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리 밝혀두건대 나는 오래전부터 <안토니아스 라인>(마린 고리스, 1995, 2009년 4월 재개봉)의 팬이었다. 이 영화는 단지 페미니즘 영화의 정전으로서만이 아니라 매력적인 서사와 영화 문법에 대한 모범답안의 하나이다. 좋은 텍스트가 늘 그렇듯 이 영화도 독창적인 근간화소를 갖추고 있음은 물론이고 풍성한 질감과 다채로운 결을 지닌 자유화소가 곳곳에서 빛난다. 또한 중간 중간 등장하는 판타즘 장면은 영화에 활기를 불어넣고 유쾌한 호흡을 만들어내며 궁극적으로 영화의 주제를 이미지화하는 예를 보여준다. 가령 할머니 시신이 관에서 벌떡 일어나 흥겹게 노래를 부르는 모습이나 세상을 떠난 이들이 모두 안토니아의 안마당에 다시 모여드는 결말은 기억에 남을 판타즘이다. 이런 방식은 <녹색의자>(박철수, 2004), <가족의 탄생>(김태용, 2006) 등 페미니즘적 독해가 가능한 한국영화들에서도 발견된다. <안토니아스 라인>은 안토니아라는 여성으로부터 4대에 걸쳐 이루어낸 모계의 가족사를 신화적 차원으로 서술한다. 안토니아의 가계 이야기가 영화의 줄기라면 주위에 포진한 인물들에 대한 묘사는 영화라는 나무에 음영을 새겨내는 곁가지들이다. 풍성한 잎과 가지로 뒤덮인 나무가 폭넓은 그림자를 드리우듯 <안토니아스 라인>도 충분한 사유의 공간을 제공하는 영화다. 하지만 이 영화의 의미와 가치는 이미 충분히 논의되었기에 나는 여기서 다소 지엽적인 이야기를 꺼내려 한다.
여성의 성적 에너지와 임신·출산 예찬
이 영화는 한편의 여성 판타지다. 병적인 부정적 판타지가 아니라 건강한 긍정적 판타지다. 안토니아와 그녀의 딸 다니엘, 손녀 데레사, 증손녀 사라까지 이들 모계 4대는 독립적이고 창의적인 삶을 살아간다. 그런데 이들의 멋진 삶의 완성을 위해서는 남성이 필요하다(아직 어린아이인 사라는 논외로 하겠다). 현실이라면 영화에서처럼 필요할 때마다 적재적소에 남성이 등장할 수 있을까? 신화의 차원으로 서술될 때 이런 것들은 아무 문제가 되지 않는다. 신화는 죽은 자가 산 사람과 교류하고 곰이 사람으로 변신하여도 이상하지 않으며 구체적인 시간과 공간이 생략되어도 무방하다. 그러나 세속적 이야기를 할 때는 현실의 법칙을 지켜야 ‘그럴듯함’이라는 소득을 얻을 수 있다. 나는 <안토니아스 라인>의 스토리를 신화에서 세속적 차원으로 환원시켜 안토니아 모계에 등장하는 남성들과 관련된 몇 가지 질문을 하려 한다.
안토니아 모계에 관련된 남자들에게 아버지나 남편의 자리는 쉽게 허락되지 않는다. 가부장적 제도에 대한 대안 담론을 담은 영화로서 당연한 선택이다. 안토니아는 고향을 떠난 지 20년 만에 딸 다니엘을 데리고 귀향하는데 20년 동안 그녀의 행적은 전혀 언급되지 않으며 다니엘 아버지의 부재는 당연한 것처럼 느껴진다. 안토니아가 고향에 돌아와 새로운 역사를 쓰는 것이 중요하기에 이 부분은 생략되어도 상관없지만 귀향 이후는 다르다. 안토니아가 귀향한 뒤 그녀의 곁에는 아들 다섯을 둔 홀아비 바스가 항상 있었다. 안토니아가 돌아온 지 얼마 되지 않아 바스는 그녀에게 청혼을 한다. 그는 감미로운 말 대신 자신이 홀아비고 아이의 엄마가 필요하다는 현실적인 조건을 이야기한다. 그러나 안토니아는 아들도 남편도 필요없다고 거절하면서 가끔 와서 여자가 할 수 없는 일을 도와달라고 부탁한다.
실제로 바스는 몇년 동안 대가없이 안토니아를 돕는다. 엄밀히 말하면 아무 대가가 없는 것은 아니었고, 안토니아의 집 마당에서 종종 벌어지는 야외 식사 모임에 참석하여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보답을 받긴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안토니아는 바스에게 근래에 다시 생긴 성적 욕구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러자 바스는 둘의 밀회를 위한 오두막을 마련한다. 이 영화는 여성의 성적 에너지와 임신과 출산을 예찬한다. 안토니아 모계와 방계를 이루며 공동체적 사회를 형성하는 커플들이 일제히 섹스를 하는 몽타주 시퀀스는 폭발하는 성적 에너지를 화면에 구현한다. 이런 장면은 <경축! 우리사랑>(오점균, 2008)에서도 발견된다. 성적 욕구의 표출과 해결에 당당한 안토니아의 모습이 시원스럽게 느껴지지만 현실이라면 그토록 손쉬울 리 없다. 안토니아는 자신의 욕구에는 충실했지만 바스의 욕구를 배려하지는 않았다. 바스는 왜 이렇게 안토니아에게 너그러운 것일까? 20년 동안 마을의 이방인으로 지내왔으므로 외로웠고 안토니아의 매력과 인품에 반했다는 설명이 가능하겠지만, 그의 행동은 논리적 인과관계를 넘어 본래 그렇게 결정된 듯 보인다.
