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 사람들은 방금 이사 와서 아직 정리가 안된 건가요? 왜 바닥에서 저러고 자죠? 침대는 어딨어요?” (<살인의 추억> 중 박두만 형사 부부가 맨바닥에 이불 깔고 자는 것을 보고)
“옛 남자친구를 잊는 데 그렇게 오래 걸리나요? 꼭 옛 남자친구의 인정과 축복까지 받아야 새 남자친구를 만날 수 있는 건가요?” (<엽기적인 그녀>에서 그녀의 비하인드 스토리를 알게 되고)
“취조하면서 정말 저렇게 때리나요?” (<추격자>에서 지영민이 경찰서에서 취조당하는 장면을 보고)
“경찰이 왜 총을 안 갖고 다니죠? 왜 그냥 쏴버리지 않죠?” (<살인의 추억>에서 김병순을 형사들이 쫓아 뛰는 것을 보고)
“그래서 한국인들은 귀신이 정말 있다고 믿나요?” (<혈의 누>에서 모든 게 김인규의 범행이었음을 알게 되고도 핏물로 내리는 빗줄기에 사람들이 광란하는 것을 보고)
“술을 저렇게 마시는 사람이 왜 마약은 안 하나요?” (<행복>에서 영수의 폭음을 보고)
“으아아아아아아악!!!” (<올드보이>에서 오대수에게 씹힌 산낙지가 계속 꿈틀거리는 것을 보고)
<씨네21> 기자 출신 오은하, 미국 대학생들과 한 한기동안 한국영화를 이야기하다
영화 공부를 위해 미국으로 유학을 떠났던 전 <씨네21> 기자 오은하씨가 현재 박사과정 중인 서던일리노이대학에서의 한국영화 강의 경험을 바탕으로 기사를 보내왔다. 원고는 이번 봄학기 중 학부생들을 대상으로 개설됐던 ‘동아시아 영화 개론’ 중에서 한국영화 부분을 중심으로 작성됐다.
박사과정 3년째를 맞아 처음으로 내 이름을 달고 개설한 영화학과 3학년 전공선택과목이자 전 학생 교양과목인 ‘동아시아 영화 개론’은 처음부터 여러 가지로 어설픈 수업이었다. 일단 내가 저런 거창한 제목을 걸고 강의를 할 만한 내공이 아니라는 점이 그랬고, 아무리 개론과목이라지만 홍콩 액션영화조차 본 적이 없는 이들도 많을 정도로 학생들이 기본적인 준비가 안돼 있다는 점이 그랬다. 그것까지는 그렇다고 쳐도 북한과 남한도 헷갈릴 정도로 동아시아에 무지하다는 점은 상당히 걱정스러웠다.
왜 북한 영화는 없는 거죠?
무엇보다 한 학기에 한국·일본·중국·대만 그리고 홍콩까지, 다섯 지역 나라들의 영화를 강의한다는 발상 자체가 말도 안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학과 입장에서 볼 때 되도록 많은 학생들을 끌어들이려면 “한국 50년대 영화연구”같이 좁고 전문적인 주제를 잡아선 안됐고, 동아시아쪽 영화 과목은 지금까지 이 학교에서 개설된 적이 없었기 때문에 학과에 이런 과목의 필요성을 얘기하기 위해서는 일단 넓게 범위를 잡아 말하는 게 유리했다. 텍사스 주립대에서 석사과정을 할 때 미국영화 과목 이름들이 ‘스코시즈’, ‘아메리칸 호러’ 등등으로, 여기서 박사과정을 할 때 과목 이름들이 ‘웨스턴’, ‘베트남을 주제로 한 영화’ 등등으로 세부화됐던 것에 비하면 ‘동아시아 영화 개론’이라는 과목 이름은 말이 안되다 못해 무례함의 극치라고 여겨졌다. 하지만 이들에게 아시아가 여전히 얼마나 심정적으로 먼 곳인가 생각해보면 이 정도의 제목도 시작으로는 괜찮을 것 같기도 했다. 실제로 학과장부터 단과대학원장까지 ‘동아시아 영화 개론’이라는 문제 많은 제목에서 아무런 문제점도 찾지 못한 채 이 제안에 다들 만족스러워하였던 것이다.
