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봉 전 <인사동 스캔들> 일반 시사. 혀 짧은 소리 내는 털보 사내가 등장하자마자 관객은 웃기 시작했다. 따라 웃었지만, 솔직히 당황스러웠다. ‘아니, 저 배우가 누구지?’ 게으른 기자는 몰랐다. “짝퉁에도 레베루가 있다”는 호진사 사장 역의 고창석. 크레딧을 확인한 뒤에도 정말 몰랐다. 늦깎이 신인인가, 아니면 굵직한 경력의 연극배우인가. 충무로가 월척을 건졌구나, 했지만 그가 누구인지 정말 몰랐다. 그가 그 유명한 <영화는 영화다>의 봉 감독인 줄은. 극단 사다리움직임연구소의 선임 배우로, 연극 <시간의 사용> <벚나무 동산> <보이첵>, 뮤지컬 <가스펠> <사랑하면 춤을 춰라> 등에 출연했으며, 최근에는 한국영화에 자신의 이름 석자를 분명하게 새겨 넣느라 분주한 고창석을 삼청동의 한 카페에서 만났다.
-<부, 산> 촬영이 끝났다고 들었다. =4월30일에 쫑파티했다. <인사동 스캔들>이 마침 부산에서 무대인사를 하고 있어서 그것까지 하고 오느라 서울에는 어제 왔다.
-<부, 산>에선 ‘만날 때리기만 하는’ 아버지로 나온다는데. =(유)승호 보면 욕하고 때리고. 감독은 머리채 잡고 인간적인 모욕도 줘야 한다고 거들고. 그러다 영호 형님하고 붙는 장면에서는 24시간 얻어터지고. 그때는 감독이 고개 숙이고, ‘자, 다시 가겠습니다’ 하더라. 복수도 할 겸 내년에 단편을 하나 찍을 생각이다. 박지원 감독이 출연하기로 했다. 캇, 좋은데 다시. 캇, 이번엔 다른 느낌.
-지금까지는 주로 코믹한 이미지가 강했다. <부, 산>은 좀 다를 것 같다. =코믹한가 진지한가, 그렇게 나눌 순 없고. 다만 아직 카메라 앞에서 연기가 서툴다. 그래서 내 것을 그냥 가져다 쓰는 편이다. <영화는 영화다>의 봉 감독이나 <인사동 스캔들>의 호진사 사장이나 <부, 산>의 아버지의 말투나 제스처는 다 내 것이다. (캐릭터에 맞춘다기보다) 나를 바탕으로 캐릭터를 구축한다고 하는 게 맞을 거다.
-혀 짧은 소리(<인사동 스캔들>)에 관객이 다들 뒤집어지더라. =지금까지 맡은 배역 중 가장 연극적인 캐릭터다. 박희곤 감독은 호진사 사장이 짝퉁 인생이라며 눈에 확 보이는 콤플렉스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했다. 그러면서 그로테크스한 느낌도 있으면 좋겠다고 했고. 그렇다고 다리를 절뚝거릴 순 없는 일이고. 뭐가 있을까. 왜 높은 사람들은 목을 뒤로 이렇게 빼고 말하지 않나. 고민 끝에 호진사 사장은 반대로 혀가 좀 짧고, 몸도 좀 비틀어서 걷게 하면 어떨까 싶었다. 근데 반응은 잘 모르겠다. 아직 영화를 못 봤다.
-시나리오를 받았을 때 호진사 사장 역할이 눈에 들어오던가. =처음 제안받은 건 길림성 곽 사장 역이었다. 왜 영화 보면 맨 마지막에 중국에서 어이, 어이 손 흔드는. 그런데 시나리오를 읽다가 던졌다. 아니 도대체 어디 나온다는 거야. 감독님을 만났는데 곽 사장 역할로 영화에 포인트를 주겠다는 생각이 강하셔서 하기로 했다. 그런데 한참 뒤에 호진사 사장은 어떠냐고 연락하셨더라. 시나리오 읽은 지가 좀 돼서 호진사 사장이 누구예요, 했다.
