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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영객잔] 낯선 그녀가 불러온 청량함, 현명함

홍상수 특유의 영화적 형식에 새로운 여성상이 등장한 <잘 알지도 못하면서>

<잘 알지도 못하면서>의 영화감독 구경남(김태우)이 제주도의 대학에서 특강을 할 때, 좀 전에 사이좋게 담배를 나눠 피웠으며 구경남의 영화를 두번이나 보았다던 한 여학생이 아까와는 딴판으로 공격적인 질문을 던진다. “왜 이런 영화를 만드세요. 왜 사람들이 이해도 못하는 영화를 계속 만드시는 거예요?” 구경남은 당황하지만 열정적으로 설명한다. “제 능력과 기질은 하나뿐이 없습니다. 정말로 몰라서 들어가야 하고 그 과정이 발견하는 과정이어야 합니다. 과정이 나로 하여금 계속 뭔가 발견하게 하고 그 결과물을 하나의 덩어리로 만드는 겁니다.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하는 것, 구체적인 것을 매번 만날 뿐 체계적으로 미리 갖지 않는 것, 매번 발견하는 것, 단지 감상하는 것, 지금 이 순간에.” 이 말을 듣고 여학생이 조소를 보낸다. “영화감독이 아니라 철학자시네요.”

그날 밤 학생들에게는 저명인사고 구경남에게는 대선배인 화백 양천수(문창길)가 구경남 이하 강의에 참석했던 모두를 모아놓고 남들보다 조금 높은 자리에 앉아 들려주는 창작론은 이렇다. “미리 다 정해서 들어가면 그게 다 뻔한 거밖에 안 나와. 과정이 틀려먹었으니까 아무리 머리를 짜내도 다 한 것들이 나와. 이미 상투가 되어버린 것들인데 그런 상투가 예술에서는 악이야, 최악. 예술에 유일한 존재 이유는 감각적으로 새로운 세상에 존재의 이유를 드러내는 거야. 정말로 모르고 들어가야 해.” 그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누군가가 감탄한다. “선생님은 정말 천재시네요.” 구경남에게 철학자라고 조소하던 그 여학생이 양천수에게 그렇게 말한다.

제천과 제주에서 생긴 ‘닮은’ 일들

구경남의 말과 양천수의 말은 사실 같은 것이다. 둘은 분야가 다를 뿐 같은 종류의 믿음을 지닌 예술가인 것처럼 보인다.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두 사람 모두 “자유”와 “자기 생각대로 살려는 충실함”이라고 유사하게 말하는 것으로 보아도 그렇다. 이 이상한 정황, 그러니까 이 여학생의 반응을 기초로 영화 <잘 알지도 못하면서>를 말하는 것도 괜찮을 것이다. 하나의 정황과 진술에 관한 상반된 반응은 홍상수의 영화를 보는 가장 큰 재미 중 하나다. 홍상수는 그런 이중성을 인정한다. 게다가 여학생의 이런 반응은 죽음과 (새로운) 삶에 대한 홍상수 그 자신의 반응과 발견의 과정에도 실은 밀접한 연관이 있을 것이다.

대구라는 형식의 틀을 빌려 양가적 가능성을 끌어낸 다음 그 차이에서 새로운 질문의 덩어리를 빚어내는 홍상수의 영화적 형식을 전반적으로 다시 설명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단지 <잘 알지도 못하면서>의 꼼꼼하게 엮인 거울상에 관해서는 몇 가지 구체적인 예를 들 필요가 있다. 구경남은 12일이라는 시간차를 두고 제천과 제주도로 두번의 여행을 간다. 제천의 영화제 프로그래머 공현희(엄지원)와 제주도의 고 국장(유준상)은 구경남을 그 장소로 초대하는 인물이며 구경남이 목격하지 못했던 그날 밤의 일로 구경남에게 호통을 치거나 싸운 뒤 그들의 성격답게 스크린에서 퇴장한다. 둘은 닮았다.