일단 안이 통과되자 나는 실러버스(강의요강)를 준비하느라 분주한 나날을 보냈다. 많은 고민 끝에 초보학생들의 접근 용이성과 흥미를 고려하여 20세기 대중영화들에 국한하기로 하고, 한국·일본·중국권, 이렇게 세 덩어리로 나누어 각각의 지역을 다시 멜로·액션·호러·코미디 등의 장르로 나누는 방식을 확정했다. 75명, 90명씩 두반을 가르쳤는데, A반은 <올드보이> <엽기적인 그녀> <혈의 누> <살인의 추억> <추격자>를 보여주었고 B반은 이중에서 <혈의 누>를 빼고 <행복>을 보여주었다. 물론 여기에는 커다란 허점이 있다. 학기 통틀어 내가 가장 당황했던 순간은, 실러버스 초안을 보고 조교들이 왜 북한영화는 없냐고 물었을 때였다. 가만있자… 정말 왜 북한영화가 없지? 정식 국가도 아닌 홍콩영화는 있는데 왜 동아시아의 한 주권국가인 북한의 영화는 빠졌지? 내가 어떻게 교육받고 자라왔는가를 새삼 깨닫게 되는 순간이었다. 너무 막바지라 새로 북한영화를 추가하지는 못했지만 앞으로 이런 기회가 있다면 실러버스는 전면적인 수술을 해야 할 것이다.
상상도 못한 엉뚱한 질문들 쏟아져
학생들은 언제나, 내가 상상도 못한 질문들을 했다. 이런 것들을 궁금해하겠지 하고 준비를 해가는데, 그 범위를 벗어나는 엉뚱한 질문들을 잘했다. 글 첫머리에 쓴 예들 외에도 <엽기적인 그녀>를 보면 견우가 그녀를 업고 여관에 들어간 첫날, 주인이 한식 방을 줄까 양식 방을 줄까 물어보는데, “저희 약혼했어요!”라고 외치자마자 “한식, 양식?” 하고 묻는 자막이 나온다. 그러자 침대 유무에 따라 한식 방 양식 방이 갈림을 알 리가 없는 이 학생들은, 약혼을 한국식으로 했냐 서양식으로 했냐를 묻는 줄 알고, 여관 주인이 저 와중에 저런 질문을 하는 것으로 봐서는 뭔가 의미심장한 질문일 것이다, 한국식으로 약혼을 했다는 것은 전통적 가치를 소중히 한다는 뜻일 것이므로, 순결에 대해서도 이러저러한 생각을 갖는다는 의미일 것이다 하면서, 자기네들끼리 엉뚱한 상상의 나래를 마구 펴며 토론을 하는 것이다. 서두에 쓴 박두만 형사의 경우도, (침대가 준비 안된 것으로 보아) 이사한 지 얼마 안돼 짐정리도 안된 집에 신산스럽게 사는 형사이므로 아마 성격이 얼렁뚱땅일 것이다 하며, 엉뚱한 단서를 가지고 엉뚱한 전개의 해석을 하기 일쑤였다.
반면에 작품의 심장을 건드리는 중요한 주제들에도 어렵지 않게 접근하였다. 중간중간 지루해하고 탈영병의 처지에 대해서는 전혀 이해를 못하면서도, 학생들은 <엽기적인 그녀>를 무척 좋아했다. 의외로 “운명적인 사랑”이라는 아이디어에 대해 쉽게 수긍을 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동시에 어째서 한 관계가 끝난 뒤에 거기에 어느 정도 매여 있어야만 그 관계가 진실한 것이었다고 생각하는가, 에 대해 많은 이견이 있었다. 친구가 고민에 빠져 있을 때 “Move On!”을 첫째가는 조언으로 치는 미국 학생들인 만큼 과거에 연연해하고 심지어는 과거 연인의 하늘로부터의 축복이 있어야만 다음 단계로 옮겨갈 수 있다는 대전제에 대해 공감하기 어려워했다. 사랑이 끝나고 다음 사랑이 시작할 수 있기까지의 기간, 이것을, 지난 사랑에 대한 조의를 표한다는 뜻에서 우리끼리 ‘조의기간’(mourning period)이라고 부르기로 했는데, 이 조의기간이 충분히 있어줘야 그 사랑이 진정한 사랑이었다는 증명도 되고, 또 그 기간을 제대로 이행하지 않고 다음 사랑을 시작하면 찜찜한 죄의식을 느끼는 경우도 있다는 내 설명에 많은 학생들이 아연해했다.