-대사를 씹는 방식이 독특하다. 특히 <영화는 영화다>의 봉 감독 대사는 대부분 애드리브처럼 보인다. =애드리브를 잘 못한다. <영화는 영화다>에서 했던 애드리브도 “개똥이야, 뭐야”, “이 고기 먹어도 돼?” 뭐 그 정도였다. 컷이 나와야 하는데 안 나올 때 상황을 모면하려고 한 게 대부분이다. 그것도 감독한테 대부분 컨펌받고 했다. 애드리브가 순간을 넘기기도 하지만 잘못하면 늪으로 빠질 때도 많으니까.
-봉 감독의 ‘액쬰’ 발음은 계속 반복되는데 들을 때마다 웃었다. =계속 반복되는 대사라, 시간 날때마다 여러 가지 버전을 감독에게 보여줬다. 카메라, 사운드, 액쬰. 현장에서 연기할 때는 스탭들이 킥킥대서 부끄러울 정도였다.
-연극 무대에 섰던 배우들은 카메라 낯가림이 심하다. 가장 곤욕을 치른 때가 언제였나. =<괴물>. 대사는 단 두줄이었는데, 그걸 못해서 봉 감독님이 ‘다시, 다시, 다시’ 그랬다. 정말 죽을 것 같았다. 처음 무대에 설 때 연출자한테 혼나는 느낌이었다. 나중에 <괴물>이 1천만명이 넘은 뒤 보너스가 100%씩 나갔다. 내 밑의 애들도 받았는데 난 못 받았다. 같이 일했던 친구가 봉 감독님이나 제작사에 대신 말하겠다고 해서, 내가 그랬다. “가만있어라, 씨.” 왜, 내가 민폐를 끼쳤다는 걸 아니까.
-누군가의 도움이 절실했던 때였을 것 같다. =영화하고 나하고는 안 맞는구나 했는데, <바르게 살자> 시나리오가 들어왔다. 우 반장 역이었는데, 첫 번째 조연이라고 할 수 있다. 그때 공부를 많이 했다. 3개월 동안 삼척에 머물면서 현장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 수 있었다. 촬영이 없어도 쭉 지켜봤으니까. 모르는 건 붙잡고 물어보기도 하고. 그 뒤에 <영화는 영화다>의 봉 감독을 쉽게 찍을 수 있었던 것도 <바르게 살자> 덕분이다.
-<바르게 살자> 때는 연출부 아닌 연출부 취급을 받았겠다. =처음부턴 아니고. 한번은 분장실에 갔는데 선배들이 다음 장면이 뭐냐고 물어보더라. 잘은 모르겠는데, 집에서 찍는다던데요, 했다. 콘티에는 그런 장면이 없는데, 누구 집이냐고 물으셔서, 지민이 집이라고 했다. 그게 뭐냐면, 지미집. 그때는 지미집이 뭔지도 몰랐던 거지.
-표준어로 연기한 적은 별로 없었던 것 같다. =연극할 때는 사투리가 큰 장애가 안된다. 그런데 영화를 하려니까 일정 부분 장애처럼 느껴졌다. <친절한 금자씨> 때 식은땀 질질 흘렸다. 사투리 억양이 남아 있으니까 어색하다는 거지. 이렇게, 저렇게 해보겠다, 말할 처지도 아니고. 그러고 있는데 김부선 선배님이 “자기야, 그러지 말고 원래 말투 써” 하시더라. <괴물> 끝나고 나서 사투리를 고치려고 한 적도 있었다. 아침에 일어나서 집사람한테 “잘 잤어?” 했는데, “이게 미칬나” 하더라.
-카메라 앞에서 원칙이 있다면. =모니터를 잘 안 한다. 장기적으로 배우들한테 도움이 안된다. 카메라를 잘 알면, 이 각도에서는 이렇게 하는 식이 생긴다. 후배들에게도 그런다. 거칠더라도 막 덤벼야 한다고. 물론 시선 처리나 카메라 동선은 알아야 하겠지만.