닮은 두 커플도 등장한다. 구경남이 제천과 제주도에 갔을 때 제천에서는 부상용(공형진)과 유신(정유미) 커플을, 제주도에서는 양천수와 고순(고현정) 커플을 만난다. 부상용과 양천수는 구경남이 누군가에게 사인을 해줄 때 정확하게 등장한 뒤, 각자의 집으로 경남을 데리고 가 아내를 소개한다. 제천의 유신은 자기의 존재를 근원까지 다 안다고 생각하고 제주의 고순은 아는 만큼 알라고 한다. 구경남은 이 커플에게서 두번의 편지를 받게 되는데, 한번은 부상용에게서 다시는 얼씬거리지 말라는 편지를, 고 순에게서는 유혹의 편지를 받는다. 부상용의 집에 있던 석회암 돌멩이가 고순의 집에서 발견되는 것처럼, 어쨌든 경남의 두번의 여행은 겹쳐 있으며 둘 다 망신살이 뻗친다. 이때 등장인물마다 한 가지 화제에 약속이나 한 것처럼 집중하는데, 그들은 전부 새 삶을 사는 것에 관해 말한다. 하지만 새 삶은 이중적이다. 우리는 그들의 마음을 믿어야겠지만 그들의 결론은 미뤄둬야 한다.

새 삶의 문제와 앎의 문제

새 삶의 문제는 앎의 문제와 부지불식간에 엮여 있다. 안다고 믿는 것의 문제는 홍상수의 영화에서 늘 의심스러운 것이었다. 그건 삶을 어떻게 이해하고 취할 것인가의 문제와 직결되어 있다. 안다고 믿는 것은 앎 그 자체를 넘어 더러는 소유의 문제와 등가로 여겨지기도 했다. 예컨대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에서 아저씨가 뭘 아냐고 대드는 불량 학생들을 앞에 두고 “내가 왜 몰라. 지금 말한 너 알아, 너도 알고, 너도 알아. 너희들이 아무리 어린 혈기에 너희들의 무식함을 잊으려고 하지만 너희들이 모르는 게 있어. 나는 너희들이 모르는 그걸 아는 사람이고”라고 했던 극장의 남자 직원은 결국 민재(조은숙)를 소유하지 못하고, 자기 손으로 사람의 피를 묻힐 것이라는 것도 몰랐다. 그렇다면 “나는 가질 건 갖고 포기할 건 포기하려고 해”라고 말했던 <강원도의 힘>의 지숙은 상권(백종학)을 포기한 것일까. 앎의 문제를 소유의 문제로 놓는다면 그녀는 가질 수 있는 만큼 갖기 위해, 아는 만큼 알기 위해 몸부림치는 인물이었지만 의문의 밤에 상권과 얼싸안고 모호하게 끝났다. 지숙은 아이를 낙태했고 그날 밤 상권의 성기를 애무해주었으며 이해는 하고 있지만 실천은 불가능한 그 세계에서 잉태되었다가 사라진 아이의 유령은 <밤과낮>에서 다시 돌아온다.

누구보다 앎의 지나침을 경계하고 무지함을 사랑했으며 거기에 기대어온 건 홍상수다. 홍상수는 그의 인물들이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게 될지 알지 못했다. 구경남과 양천수가 대변하는 것처럼 그는 매번 구체적으로 주어진 것에 관하여 궁금해했을 뿐이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의 그 여학생의 반응이 개인적으로 내게 큰 웃음을 주었던 것은, 홍상수가 그동안 삶과 죽음에 관한 진술에 대처해온 태도를 떠올리게 했기 때문이다. 홍상수는 삶과 죽음이라는 문제가 때마다 다른 반응을 일으킬 것이라는 걸 알고 있다. 그는 그 오해의 현장을 사랑하는 창작자다.