<올드보이>의 강렬한 주제와 스타일에 열광
<올드보이>에 대한 학생들의 사랑은 가히 폭발적이었다. 그 강렬한 주제와 스타일리시한 만듦새에 학생들은 열광했다. 게다가 이 영화는 아시아영화 문외한들에게도 제목만큼은 상당히 알려져서 이런 유명한 작품을 나도 드디어 직접 보았다라는 지적 만족감도 크게 주는 듯했다. 영화 조금 안다는 학생들 사이에서는 이미 레전드가 돼 있는 좁은 복도에서의 격투장면이나 이를 뽑는 장면, 산낙지 먹는 장면에서 학생들은 탄성을 지르고 비명을 지르고 얼굴을 가리고 웃고 뛰쳐나가고 환호성을 울렸고, 나는 영화가 아닌 관람객을 구경하는 것만으로도 너무 재밌었다.
성애(性愛)라는, 제도와 관습도 그 앞에서는 힘을 잃는 강력한 그런 힘이 있어서, 딸임에도 그냥 외면한 채 사랑하고 싶게 한다는 영화의 발언에 대해 학생들은 충격 속에서도 대개는 열정적이고 긍정적으로 반응하였다. 다른 영화들에서와 달리 학생들은 디테일한 상징과 묘사에 대해서도 상당히 예민한 반응을 보였다. 예컨대 외로움의 상징으로 개미가 등장하는데, 아이들은 오대수의 개미는 떼를 지어 나타나는 데 반해 미도의 개미는 단 한 마리의 거대한 독고다이 개미라면서, 미도의 외로움이 더욱 크고 절실했던 거라고, 미도에게는 개미조차도 혼자 외롭게 나타난다고 해석을 하였다. 또, 오대수의 살을 뚫고 들어가는 개미들은 마스터베이션과 성적인 외로움을 묘사하지만 미도의 저만치 홀로 떨어져 있는 개미는 미도의 정서적 외로움을 나타낸다고 진단해보기도 하였다.
반응은 양극으로 갈렸지만 또 하나 많은 환호를 받은 작품은 <추격자>였다. 현장검증이라는 제도를 전혀 이해하지 못했고 (미국에는 그런 것이 없다는 걸 나도 이번에 처음 알았다. 처음에는 학생들이 무슨 질문을 하는지도 이해 못했다) 왜 서울시장이 똥 세례를 받았으며 왜 경찰들이 그 사건에 대해 전전긍긍하는지 잘 모르면서도 학생들은 이 영화를 무척 좋아했다. 빠르고 자극적이고 게다가 <살인의 추억>에서와 달리 결국 범인을 잡는다는 명쾌한 결론까지 갖춘 이 고순도 엔터테인먼트를 보자 그간 관람했던 각종 지루한 영화들의 고역을 이제야 보상받는다고 기뻐했다. 엄청나게 몰입해서 관람을 하던 학생들은 슈퍼 주인이 지영민에게 여자가 여기 와 있음을 말하는 대목에서 책상을 들이 흔들고 소리를 지르고 욕을 하고 난동을 피웠다. 학생들은 드디어 한국에도 본격 시리얼 킬러 영화그룹이 만들어진다는 것이 한국사회의 최근의 어떤 변화와 관련이 있는 것이냐는, 내가 답하기 어려운 질문을 내놓기도 했다.