-오디션 보러 많이 다녔겠다. =연극 오디션은 무대에서 진행한다. 반면 영화 오디션은 테이블 하나 두고 할 때가 많다. 뒤에는 사람들이 지나다니는데 미친 듯이 일어나서 으하하하하, 할 수 없잖나. 열심히 하자니 쑥스럽고, 그렇다고 안 할 순 없고. 대개 연출부들이 카메라 들고 오는데 별 말이 없으니 좀 답답하기도 하고. 한번은 드라마 미팅 오라고 해서 극단 후배들 데리고 맘놓고 갔는데 공개 오디션이어서 본의 아니게 후배들 앞에서 오디션을 치른 적도 있다.
-물도 꽤 많이 먹었겠다. =아니. 10작품 보면 9작품은 붙는다. 연극하면서 오디션 심사를 많이 해서 그런지 요령이 좀 있다.
-요령이 뭔가. =누가 주도권을 잡느냐가 중요하다. 조감독이 “바로 시작하시죠”, 하면 “죄송한데, 물 한잔 마시고 하죠”, 한다. “리딩 순서는 ABC로 하죠”, 하면 “괜찮으시면 B부터 하는 게 어떨까요”, 한다. 혹시 “차 한잔 여유있게 하고 가시죠”, 하면 그때는 “또 바로 들어가죠” 하는 거다. (웃음)
-관객이 전혀 기억 못하는 역할도 있을 것 같다. =<예의없는 것들>에서 피아노맨으로 나왔다. 하루 촬영 위해서 피아노까지 배웠는데 잘렸다. <수>에서는 야쿠자 두목으로 특별출연했다. 촬영 때 코모도 호텔에서 재워줘서 ‘특별출연이 좋구나’ 했는데 실은 단역이었다. 크레딧엔 특별출연이라고 나오는데 도대체 어디서 나왔느냐고 묻는 이도 있었다. <아이스케키>의 경찰관2로, <야수>에서도 구룡파 깡패로 나왔다. <야수>는 “야, 없어?” 뭐 그런 대사였는데 10분 만에 끝났다. 근데 신기한 건 <야수> 보고서도 전화하는 분이 있더라.
-단역하면서 얼마나 받았나. =<마지막 늑대> 촬영할 때 엑스트라로 출연했다. 실눈이라는 역할인데 황정민과 양동근이 기차에서 싸우면 중간에 앉아서 이리저리 기웃거리는 역할이다. 연극하는 후배가 ‘형님 정도면 50만원은 받아야 한다’고 해서 그런 줄 알고 갔다. 제작실장의 첫 마디가 출연료를 적게 드려서 죄송하다였다. 속으로는 그럼 40만원인가 했다. 그런데 계속 영화에 대한 설명을 하는 거다. 30만원인가, 부산 차비 빼면 얼마 안되는데. 자존심 문제도 있고. 그런데 나중에 내주신 돈이 100만원이더라. 죄송하다고 하는데 정말 괜찮습니다, 괜찮습니다, 했다. 하하. 그해 연극 <벚꽃동산>을 했는데 동아연극상까지 받은 작품이었지만 세달 반 연습하고 한달 공연까지 쳐서 35만원 받았으니까 엄청 큰돈이지.
-목돈(?) 굴리는 재미가 꽤 됐겠다. =<수> 찍고 나니까 생각이 바뀌더라. 그때 같이 방 쓰던 선배님이 그랬다. 하루에 150만원 받지만, 1년에 몇편이나 할 수 있느냐고. 따져보니까 엑스트라로 고정 출연하는 것보다 훨씬 못 받더라. 연극쪽에서는 영화를 일종의 삶의 돌파구처럼 여기는 분위기가 있다. 실상은 아닌 거지. 그 뒤로 영화랑 연극이랑 똑같이 생각했다. 감독을 마냥 우러러 볼 것이 아니라 파트너로서 생각하는 거지. 제안하고, 아니면 말고. 이건 어때, 아니면 말고. 시나리오가 재미없으면 안 하겠다, 여유도 생기고. 배고프면 굶으면 되니까.
-원래 전공은 뭐였나. =일본어였다. 남들만큼 한다. 비전공자에 한해서. 아리가토. 흐흐.
