미국 유학을 마치고 일본으로 돌아갔다가 서울에 와서 연세어학당 다니면서 나를 기다리던 상태였다. 3개월 예정하고 떠났던 촬영이 거의 1년 가까이 늘어지고 있으니 서로 그 마음이 얼마나 간절했겠나. 너무 보고 싶은 나머지 촬영 중 휴가를 받아서는 베트남과 한국의 가운데쯤이라 할 수 있는 홍콩에서 마치 견우와 직녀처럼 만났다가 헤어진 적도 있다. 그처럼 육체적 고통은 상상하기 힘들 정도였다. 어쨌건 내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한 TV드라마가 됐는데 당시는 정말 다시는 드라마 하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나와 안 맞았다. 또 그때는 한국과 베트남이 외교 단절 상태여서 전세기로 갈 때였는데 한창 촬영 중이던 1992년에야 다시 외교 정상화가 됐다. 그렇게 <머나먼 쏭바강>은 역사적인 순간을 함께했던 드라마다. 1992년이면 바르셀로나올림픽이 있었던 해라 사람들 사이에서는 마라톤 금메달리스트 황영조가 “훈련이 너무 힘들어서 그냥 달리는 차에 뛰어들고 싶었어요” 뭐 그런 얘기를 해서 유행어가 되기도 했는데, 나도 마찬가지였다. 촬영이 너무 힘들어서 그냥 이대로 죽었으면, 하는 날이 하루이틀이 아니었다. 얼마나 고생을 했던지 농담 삼아 “베트남에서 하도 고생해서 베트남의 ‘베’자만 들어도 경기가 나던 때라 나중에 서울 돌아가면 ‘배’씨하고는 말도 안 할 거”라 했다. (웃음)
베트남을 떠난 게 1993년이었는데 얼마 전 베트남에서 사업을 하는 친구를 만나러 16년 만에 다시 간 적 있다. 와, 정말 깜짝 놀랐다. 한국전에 참전했다가 수십년 만에 다시 한국을 찾은 사람이 느끼는 그 놀라움이 어떤 건지 확실히 알겠더라. 그때는 호찌민 떤선녓 공항이 야외공항이었고 당연히 변변한 건물조차 없었으니 에어컨이 있을 리 만무했다. 나무로 대충 만든 건물 정도가 있었는데 입국 수속은 얼마나 많이 뺏기느냐가 얼마나 빨리 수속을 끝내느냐 하는 걸 결정지었다. 짐을 검사하면서 갖은 트집을 다 잡아 담배 한 보루라도 꼭 뺏어야 입국이 되는 정도였다. 그 정도로 부패가 심하고 기강이 안 잡힌 나라였다. 그리고 내가 촬영하던 동안 국교가 정상화되고 직항로가 개설되면서 실내 공항도 일부 건설됐다. 물론 에어컨도 살짝. (웃음)
한번은 이런 일도 있었다. 당시는 베트남 비자가 필요했는데 잠시 한국 나왔다가 돌아갈 때쯤 깜빡하고 비자를 못 챙겼다. 기간 만료된 것도 몰랐고. 그런데 빨리 베트남으로 돌아가서 촬영은 해야 하고 정말 난감했다. 그러고 있을 때 베트남 현지로 전화를 했더니 일단 우리나라를 빠져나와 베트남에만 오면 단돈 5달러로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이 있다고 했다. 그래서 어찌어찌 베트남으로 떠나게 됐고 그 방법이란 게 별 게 아니었다. 입국 수속할 때 여권 밑으로 5달러짜리를 넣어서 쓱 내밀면 끝이라는 거다. 그래서 시키는 대로 했더니 그 직원이 마른침을 한번 꿀꺽 삼키더니 가뿐히 통과시켜주고 짐까지 다 패스해주더라. 물론 이건 철저히 과거의 기억이다. 그만큼 베트남은 이제 완전히 다른 나라가 됐다. 호찌민공항 자체가 그냥 초현대식 건물로 바뀌어 그때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비자 문제를 5달러에 해결했던 그 나라가…
호텔도 그렇다. 당시 호찌민에는 호텔 같은 게 렉스(Rex) 호텔과 호찌민 강가에 떠 있는 플로팅(Floating) 호텔이라고 2개 정도 있었다. 그런데 이제는 렉스 호텔이 그때그때 리노베이션을 거듭했음에도 불구하고 시내의 다른 최신식 호텔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낡은 호텔 중 하나가 됐더라. 뭐 당시에도 딱히 신식 호텔은 아니었으니 호찌민 자체가 엄청나게 변화한 거지. <머나먼 쏭바강>을 찍던 당시에는 감히 상상할 수도 없던 변화다. 게다가 베트남 사람들은 과거 미국, 중국, 프랑스하고 싸워 다 이겼다는 역사적 자존심이 상당한 나라다. 그러니 그 변화는 당연한 일인 것 같다. 또 아름다운 추억이 마냥 없었던 것도 아니다. 베트남 쌀국수나 월남쌈 같은 음식들도 참 맛있었고 크리스마스 이브 때는 천장에 있는 도마뱀 쳐다보면서 모기를 잡기도 했지만 크리스마스 트리도 봤다. 세상에 겨울에 반팔 입는 그 더운 나라에서 크리스마스 트리도 만들더라. (웃음) 시내에는 산타클로스 할아버지도 몇 사람 다니고. 그렇게 <머나먼 쏭바강>은 별 변화없는 베트남의 사계절을 모두 겪으면서 촬영이 끝났다. 어떤 식으로든 절대 잊지 못할 추억인 것만은 분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