<행복> <혈의 누>의 사랑과 한 이해 못해
반면 <혈의 누>는 학생들보다 나에게 깊은 인상을 준 상영작이었다. 비록 <혈의 누>가 정통 공포영화는 아니지만, 여기 나오는 귀신과 한(恨)의 개념을 가지고 한국 공포영화에 대해서도 이야기를 이어가고 싶어서 애초에 목록에 넣었다. 공포영화야말로 각 사회와 시대의 집단적인 무의식을 보여준다는 로빈 우드 말따나 낯선 문화권의 영화와 사회를 공부할 때 “거기 사람들은 무엇을 무서워하나”를 접해보는 게 가장 강력하고 효과적인 경로일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여러분들, 혹시 지난 중간고사가 대학시험치고 지나치게 쉬웠다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이 강사는 대학 강사치고 좀 너무 착하지 않습니까? 게다가 이 강의실 밖에서 나를 본 사람은 거의 없지요? 뭔가 이상하지 않습니까? 이제 학기가 끝나면 여러분들은 성적표를 받겠죠. 하지만 이 과목은 아예 기록돼 있지도 않을 겁니다. 이상해서 학적부를 찾아가보면 이 대학 역사상 이런 이름의 과목은 한번도 개설된 적이 없다는 얘기를 듣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아울러, 실은 거의 20년 전, 교수가 꿈이었지만 너무 공부를 못해 졸업을 못한 한 동아시아 유학생 여성이 바로 이 건물에서 자살을 했는데, 그 귀신은 저승으로 떠나기에는 너무나 한이 많아서 가끔 이 건물 강의실에 강사의 모습으로 나타나 학생들을 홀린다는 것입니다….” 귀신과 한에 대한 이런 기본 얼개는 재밌어하고 잘 알아들으면서도, 한 걸음만 더 나가면 이해가 잘 안되는 것 같았다. 머릿속으로는 멀쩡히 알아들어도 가슴으로는 받아들여지지 않는 것 같았다.
예를 들어 <혈의 누>에 나오는, 죽은 뒤에도 풀리지 않아 귀신으로 하여금 이승을 배회하게 하는 ‘한’(恨)이라는 존재가 그랬다. 모든 게 김인규의 범행이었는데, 그럼 나중에 내리는 피의 빗물은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그걸 또 뭐 저렇게 무서워한단 말인가?. 미국 관객에게 공포란 가만히 딴 데 보고 앉아 있는데 누가 뒤에 몰래 와서 왁! 하고 놀라게 했을 때 느끼는 ‘깜짝 놀람’ 같은 종류의 감정인 것 같았다. 저기 뭔가가 있을지 몰라, 뭔가가 여기 나와 함께 자리하고 있을 거야, 라는 식의, 귀신에 대한 가정과 상상이 주는 공포에는 우리보다 훨씬 둔감한 것 같았다. 게다가 이 모든 것이 불균질한 발전과 전개 속에 그대로 기형적으로 봉합돼버린 대한민국 근대화에 대한 알레고리라는 것을 설명하기가 너무 힘들어서, 내가 너무 사랑하는 영화지만 두 번째 섹션 때는 아예 빼버렸다.
대신 넣은 것이 <행복>이다. 지극히 뚜렷하고 아름다운 내용의 한국 전통적 러브스토리라고 생각되어서 넣었는데, 반응은 신통찮았다. 학생들은 지고지순한 은희의 사랑에 감동하기보다는 술은 마구 마시는 사람들이 왜 마약은 하지 않는지에 더 관심을 가졌고, 너무 늦게 온 영수의 깨달음에 대해 마음아파하기보다는 영화 초반에 목숨을 끊은 영수 룸메이트 아저씨에 대해 더욱 감정이입을 하였다. 청순가련하고 지고지순한 춘향이형(形) 사랑에 대해 학생들은 감흥을 느끼지 않는 것 같았다.
기습적 유머와 해결없는 결말에 거부감
짧은 경험이었지만, 이로써 나는, 한국영화의 코미디와 액션은 미국 관객에게도 잘 통하는 반면, 오히려 보편적일 듯한 사랑 이야기나 호러가 소통이 덜 된다는 것을 느꼈다. 사랑에 대한 이해도 많이 다르고, 더군다나, 무엇을, 어떤 분위기에서 공포를 느끼는가는 정말 현격히 달라 보였다. 일본영화 <오디션>이나 <링>을 보여주었을 때도 비슷한 것을 느꼈다. 한마디로, ‘춘향이형 사랑’이나 ‘(여자의) 한(恨)’ 같은 주제들은 적어도 우리 강의실에서는 잘 소통되지 않았다. 물론 시대와 역사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가 있어야 하는 <살인의 추억>이나 <혈의 누>는 완전 쥐약이었다. 내가 너무나 사랑하는 두 영화가 가진 것의 반의반도 이해되지 못한 채 지루한 영화로 치부되는 것을 보면서 정말 마음이 아팠다.
