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잿빛 현실을 탈출하고픈 갈급의 호소 <사랑을 부르는, 파리>
이영진 2009-05-06

synopsis 시한부 인생을 선고받은 피에르(로망 뒤리스)는 창밖을 바라보는 것으로 하루를 소일한다. 심장이식 수술을 받으면 40%의 생존 가능성이 있다는 의사의 말을 그는 신뢰하지 않는다. 낡은 아파트 계단을 오르는 것조차 견뎌내지 못할 정도로 그의 심장은 약해졌고, 댄서로서의 삶은 기약조차 할 수 없다. 한편 사회복지사 엘리즈(줄리엣 비노쉬)는 두딸과 막내아들을 데리고 에펠탑이 보이는 피에르의 집으로 이사한다. 동생 피에르를 돌보기 위해 거처를 옮긴 엘리즈는 그곳에서 새로운 인연들을 만나고, 자신을 돌아볼 잠깐의 여유를 얻는다.

제목에 이끌려 달콤한 로맨스를 기대했다면 실망할지도 모른다. <사랑을 부르는, 파리>는 프랑스판 <러브 액츄얼리>가 아니다. 영화 속 파리는 누군가를 원하는 군상들로 가득하지만, ‘파리의 연인’들은 우연의 만남을 필연의 관계로 만들어내기 위해 그다지 애쓰지 않는다. 다가서지 못하고, 고백하지 못하고, 즐기지 못한다. 주위를 배회하며 서성거릴 뿐이다. ‘사랑을 부르는, 파리’에 낭만과 환상으로 채색한 도시는 등장하지 않는다. ‘부르는’은 잿빛 현실을 탈출하고픈 갈급의 호소다.

물론 ‘세상의 중심에서 사랑을 외치’는 용기를 발휘한 이들이 없진 않다. 앞집 여자를 훔쳐보던 피에르는 문득 유년시절 좋아했던 여자에게 전화를 건다. 교수 롤랭(패브리스 루치니)은 젊은 제자 래티시아(멜라니 로렌)에게 마음을 품는다. 그러나 그들에게 돌아오는 건 위안이 아니라 수모뿐이다. 죽을 날을 손꼽던 피에르는 실없는 남자가 되고, ‘실용주의자’ 롤랭은 스토커 취급을 받은 뒤 급기야 끔찍이 싫어했던 심리 상담까지 받는다. 파리에서 온 패션모델을 잊지 못해 국경을 넘는 카메룬 노동자는 상상 속 연인을 만나지도 못하고, 새 사랑을 찾았구나 싶은 마음에 들떠 있던 또 한명의 여자는 갑작스러운 사고로 죽는다.

<사랑을 부르는, 파리>에서 또 다른 주인공은 원제가 일러주듯이, ‘천의 얼굴을 가진’ 파리라는 도시 그 자체다. 세드릭 클래피시 감독은 “사람들은 파리지엔이라고 하면 속물스럽고 젠체하고 부르주아적이고 까탈스럽고 신경질적인 사람들이라고 생각한다… (중략)… 난 그런 생각을 뒤집기 위해 일반적인 통념보다 훨씬 정상적이고 평범한 사람들이 살고 있는 현재의 파리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었다”고 말한다. “계획대로 되지 않는” 도시처럼 사랑 또한 마찬가지다. ‘분절된’ 인간들이 ‘분절된’ 도시에서 나누는 ‘불완전한 사랑’이 어떤 느낌일까라고 자문하는 영화. <사랑은 타이밍!> <스페니쉬 아파트먼트> 등의 전작처럼 여러 인물들의 일상을 한데 묶어내는 감독의 재주는 여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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