구경남을 당혹감에 빠뜨린 그 여학생처럼 홍상수는 삶과 죽음에 관해 처음에는 정색하며 싸늘하게 반응했다. 거기에는 사연을 밝히지 않은 분노와 세상을 철저하게 거절할 준비가 되어 있는 마음, 그 맘 깊은 자기 부정, 그걸 보여주기 위한 그 어디서도 볼 수 없었던 형식의 공고함이 있었다. 그때 인물들은 심각한 제스처로 갑자기 죽고 싶어 했으며 형식은 단단하게 표면을 감쌌다. 어디선가 살인이 일어나고 또 누군가는 미련이 남아 밤을 지새웠다. 모텔 방 베란다에는 갑자기 술 취한 남자가 매달렸다가 다시 기어올라왔고(<강원도의 힘>), 소년과 소녀는 어설픈 자살을 감행했다(<극장전>). 하지만 그들은 점점 더 사는 쪽으로 가닥을 잡아갔다. 혹은 죽고 싶어도 죽지 못한다(<극장전>). 그 이후 새로 사는 것의 문제는 당연히 중요해졌을 것이다.

가장 감동적인, 여인의 상의 변모

양천수에게 그 여학생이 반응한 것처럼 홍상수는 한편으로 삶과 죽음의 문제에 아이처럼 환호하기도 한다. 그는 때때로 삶과 죽음을 선생처럼 끌어안아 모시며 감탄사를 뱉는다. 궁금해 마지않는 관찰, 그것이 죽음에 대한 그의 두 번째 태도다. 홍상수는 처음에 죽음을 두려워하거나 소유하고 싶어 했지만 지금은 죽음에 대해 궁금해하는 것 같다. 그런 궁금증의 태도가 등장하자 무엇보다 희극성이 강화됐다. 하지만 삶과 죽음, 희극적 면모는 이미 홍상수 영화에 관한 담론에서 이런저런 방식으로 말해져온 것이다. 그래서 <잘 알지도 못하면서>를 말하는 이 자리에서는 다른 걸 말해야겠다. 여인의 상의 변모라고 할 만한 지점, <잘 알지도 못하면서>에서 그것이 가장 감동적이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에는 전에 없이 독특한 한 여인의 상이 등장한다.

<극장전>의 영실은 동수에게 “이제 그만 뚝!”이라고 호통했다. 그녀는 결과적으로 냉철했고 자기의 세계로 홀연히 돌아갔다. 그녀는 함정에 빠지지 않는 미지의 여인이었다. 하지만 투명하지는 않았다. <해변의 여인>의 문숙은 쓸데없는 이미지로 괴로워했지만 종국에는 자기의 삶으로 기적처럼 돌아갔는데, 그때 두 남자의 힘을 빌려서 모래사장을 빠져나갔다. 반면 <잘 알지도 못하면서>의 고순은 자기의 죄는 죄로 인정하면서도 제 발로 일어서 모래사장을 표표히 빠져나간다. 자기가 잘못했으니 남편이 버리면 어쩔 수 없다고 고순은 그때 말한다.

“나 이제 나쁜 년인가?”라고 묻는 걸 보면 집안의 침대로 외간 남자를 끌어들인 도덕적 난감함에 관해 고순도 잘 알고 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내게는 그녀가 홍상수의 세계에서 처음 등장한 현명하고 청량한 한 여인의 초상처럼 보인다. 그녀에게는 자유 혹은 자기 감정에의 충실함이라는 투명한 빛이 있다. 구경남이 말하는 자유 혹은 양천수가 말하는 자기 삶에의 충실함을 그들은 자기의 예술품 속에서 현현하려고 노력하지만 지금 우리 앞에서 벌어지는 상황에서 그것을 스스럼없이 이행하는 것은 고순인 것 같다.

고순은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는다.“거짓말이라도 말해줘요 당신 내 짝이지요”라며 경남이 허튼 약속을 받아내려 간청할 때에도, “안돼요, 거짓말하기 싫어요”라고 고순은 침대에서의 달콤한 맹세를 단호하게 부정한다. “심심했고 젊은 남자가 만나고 싶었다”고 나중에 솔직히 고백한다. 짝만 찾으면 만사형통이라는 마지막 중제가 있었던 <오! 수정>에서 재훈(정보석)을 받아들이기까지 수정(이은주)은 그 영화의 미분적 사고만큼이나 복잡다단한 인물이었는데, 그녀 역시 지금의 고순과는 달랐다.