-탈춤반에서 활동했다던데. =신입생 환영회에 갔는데 잔이 모자라서 엽차 잔에 소주를 따라 마셨다가 뻗었다. 그날 잔 곳이 전통예술연구회라는 탈춤 동아리방이었다. 그 인연으로 들어가게 됐다. 장구 치는 소리가 좋기도 했고. 재밌더라. 탈춤 추려고 전수관에 가기도 하고, 겨울에는 주로 남원에서 지냈다. 나름 운동권이어서 93년에는 총학생회장을 했는데 어느 순간 할 만큼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친 거지. 그래서 졸업 안 하고 1994년에 희망새라는 노래패 겸 극단에 들어갔다. 원래는 1년만 할 생각이었는데, 선배 한명이 “너 노래 하지마” 하더라. 민요 부르는 게 몸에 배어 있다면서. “나보다 노래 잘하냐”고 빈정거리는 후배도 있었고. 그 개OO들 때문에 보란 듯이 5년을 버텼다. 크크. 아, 거기서 집사람도 만났다.
-먹고사는 문제는 어떻게 해결했나. =밤에는 부산 옆의 양산에 가서 공장을 다녔다. 철공소도 다니고, 갈아만든 배도 만들고. 왜, 사각사각 있잖아. 나랑 체형 비슷한 아줌마들이랑 서로 배 깎아주면서 재밌게 지냈던 때다. 몸은 힘들었지만 행복했지. 그런데 97년쯤이었나. 극단에서는 배우 장(長)으로 대접받던 때였는데, 미래의 집사람에게서 전화가 왔다. 아부지가 보잔다고. 지금도 잊지 못한다. 장모님의 냉철한 질문들. “자네 뭐하나?” “연극합니다.” “공장다닌다더만, 대학은 나왔나?” “그만뒀습니다.” 장모님 맘에 드는 답변을 하나도 못했다. “처자식 굶기진 않겠네. 연극 좋잖아.” 호탕한 장인어른의 도움에도 장모님은 “연극이 취미가 아니니까 문제지” 하셨다. 가족관계를 물어서 자신있게 “형은 변호사고, 누나는 대학교수입니다” 했는데 “그런데 자네는 왜 그런가” 하셨으니까. 심지어 사회생활을 남들보다 빨리 했다고 하시기에 “방위근무 했다”고 했더니 “게다가 방윈가” 하셨다. 서럽더라. 일단 극단 생활 접고 서울에 가서 공부를 좀 하자 싶었고, 그래서 집사람과 함께 서울예대 연극과 98학번으로 입학했다.
-서울에서도 공장 다녔나. =형님하고 장인어른이 많이 도와줬다. 물론 알바도 많이 했다. 모터쇼 연출도 하고 비아그라 신제품 발표 이벤트도 하고.
-비아그라? =수백명의 의사분들 모시고, 비아그라 같은 유의 제품을 홍보하는 거였다. 이름은 기억 안 난다. 재즈 공연에 마술쇼나 마임이 이어지는데, 그 공연 내용에, 복용하면 12시간 동안 약효가 지속된다, 주재료가 노란 나리꽃이다, 뭐 이런 제품 내용을 집어넣는 거였다. 행사 주최쪽에서 호텔에서 진행하는 행사이니 품위있게 해달라고 해서 애먹었지만.
-아들이 하나 있다고 들었다. 배우를 시킬 생각이 있나. =딸이다. 나하고 똑같이 생긴 아홉살짜리 딸이다. 온 집안의 걱정 속에서 자라고 있다. 지지난해에 커서 뭐 될래 했는데, 발레리나 한다고 해서 한국무용은 안되겠니 했다.
-조연배우들 또한 수명이 길지 않다. 나름의 계획이 있을 텐데. =조연은 미드필더인 셈인데, 공격하느라 밑으로 잘 안 내려오다 보니 결국 그렇게 되는 것 같다. 내 경우엔 공격적인 미드필드를 하되, 일정 시기가 되면 안정적인 수비수 역할도 마다않고 할 생각이다. 지금 마흔인데, 일단 오십까지는 실컷 저질러봐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