이외에 뜻밖이었던 것은 기습적인 유머와 장르의 섞음, 그리고 해결없는 결말에 대한 엄청난 거부감이었다. 예를 들어 <살인의 추억>이나 <추격자> 여기저기서 나오는 유머를 학생들은 아주 썰렁해했다. 도대체 이 대목에서 왜 유머가 나오냐는 것이다. 왜 갑자기 코미디를 섞어서 주의를 산만하게 만드냐는 것이다. 더군다나 해결없는 결말에 대한 거부감은 정말 심했다. <살인의 추억>을 끝까지 본 학생들은 불만이 가득했다. 잡지도 못할 거 왜 꼭 잡을 것처럼 영화로 만들어!! 범인이 대체 누구야!! 이것이 실화임을 알고 나서도 반응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나는 이것을, 시원한 결말을 현실에서도 별로 본 적이 없어서, 해결없는 결말에 근본적으로 친숙한 우리와 이들의 차이가 아닐까 하고 해석해보았다.
하하 너희들도 중독되기 시작했구나
이 강의를 준비하면서 얼마나 내 가슴이 요동쳤는지 아무도 모를 것이다. 내가 아직 내공이 별로 없는 학생에 불과하고 솔직히 말해 동아시아 영화 전문가가 전혀 아니라는 점은 차치하고라도 저 많은 낯선 학생들 앞에서 영어로 강의를 해야 한다는 부담이, 봄학기 개강하기 훨씬 전부터 커다란 돌더미처럼 나를 짓눌렀다. 아이들이 내 말을 못 알아들으면 어떻게 하나, 반대로, 아이들의 질문을 내가 못 알아들으면 어떻게 하나, 외국인 여자라고 깔보면 어떻게 하나, 애들이 개기고 무례하게 나오면 나는 뭐라고 하나. 익스큐즈 미, 와이 두유 두 댓?
3년째 영화 개론 과목 조교를 했지만 일주일에 몇번 토론을 이끄는 것과 완전히 수업을 혼자 맡아 해내는 것과는 차원이 전혀 다를 터였다. 게다가 이 과목이 A반, B반이 있는 이유는 전 캠퍼스적으로 발생하는 유급 직전 위기의 학생들을 구제하기 위한 것이었다. B반은 중간고사 이후에 시작하는데, 다른 과목에서 F를 받을 찰나의 학생들이 막판에 철회를 하고 말을 옮겨 타는 과목이 돼주는 것이다. 그러니 워낙에 학업에 뜻이 없는 학생들이 대거 몰려오게 마련이어서 내 전임으로 이런 성격의 강의를 맡았던 어떤 박사과정 (미국) 선생님은 학생들이 하도 말을 안 듣고 무례하게 나와서 수업 끝나고 자주 울었다는 얘기를 들었던지라, 매일 악몽의 시나리오를 이것저것 상상해봤다. 농담이었겠지만, 조교들을 되도록 인상 험악하고 덩치 좋은 애들로 고르라는 조언까지 들었다.
사람들은 단체로 뭉쳐 있으면 군중의 만용이 생기고 하나씩 개개인화하면 문명적으로 행동하게 마련이다. 학생들을 개별화하기 위해 아이들 전원의 이름을 외우고 매 시간 짧은 감상문들을 내게 하여 그것을 읽어봄으로써 학생들의 성격과 취향을 알아가기로 했다. 결과적으로는 보람이 있었다. 강사가 그 많은 아이들의 이름을 다 알고 감상문의 내용도 일일이 다 기억하고 있음을 슬쩍슬쩍 비추어주자 학생들은 경이와 존경을 넘어 공포에 떨었고 그때부터 일제히 순한 양이 되었다. 누가 좀 떠든다 싶으면 “마이클은 지난 시간에 아주 좋은 지적을 해주었는데 그건…” 하고 말을 시작하면, 떠들던 마이클은 화들짝 놀라서 집중을 하기 시작했고, 누가 좀 풀이 죽어 보인다 싶으면 “이런 점은 지난번에 톰이 직관력 넘치게도 제기해주었던 문제와 맥을 같이하는 것인데…” 하고 서두를 떼어주면 톰은 다시 자신있게 손을 들게 되었다. 심지어는 재미없고 썰렁한 농담에도 그것이 농담이었다는 의도만 파악되면 마구 웃어주었다. 덕분에 수업 분위기는 언제나 최고였다. 그리고 나는 아이들 말을 잘 알아듣지 못해 그냥 시간을 벌려고 “정말 훌륭한 생각이야, 나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네. 누가 여기 이어서 더 말해볼 사람?” 하고 넘어갔던 적이 종종 있었는데 아이들은 그것 역시 좋게만 해석하여, “언제나 모든 의견을 존중하고 마음이 열려 있는 강사”라는 엉뚱한 칭송까지 받게 되었다.