적절한 때와 장소에 등장하는 남자들
안토니아의 딸 다니엘의 임신에 기여하는 청년 역시 정자를 제공하는 기능을 위해 존재할 뿐이다. 다니엘은 아이를 낳고 싶지만 남편은 원하지 않는다. 다니엘은 미혼모인 레터의 도움으로 정자를 제공할 남자를 물색하고 그를 유혹하여 임신에 성공한다. 여기서 딴죽을 걸어보자면 만일 다니엘이 예쁘지 않았다면 명문가의 잘생긴 청년이 자신의 오토바이에 무단으로 걸터앉아 자신을 향해 미소를 짓는 다니엘에게 호의를 가질 수 있었을까? 아마도 화를 내며 오토바이를 몰고 가버렸을 것이다. 다니엘이 정자 제공자로, 사회적 역할을 하지 않으므로 아버지라는 말은 어울리지 않을 것 같다, 명문가의 잘생기고 건장한 남자로 고르는 것도 맘에 걸리지만, 더 심각한 건 남자는 자신의 정자가 생명으로 탄생된 것을 모르고 있다는 사실이다. 자신의 의지실천을 위해 타인을 이용하는 것이 윤리적인가? 이야기가 진행되면서 밝혀지지만 다니엘은 동성애자다. 임신을 할 때는 자신의 성향을 모르고 있지만, 그녀가 이런 성적 취향을 갖지 않았다면 이토록 쿨하게 오토바이 청년을 떠날 수 있었을까?
안토니아의 손녀 데레사의 성장과 그녀의 출산에도 두명의 남자가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천재인 데레사는 할머니의 친구인 크룩핑거에게서 철학을 배운다. 자신의 집에 칩거한 채 밖으로 나오지 않는 지독한 염세주의자 크룩핑거는 데레사에게 일종의 유사 아버지의 역할을 한다. 데레사는 천재성을 고무시켜줄 유사 아버지를 가질 수 있는 행운만 손에 쥐고 태어난 게 아니라 맹목적 순정을 바치며 헌신하는 유순한 남자까지 허락되었다. 레터의 맏아들 시몬은 어린 시절부터 데레사를 사랑해왔고 한순간도 변한 적이 없다. 처녀가 된 데레사는 여러 남자와 섹스를 하지만 머리 나쁜 그들은 지적인 면은 물론이고 육체적 만족도 주지 못한다. 데레사는 유일하게 육체적 만족을 주는 시몬의 청혼을 거절하지만 뜻하지 않은 임신을 한다. 출산에 대해 고민하던 데레사는 아이를 세상에 내보내는 행위 자체가 죄라고 믿는 크룩핑거의 반대에도 아이를 낳는다. 아이는 낳았지만 아이에 대한 데레사의 반응은 냉담하다. 육아는 시몬에게 일임하고 독서나 작곡에 몰두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몬은 아무 불만이 없으며 데레사의 비범함을 인정하고 그녀가 원하는 일을 하도록 돕는다.
열린 결말은 곧 숙제다
이 영화에서 여성 판타지의 백미는 시몬이라는 캐릭터다. 육아와 가사를 책임지면서 성적 만족도 주는 헌신적 남자라니 상상만으로도 달콤하다. 여기서 한발 나아가면 <사랑니>(정지우, 2005)에서 그랬듯 내가 사랑하는 모든 남자들이 평화롭게 내 주변에 모여 함께 사는 설정이 되는 것이다. 안토니아, 다니엘, 데레사를 위해 존재하는 바스, 오토바이 청년, 시몬은 여성 판타지가 투사된 전형들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들은 비현실적인 인물일 수밖에 없다. 판타지, 신화, 우화를 현실의 잣대로 검열할 필요는 없다. 현실을 전복하는 힘이 있는 건강한 판타지의 출현은 언제라도 환영할 일이다. 그럼에도 이런 글을 쓴 이유는 여기에 던진 현실적 질문들이 피드백된 판타지의 도래와 생산적 가족 담론의 현실 안착을 소망해서다. 이런 영화들은 늘 열린 결말로 우리에게 숙제를 내주며 끝을 맺는다. 두서없는 내 질문들은 그 숙제에 대한 답을 구하는 과정의 일부이다. 사족 하나. 나는 여기 언급한 영화들을 진심으로 좋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