나는 홍상수의 영화에서 속이 깊고 상이 아름다운 미지의 여인들을 본 적은 있지만 고순처럼 현명하고 투명하고 또 청량한 여인을 본 기억이 없다. 아니 그런 남자도 본 적이 없다. 그들의 어리석음이 우리와 유사하여 사람처럼 보였고 매력이 넘쳤을지언정 현명함과 청량감은 그들의 덕목이 아니었다. 그들은 지식인이거나 어리거나 늘 고뇌하고 엉뚱하였지만 온전치 못해서 인간적이었고 사랑스러웠다. 때때로 아는 척을 하고 탈이 나는 것이 우리와 같았다. 현명함이나 청량감은 홍상수의 인물들이 취할 수 있는 삶의 요소에 속해 있지 않았다. 그건 저 너머에 있었다. 그건 삶의 형상을 좀 깨달았다는, 앎의 문제쪽에 가깝다고 여겨져왔기 때문이다. 하지만 고순은 놀랍게도 이 자리에서 그와 정반대되는 방식으로 순식간에 우리를 일깨우고 모래사장을 벗어난다. 이 순간이 그래서 가장 놀랍다.

그 여학생의 오해는 왜 밉지 않은가

홍상수 영화의 형식적 긴장감을 즐겨온 이들이 홍상수가 그 형식의 허리춤을 풀어놓는 것에 관해 얼마간의 염려를 갖는 건 당연할 것이다. 하지만 그가 삶을 사는 것처럼 영화로 삶을 살고자 한다는 사실을 확인할 때마다 매번 안도와 쾌감을 느낀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에도 그런 장면들이 있다. 경남이 고 국장과 전화상으로 싸울 때 그는 강연할 때보다 더 당당해 보인다. 풀장에서 고순의 편지가 음성으로 전해져올 때 그녀의 지나간 과거에 대한 구술과 지금 당장 저 앞에 펼쳐진 어느 젊은 연인의 키스가 자/타를 건너서 자연의 하나로 받아들여진다. 혹은 그냥 아무렇지도 않게 찍힌 것 같은 콩나물국을 끓이는 고순과 바다를 향해 달려나가는 경남의 느린 교차편집은 실패한 가능성과 지금 와 있는 소망 사이의 대비인 것처럼 보인다. 또한 경남과 고순이 침대 위에 눕기 전 입을 맞출 때의 그 앵글은 개인적으로 <밤과낮>에서 성남이 계단 청소를 할 때 이름 모를 여인의 하체가 등장하는 순간과 더불어 진귀하고 황홀한 공기를 품은 앵글이다. 그리고 빼놓을 수 없는 모래밭의 라스트신이 있다.

모래밭에서 구경남은 뒤돌아가는 고순에게 “힘든 일이 있으면 전화하라”고 하지만 고순은 하지 않을 것이다. 대신 홍상수의 다른 영화에서 누군가의 모습으로 다시 돌아오기는 할 것이다. 나는 아직 대답을 찾지 못한 채 이 여인이 홍상수의 영화에서 처음으로 의미라는 것을 던지고 간 여인인지 아닌지 계속 생각 중이다. 다만 확실한 건 그녀가 살짝 고개를 숙이고 머리칼을 주워올리며 프레임의 왼쪽으로 조그맣게 빠져나간 뒤 카메라가 반대쪽으로 고개를 돌려 바다쪽을 응시할 때 내가 순간 바다에서 육지쪽으로 바람이 불었다는 착각을 했다는 사실이다. 육지와 바다 사이의 그 연장과 트임을 볼 때 이상하게 <밤과낮>의 폐쇄성이 같이 떠올랐다. 그러니까 나는 구경남과 양천수를 다르게 대한 그 여학생이 밉지 않다. 홍상수의 영화를 볼 때 생기는 삶에 대한 우리의 태도가 대개 그녀의 양가적인 오해와 같으며 홍상수는 그 오해를 사랑할 줄 안다. 삶의 고단함은 홍상수의 영화에서 형식의 미풍을 타고 다시 또 찾아오겠지만 지금은 당장 이 시원한 풍경을 즐겨도 좋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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