절대로 지나지 않을 것 같았던 무섭고 길었던 한 학기가 이제 다 지나고, 좋았던 일 좋지 않았던 일이 많았지만, 가장 기억에 달콤하게 남아 있는 것은 종강 뒤 강의실을 빠져나가던 아이들 몇몇이 수줍게 다가와 건네준 말이다. “Now I think I’m so in love with Korean cinema!” 하하 너희들… 드디어 한국영화에 중독되기 시작했구나!! 한번 발들여놓으면 이제 약도 없단다!! ^^
(실러버스 작성에 큰 도움을 주신 뉴욕대의 이상준씨와 시카고대의 박현희씨, 서던일리노이대의 노광우씨께 이 자리를 빌려 깊이 감사드립니다.)
그외 동아시아 영화들에 대한 반응
중국영화 이게 뭥미~
학생들이 가장 거부감을 보인 것은 중국영화였고 가장 친근하게 느낀 것은 홍콩영화였다. 사람들이 다닥다닥 붙어 씻는 좁은 공중목욕탕, 거침없는 동성끼리의 스킨십, 아무리 코미디라지만 과도하게 이어지는 구타 등으로 <크레이지 스톤>(닝하오, 2006)을 보면서 학생들은 기함을 했다. 지아장커의 <스틸 라이프>(2006)는 상영 중 폭동이 일어날 뻔했다. 두 시간 동안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영화에 대해 아이들은 허망함을 넘어 분노마저 느끼는 것 같았다. 나는 소통의 벽을 느꼈다. 아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니!! 저 두 커플의 마음속에서 일어난 간절함과 후회, 분노, 미안함, 사랑, 그런 강렬한 감정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니!! 나는 이게 문화 차이인지 세대 차이인지가 헷갈릴 지경이었다.
반면 홍콩영화는 <쿵푸 허슬>(주성치, 2004), <룰 넘버 원>(캘빈 통, 2008), <무간도>(유위강, 2002) 등 아무런 사전지식 없이도 편안하고 즐겁게 감상할 수 있었다. 진작부터 세계화됐던 홍콩영화의 노하우와 저력이 느껴지는 대목이었다. 다만, <무간도>와 <디파티드>(마틴 스코시즈, 2007)를 비교하면서, 어째서 무간도의 형벌- 마음은 영원히 무간지옥에서 헤매야 하는- 이 형벌 축에나 끼는가, <디파티드>에서처럼 시원스럽게 처단해야 그게 형벌이지, 하면서 이해하기 어려워하기도 했다.
일본영화는 내 선정이 잘못된 것인지 반응이 내 기대에 턱없이 못 미쳤다. 미처 말해지지 못한 것에 대한 아련한 슬픔과 그리움을 느껴봤으면 해서 2000년대 작품이 아님에도 고른 <러브레터>(이와이 순지, 1995)는 “대체 누가 누구예요?”라는 거대한 질문 속에 허망히 묻혀버렸다. 내가 꼽는 최고의 호러 <링>(나카타 히데오, 1998)도 대실패였다. 많은 아이들이 미국판 <링>을 이미 봤다는 점도 걸림돌이었지만, 그 어떤 것으로도 해소되고 끝나지 않는 업그레이드 버전 한(恨)의 공포 같은 게 전혀 소통되지 않음으로 인해 이거 너무너무 무서운 영화니까 임신부는 오지 말라고 엄중 경고했던 나만 굉장히 우습게 돼버렸다. <오디션>(미이케 다카시, 2000)은 그 엽기성으로 인해 첫 섹션에서 큰 인기를 끌었지만 “귀신”이 부재하여 <링>으로 교체했던 것인데 오히려 바꾸지 않느니만 못했다.
대만영화는 <케이프 넘버 7>(2008)이라는 청춘영화를 보여주었는데 요즘 대만영화들은 대만의 역사와 사회를 깊이있게 들여다볼 만한 작품들이 드문 것 같아서 선정이 쉽지가 않았지만, 오히려 그런 코드들이 빠져 있어 친근하고 즐겁게 감상할 수 있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